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이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한 사건이다. 이른바 ‘독립 전쟁 제1회전’으로 평가된다. 봉오동 전투는 단기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했고, 장기적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전력이나 규모 등에 대해 과장하고 독립군을 미화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 분위기를 읽는 것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에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
영화 <봉오동 전투>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봉오동 전투>의 첫 장면. 푸르스름한 새벽, 일본군을 따라 조선인 형제가 두만강을 건넌다.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한 일본군은 “둘이 사이좋게 나눠 가져”라며, 음식이 든 자루를 던져준다. 동생이 들뜬 마음으로 자루를 열어보지만, 그 속에는 폭탄이 들어있었다. 동생은 형을 살리기 위해 울먹이며 자루를 끌어안았다. 대한독립군 황해철(유해진 분)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2019년 8월에 개봉했다. 유해진(황해철 역), 류준열(이장하 역), 조우진(마병구 역)이 독립군으로 출연했다. 기타무라 가즈키(야스카와 역), 이케우치 히로유키(쿠사나기 역), 박지환(아라요시 역)이 일본군으로 출연했다. 한국과 일본의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참여해, 개봉 전부터 흥행에 대한 기대가 높았으며 478만 명이 관람했다.
영화에서 일본군 월강추격대장(越江追擊隊長)은 ‘야스카와 지로’ 소좌로, 남양수비대장(南陽守備隊長)은 ‘아라요시 시게루’ 중위로 소개된다. 하지만 바로 잡아야 한다. 1920년 일본 육군 장교 명부에 따르면,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 조선군 제19사단 제73연대 소속의 월강추격대장은 ‘야스카와 사부로(安川三郞)’였다. 남양수비대장 역시 아라요시 시게루가 아니라 ‘니이미 지로(新美二郞)’였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과 월강추격대의 편성
봉오동전투지라고 알려진 '봉오저수지' 사진. 실제 전투지는 10km 상류에 있다. (이미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920년 6월 4일, 만주의 독립군 약 30명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국경 순찰대를 공격하고 되돌아왔다. 일본군은 곧바로 진압 부대를 편성했다. 조선군 제19사단 예하의 니이미 지로 중위가 지휘하는 남양수비대였다. 6월 5일, 남양수비대는 독립군을 찾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남양수비대는 두만강변의 한인 마을이었던 삼둔자(三屯子)를 습격했다. 이때 독립군은 일본군을 매복 공격한 후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다.
일본군은 남양수비대만으로는 독립군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야스카와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말 그대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 섬멸하겠다는 의미였다. 6월 6일, 월강추격대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에 집결했다. 영화에서는 장엄한 음악과 함께 월강추격대가 두만강을 건넌다. 대낮에 기병대가 선두에 서고, 보병 수백 명이 줄지어 뒤따른다.
월강추격대장 야스카와 소좌가 봉오동 전투 이후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에 당시 부대 편제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따르면, 월강추격대에 편성된 군마(軍馬)는 5필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대부분 군수품 수송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봉오동 일대가 산악 지형이기 때문에 군마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다시 말해 월강추격대가 대규모 기병을 운용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외교 분쟁 피하려 심야에 비밀스러운 두만강 도하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와 달리 월강추격대의 두만강 도하(渡河, 강이나 내를 건넘)는 험난했다. 실제 월강추격대는 6월 6일 야음을 틈타, 비밀리에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과의 외교 분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과 국경이었던 두만강을 건너는 자체가 불법이었다. 월강추격대의 도하는 다음날 7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월강추격대가 도하한 장소는 두만강 상류가 아니라 중하류였다. 두만강과 가야하(嘎呀河)가 합류하는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 아래쪽이었다. 이곳 두만강의 강폭은 보통 100m 내외이고, 좁은 곳은 50~60m이지만 물살이 빠르다.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곳이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오후 11시 30분 도하 지점인 두만강과 가야하 합류점에 도착하여 도하 준비. 나룻배는 2척으로 한 척은 13명이, 다른 한 척은 7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강물은 물살이 빨라 도하하기는 곤란했다. 하지만 시마다(島田) 상등병 이하 배를 조종하는 군인과 뱃사공(조선인)의 분투로, 간신히 6월 7일 오전 2시 30분 전 부대가 도하했다.”
자신만만했지만 오판, 야포는 휴대 안 해
월강추격대는 어렵사리 두만강을 건너, 안산(安山) 일대의 독립군을 수색해 나갔다. 하지만 이곳은 독립군의 활동 영역이었다. 안산 일대에서 독립군과 교전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포로와 부상자를 후방으로 호송해야만 했다. 이 임무는 오쿠라(小倉) 중사 이하 11명과 야마모토(山本) 헌병 오장(伍長)이 담당했다. 이들은 서둘러 두만강변에 도착했지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다시 조금 더 하류로 내려가야 했다. 온성군 북방의 유원진(柔遠鎭) 맞은편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나룻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사카이 겐야(酒井源彌) 이병이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가, 겨우 나룻배를 구해왔다. 그제야 포로와 부상자를 호송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호기롭게 두만강을 건넜지만, 실제 ‘월강(越江)’ 자체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1920년 당시 일본 육군의 전투력은 아시아 최강을 자랑했다. 이들은 봉오동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과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다. 독립군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현지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무장 자체도 부실한 편이었다. 영화에서는 야포(野砲. 지상전에서 사용하는 화포) 공격이 묘사되지만, 실제 월강추격대는 야포를 휴대하지 않았다. 기관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군 움직임 파악한 독립군의 매복 공격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었던 홍범도 장군
월강추격대의 목표는 독립군의 섬멸이었다. 치고 빠지는 독립군을 추격하며 점점 북상했다. 월강추격대가 봉오동으로 북상해 오는 상황은 독립군에게 속속 전달되었다. 독립군은 봉오동 마을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병력은 상촌(上村)의 연병장에 집결시켰다. 봉오동 상촌을 중심으로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매복에 들어갔다.
독립군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월강추격대는 봉오동 골짜기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6월 7일 아침 8시 30분, 일본군은 봉오동 하촌(下村)부터 수색하며 양민들을 학살했다. 이들은 중촌(中村)을 거쳐 상촌 방향으로 북상했다. 6월 7일 정오 무렵, 야스카와가 이끄는 월강추격대가 상촌으로 진입했다. 상촌 주위의 고지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공격이었다.
봉오동 상촌에서 독립군과 월강추격대가 4시간에 걸쳐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결국 월강추격대는 큰 피해를 입고 봉오동 상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오후 4시 무렵, 폭우가 쏟아지고 시야가 제한됐다. 이를 틈 타 월강추격대는 남쪽 유원진 방향으로 서둘러 철수했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철저히 준비한 독립군의 승리였다.
일본 정규군 대상 첫 승리, ‘독립 전쟁 1회전’ 평가
야스카와 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
1920년 8월 9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일본 외무차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상해에 있는 소위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는 온성(穩城) 대안(對岸, 건너편에 위치한 언덕이라는 뜻)의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이 봉오동에서 아군 추격대를 만나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승으로 바꾸어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인쇄 발표하였다.” 일본은 1920년 6월 7일에 발생한 봉오동 전투에 관한 전과를 상해 임시정부가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월강추격대의 목표는 “불령선인단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필요가 있으며, 특히 전멸시키기 위해 병력을 대안(對岸)으로 출동시킨다”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투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국과 외교 마찰도 일으켰다. 봉오동 전투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 열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봉오동 전투의 결과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일본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이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한 사건이다. 이른바 ‘독립 전쟁 제1회전’으로 평가된다. 봉오동 전투는 단기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했고, 장기적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전력이나 규모 등에 대해 과장하고 독립군을 미화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 분위기를 읽는 것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우리나라 전쟁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사관 생도들에게 한국사와 군사사를 가르치고 있다. 펴낸 책으로 『나당전쟁 연구』, 『전략전술의 한국사』,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전쟁 이후의 한국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군인수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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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승리 맞지만, 일본군 규모 전력 등은 과장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영화 <봉오동 전투> 속 일본군 제대로 보기
이상훈
2021-04-20
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이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한 사건이다. 이른바 ‘독립 전쟁 제1회전’으로 평가된다. 봉오동 전투는 단기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했고, 장기적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전력이나 규모 등에 대해 과장하고 독립군을 미화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 분위기를 읽는 것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에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
영화 <봉오동 전투>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봉오동 전투>의 첫 장면. 푸르스름한 새벽, 일본군을 따라 조선인 형제가 두만강을 건넌다.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한 일본군은 “둘이 사이좋게 나눠 가져”라며, 음식이 든 자루를 던져준다. 동생이 들뜬 마음으로 자루를 열어보지만, 그 속에는 폭탄이 들어있었다. 동생은 형을 살리기 위해 울먹이며 자루를 끌어안았다. 대한독립군 황해철(유해진 분)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2019년 8월에 개봉했다. 유해진(황해철 역), 류준열(이장하 역), 조우진(마병구 역)이 독립군으로 출연했다. 기타무라 가즈키(야스카와 역), 이케우치 히로유키(쿠사나기 역), 박지환(아라요시 역)이 일본군으로 출연했다. 한국과 일본의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참여해, 개봉 전부터 흥행에 대한 기대가 높았으며 478만 명이 관람했다.
영화에서 일본군 월강추격대장(越江追擊隊長)은 ‘야스카와 지로’ 소좌로, 남양수비대장(南陽守備隊長)은 ‘아라요시 시게루’ 중위로 소개된다. 하지만 바로 잡아야 한다. 1920년 일본 육군 장교 명부에 따르면,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 조선군 제19사단 제73연대 소속의 월강추격대장은 ‘야스카와 사부로(安川三郞)’였다. 남양수비대장 역시 아라요시 시게루가 아니라 ‘니이미 지로(新美二郞)’였다.
독립군의 국내 진입과 월강추격대의 편성
봉오동전투지라고 알려진 '봉오저수지' 사진. 실제 전투지는 10km 상류에 있다. (이미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1920년 6월 4일, 만주의 독립군 약 30명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 국경 순찰대를 공격하고 되돌아왔다. 일본군은 곧바로 진압 부대를 편성했다. 조선군 제19사단 예하의 니이미 지로 중위가 지휘하는 남양수비대였다. 6월 5일, 남양수비대는 독립군을 찾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남양수비대는 두만강변의 한인 마을이었던 삼둔자(三屯子)를 습격했다. 이때 독립군은 일본군을 매복 공격한 후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다.
일본군은 남양수비대만으로는 독립군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야스카와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추격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말 그대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 섬멸하겠다는 의미였다. 6월 6일, 월강추격대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에 집결했다. 영화에서는 장엄한 음악과 함께 월강추격대가 두만강을 건넌다. 대낮에 기병대가 선두에 서고, 보병 수백 명이 줄지어 뒤따른다.
월강추격대장 야스카와 소좌가 봉오동 전투 이후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에 당시 부대 편제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따르면, 월강추격대에 편성된 군마(軍馬)는 5필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대부분 군수품 수송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봉오동 일대가 산악 지형이기 때문에 군마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다시 말해 월강추격대가 대규모 기병을 운용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외교 분쟁 피하려 심야에 비밀스러운 두만강 도하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와 달리 월강추격대의 두만강 도하(渡河, 강이나 내를 건넘)는 험난했다. 실제 월강추격대는 6월 6일 야음을 틈타, 비밀리에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과의 외교 분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과 국경이었던 두만강을 건너는 자체가 불법이었다. 월강추격대의 도하는 다음날 7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월강추격대가 도하한 장소는 두만강 상류가 아니라 중하류였다. 두만강과 가야하(嘎呀河)가 합류하는 중국 길림성 도문시(圖們市) 아래쪽이었다. 이곳 두만강의 강폭은 보통 100m 내외이고, 좁은 곳은 50~60m이지만 물살이 빠르다.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곳이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오후 11시 30분 도하 지점인 두만강과 가야하 합류점에 도착하여 도하 준비. 나룻배는 2척으로 한 척은 13명이, 다른 한 척은 7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강물은 물살이 빨라 도하하기는 곤란했다. 하지만 시마다(島田) 상등병 이하 배를 조종하는 군인과 뱃사공(조선인)의 분투로, 간신히 6월 7일 오전 2시 30분 전 부대가 도하했다.”
자신만만했지만 오판, 야포는 휴대 안 해
월강추격대는 어렵사리 두만강을 건너, 안산(安山) 일대의 독립군을 수색해 나갔다. 하지만 이곳은 독립군의 활동 영역이었다. 안산 일대에서 독립군과 교전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포로와 부상자를 후방으로 호송해야만 했다. 이 임무는 오쿠라(小倉) 중사 이하 11명과 야마모토(山本) 헌병 오장(伍長)이 담당했다. 이들은 서둘러 두만강변에 도착했지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다시 조금 더 하류로 내려가야 했다. 온성군 북방의 유원진(柔遠鎭) 맞은편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나룻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사카이 겐야(酒井源彌) 이병이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가, 겨우 나룻배를 구해왔다. 그제야 포로와 부상자를 호송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호기롭게 두만강을 건넜지만, 실제 ‘월강(越江)’ 자체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1920년 당시 일본 육군의 전투력은 아시아 최강을 자랑했다. 이들은 봉오동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과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다. 독립군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에, 현지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무장 자체도 부실한 편이었다. 영화에서는 야포(野砲. 지상전에서 사용하는 화포) 공격이 묘사되지만, 실제 월강추격대는 야포를 휴대하지 않았다. 기관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군 움직임 파악한 독립군의 매복 공격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었던 홍범도 장군
월강추격대의 목표는 독립군의 섬멸이었다. 치고 빠지는 독립군을 추격하며 점점 북상했다. 월강추격대가 봉오동으로 북상해 오는 상황은 독립군에게 속속 전달되었다. 독립군은 봉오동 마을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병력은 상촌(上村)의 연병장에 집결시켰다. 봉오동 상촌을 중심으로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매복에 들어갔다.
독립군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월강추격대는 봉오동 골짜기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다. 6월 7일 아침 8시 30분, 일본군은 봉오동 하촌(下村)부터 수색하며 양민들을 학살했다. 이들은 중촌(中村)을 거쳐 상촌 방향으로 북상했다. 6월 7일 정오 무렵, 야스카와가 이끄는 월강추격대가 상촌으로 진입했다. 상촌 주위의 고지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공격이었다.
봉오동 상촌에서 독립군과 월강추격대가 4시간에 걸쳐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결국 월강추격대는 큰 피해를 입고 봉오동 상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오후 4시 무렵, 폭우가 쏟아지고 시야가 제한됐다. 이를 틈 타 월강추격대는 남쪽 유원진 방향으로 서둘러 철수했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철저히 준비한 독립군의 승리였다.
일본 정규군 대상 첫 승리, ‘독립 전쟁 1회전’ 평가
야스카와 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부근전투상보」
1920년 8월 9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일본 외무차관에게 전보를 보냈다. “상해에 있는 소위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는 온성(穩城) 대안(對岸, 건너편에 위치한 언덕이라는 뜻)의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이 봉오동에서 아군 추격대를 만나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승으로 바꾸어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인쇄 발표하였다.” 일본은 1920년 6월 7일에 발생한 봉오동 전투에 관한 전과를 상해 임시정부가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월강추격대의 목표는 “불령선인단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필요가 있으며, 특히 전멸시키기 위해 병력을 대안(對岸)으로 출동시킨다”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투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국과 외교 마찰도 일으켰다. 봉오동 전투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 열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봉오동 전투의 결과가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일본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이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한 사건이다. 이른바 ‘독립 전쟁 제1회전’으로 평가된다. 봉오동 전투는 단기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승리를 견인했고, 장기적으로 항일 무장 투쟁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전력이나 규모 등에 대해 과장하고 독립군을 미화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 분위기를 읽는 것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역사적 승리 맞지만, 일본군 규모 전력 등은 과장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근현대 한국 사회 이해 및 고증 부족한 시대극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우리나라 전쟁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 사관 생도들에게 한국사와 군사사를 가르치고 있다. 펴낸 책으로 『나당전쟁 연구』, 『전략전술의 한국사』,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전쟁 이후의 한국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군인수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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