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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별에서 왜 이토록 서로 미워하며

-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 -

김상현

2021-04-19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는? 흔히 웹툰, 웹소설, 만화, 게임 같은 장르와 이들 장르가 사용하는  맨스, 추리, SF, 스릴러, 무협, 코미디같은 패턴 등을 아울러 ‘장르문화’라고 부른다. 이상한 것은 이들 ‘장르문화’가 점점 큰 인기를 얻고 산업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아직 예술작품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교과서, 언론 등에서도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점이다.  이에 이미 일상과 문화 곳곳에 깊숙이 파고든 다양한 장르문화 콘텐츠들과 그 속에 숨어있던 인문적 가치와 요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새롭게 발굴해 함께 나눠보려고 한다.

 


'다르다’라는 말과 ‘틀리다’라는 말의 의미가 다르다는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무 교육 과정에서 배운다. 다른 문화를 공정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문화 상대주의. 이미 다 배워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다른 걸 틀리다고 말하는 사람투성이다. 아니,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다른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더 나아가 혐오하는 문화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사변 소설,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하는



사변 소설(思辨小說)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Speculative fiction’이라는 비평 용어를 번역한 말인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소설을 전반적으로 아울러 일컫는다. 장르 소설은 상당수 사변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사변 소설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미국 SF 작가 하인라인(Robert Anson Heinlein, 1907~1988)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 출처: writerswrite.co.za)

사변 소설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미국 SF 작가 하인라인(Robert Anson Heinlein, 1907~1988)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 출처: writerswrite.co.za)



일반적으로 사변 소설이라고 하면 SF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용어는 아니지만 장르의 경계선에 걸쳐있는 작품들을 통틀어 묶을 때 편하게 쓸 수 있다. 각 사변 소설에 등장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과학적이라면 SF에 가까울 것이고, 비과학적이라면 판타지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그 외 장르에도 이 사변 소설의 개념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역사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가정해 본다면? 대체 역사 소설이 될 것이다.


인류가 아직 외계인을 만난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자. 실은 외계인은커녕 외계 생명체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변 소설의 세계에서 외계인을 상상할 수 있다. 인류가 아닌 다른 존재, 타자와의 만남.



양성(兩性) 외계 행성인과의 우정은 가능한가



어슐러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 1929~2018)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어슐러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 1929~2018)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종류의 만남을 다루는 사변 소설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어슐러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의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 1969)』일 것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 1969)』 어슐러 K.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이미지 출처: 시공사)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 1969)』 표지 (이미지 출처: 시공사)



인류가 다른 행성까지 진출해서 살게 된 먼 미래. 주인공 겐리 아이는 인류 연합의 사절로 라디오와 목탄차 정도 수준의 과학 문명을 가지고 있는 행성 게센으로 간다. 겐리 아이의 목표는 아직 외계 문명과 접촉한 경험이 없는 게센인을 인류 연합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 겐리 아이는 이 과정에서 게센 행성의 카르하이드 왕국에서 ‘왕의 귀’ 역할을 하는 에스트라벤이라는 게센인과 함께 우정을 나누며 목숨을 건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사변적(Speculative)인 부분 중 핵심은, 게센 행성의 사람들이 양성(兩性)이라는 점이다. 게센인들은 성별이 없는 시기와 성별이 있는 시기가 있는데, 성별이 있는 시기에는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게센인은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로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남성인 겐리 아이는 에스트라벤을 남자라고 불러야 할지 여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고, 게센인 입장에서 보면 겐리 아이는 일 년 365일 내내 발정기인 일종의 성도착자인 것이다.


두 사람은 소설적 장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작중에서 에스트라벤은 ‘토메르의 노래’를 부르는 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빛은 어둠의 왼손 /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 / 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 / 마주 잡은 두 손처럼 / 목적과 과정처럼



예측이 아닌 상상, 장르적으로 풀어내기



태극 문양

음양마크 (이미지 출처 : 더위키)



겐리 아이는 고대 문명에서 발견한 태극 문양을 보여주며 에스트라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음과 양을 가리키지요. 빛은 어둠의 왼손… 그러니까 빛과 어둠, 두려움과 용기, 추위와 따뜻함, 여성과 남성. 그것이 바로 당신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둠의 왼손』을 두고 페미니즘적 사변 소설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 작품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겐리 아이의 말만 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존재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그런 존재와 교류하고 우정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음과 양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남녀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건 다들 알고 있으리라.


『어둠의 왼손』 서문에서 어슐러 르 귄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1년쯤 뒤에 우리가 자웅 동체가 되리라고 예언을 한다거나 우리가 저주를 받아 자웅 동체가 되고 말 거라고 선언하는 건 아니다. 단지 SF 고유의 독특하고 우회적이며 사고 실험적인 방법으로… 관측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허구는 은유다. (이 역시 어슐러 르 귄이 서문에서 한 말이다.) 어슐러 르 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남녀 구분이 없는 외계인을 상상한 다음, 그 상상을 장르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독자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두 개의 다름이 어떻게 만나고 갈등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장르물은 인간 아닌 존재를 어떻게 다뤘나



장르물에서 인간 외의 존재를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꽤 흥미 있는 일이다. 특히나 성공한 작품이라면 그 사회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종의 조감도 역할을 할 수 있다.



만화 <진격의 거인> 시리즈, 인류와 거인 사이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이미지 출처: bagogames.com)

만화 <진격의 거인> 시리즈, 인류와 거인 사이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이미지 출처: bagogames.com)



만화 <진격의 거인>을 보자. 정체불명의 거인들이 사람을 잡아먹고, 살아남은 인류는 성벽을 쌓은 후 그 안에서 거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 작품은 섬이라는 닫힌 세계에서 거대하게 성장하는 거인인 중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이 녹아있다고 생각해 보면 꽤 재미있게 해석할 수 있다. 일단은 작가와 작품의 극우 논란이나 표절 논란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 그저 설정만 놓고 봤을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영화 우주전쟁 포스터 톰크루즈 스티븐스필버그 지구최후의 전쟁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영화 역사를 흥분시킬 스펙터클 초거대작!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 2005)>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이런 시각에서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 전쟁>도 비슷하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우주 전쟁>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소통이 가능한 대상이 아닌, 그저 인류를 위협하는 자연재해 수준의 공포로 묘사된다. 이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제3세계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살아남을 자, 누구인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 시즌2 포스터 출처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2019)>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크게 성공한 김은희 작가의 <킹덤>도 이렇게 분석해 볼 수 있다.


<킹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물이다. 작가는 <킹덤>이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에서는 정확한 연대가 등장하지 않지만 경신 대기근(庚戌辛亥大飢饉, 1670~1671)을 배경으로 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가진다. 굶주린 아귀처럼 같은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하는 역병이 돈다는 설정은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을 스스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일 수 있다. 어쩌면 스스로 우리나라를 ‘헬조선’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로 부르는 이유와 닿아있을지도 모른다.



모두 아는 문화 상대주의, 하지만 다른 걸 틀리다고



‘다르다’라는 말과 ‘틀리다’라는 말의 의미가 다르다는 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무 교육 과정에서 배운다. 다른 문화를 공정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문화 상대주의. 이미 다 배워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다른 걸 틀리다고 말하는 사람투성이다. 아니,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다른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더 나아가 혐오하는 문화가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신비, 환상, 모험... 새롭게 시작되는 감동! E.T. THE EXTRA TERRESTRIAL 탄생 20주년 기념작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E.T>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이 한창이던 1982년, <우주 전쟁>을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E.T>의 경우는 우주 전쟁과 정반대로 지구를 탐사하기 위해 찾아온 외계인과 지구에서 살고 있는 한 소년 사이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당시 공포 영화나 SF 영화에서 외계인들은 주로 공산당, 간첩에 대한 은유로 묘사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지점이다.

 

 

더 씽(The thing,1982)>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존 카펜터 감독이 만든 리메이크 영화 <더 씽(The thing,1982)>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



이를테면 존 카펜터 감독의 리메이크작 <더 씽(The thing, 1982)>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영화 속 남극 기지에서 대원들은 누가 외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서로를 끝없이 의심하며 서로를 감시한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먼지 티끌 같은’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코스모스』를 쓴 저명한 과학자이자 SF 소설도 발표한 적 있는 칼 세이건은 1990년,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는 보이저 1호의 사진 촬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칼 세이건은 인류 역사상 지구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보이저 1호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리자고 제안한다. 먼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그야말로 작은 먼지 한 톨에 불과했다.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이미지 출처: solarsystem.nasa.gov)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이미지 출처: solarsystem.nasa.gov)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 보이저 1호와 지구 사이의 거리는 61억 Km였다.


칼 세이건은 자신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여기 태양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외계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만나게 된다면 이 모든 상상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는 이 작은 별에서 우리가 도대체 왜 이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대책 없는 희망이겠지만, 나는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 이 작은 별에서 왜 이토록 서로 미워하며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 역사와 문학에 모두 흥미로운 재료, ‘침몰 보물선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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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김상현

소설가
1973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판타지 소설 『탐그루』로 데뷔. 이후 SF 『하이어드』, 팩션 『정약용 살인사건』, 역사 소설 『대무신왕기』, 스릴러 『킬러에게 키스를』, 『고스트 에이전트』 등을 썼다. 2012년부터 5년 동안 모교에서 장르문학 강의도 했다. 현재는 웹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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