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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역사가 교훈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역사 ‘인과론’ (1)

윤진석

2021-04-15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교실은? 역사수업은 재미있다. 그러나 역사학 공부는 힘들다. 역사수업에서는 기록과 해석을 배우고 즐기지만, 역사학공부는 그것의 가부를 재검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공유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스스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사공부가 필요하다. 역사학 공부의 첫걸음을 내딛어 보자.

 


은 쉬워 보이지만, ‘원인’을 제대로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역사 서술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동등한 자격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역사는 결과만 분명하고 원인은 결과를 바탕으로 역사가들이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나중이지만 역사가의 사고에서는 결과가 먼저이고 원인이 나중이다…….



역사는 태어날 때부터 실용의 학문



흔히 역사학을 비(非)실용적 학문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역사학은 태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실용의 학문이다. ‘실용’이란 말이 인간의 ‘욕망’과 관련 있다고 여기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은 이 말 대신 ‘자기 성찰’이라든가 ‘미래를 여는 거울’이라는 식으로 표현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말들도 ‘실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 2회 칼럼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의 정의와 역사의 효용성>에서 역사를 배우는 목적으로 ① 박물학적 취미 ② 삶에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③ 과거 사실을 통해 현재 사실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 세 가지를 소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① 박물학적 취미는 역사 공부에 입문하는 계기일 수도 있고, 입문 후에도 공부를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역사 공부 본연의 목적은 아니다. 자신의 조국 해방을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프랑스의 한 위대한 역사학자는 “역사 연구를 기껏 무료한 상태를 벗어나는 데 이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심지어 범죄 같은 힘의 낭비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라면서 “박식(博識) (또한) 심심풀이나 편집증으로 보이기 십상”1)이라 하였다. 언뜻 들으면 도덕적 가치를 논한 말 같지만 핵심 논지는 취미나 박식 목적의 역사 연구는 비실용적이라는 것이다.

1) 프랑스 아날학파의 공동 창립자인 마르크 블로크(Marc Léopold Benjamin Bloch)가 『역사를 위한 변명』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마르크 블로크는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정치 외교사보다는 사회사 중시를 표방하는 『사회경제사연보(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를 창간하여 20세기 새로운 역사학의 조류 형성에 기여하였다. 나치(Nazi) 점령 상태에 놓인 자신의 조국 프랑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53세에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자원 입대하였고, 이후로도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총살당한 애국자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 마르크 블로그, 고봉만 옮김 출처 알라딘

프랑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와 그가 쓴 『역사를 위한 변명』(이미지 출처 : 알라딘)



그에 반해 ②와 ③은 미지의 미래를 알고 싶은 욕망, 즉 ‘자기 성찰’이라든가 ‘미래를 여는 거울’을 다른 말로 바꾼 표현인 바, 바로 이런 면에서 역사를 실용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② “역사를 통해 (미래의) 삶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삶과 각 사회가 세부적으로는 제각각이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보편성이 있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고, ③ “과거 사실을 통해 현재 사실의 기원을 안다.”라는 명제는 역사적 사실들이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이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갖추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삶에 필요한 교훈을 얻으려면 기원을 알아야 하고, 기원을 알고 싶은 이유 역시 삶에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 본연의 목적은 원인 탐구



“역사가 교훈이 된다.”라든가 “역사를 교훈으로 삼는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말이지만,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경전 구절처럼 여기고 역사 공부의 주된 이유로 삼아온 말이었다. 서양 고대인들은 같거나 비슷한 일들이 반복적이고 순환적으로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역사관(순환 사관)과 인과응보 사상을 가졌으므로, 선조(先祖)들의 행적을 보고 결과가 좋은 것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기원, 즉 원인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은 달리 행하여 그 인과관계의 고리를 끊으면 나쁜 전철(前轍)을 밟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 중세인들과 근대인들은 순환 사관을 따르지 않고, 역사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다는 직선 사관과 진보 사관을 가졌지만, 대신 역사의 보편성과 합법칙성을 믿으며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이가 많았으므로, 역시 역사를 자기 삶의 귀감(龜鑑, 거울삼아 본받을 만한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2)

2) 다만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는 “역사에서 ‘교훈’ 기능을 찾는 것은 무리”라고 하면서 “단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 보여줄 따름이다.”라고 주장했는데, 랑케의 이러한 역사관은 후학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갑골문자

갑골문자



동양에서는 역사가(歷史家)의 기원인 중국 고대의 ‘사(史)’가 원래는 천문(天文), 점복(占卜), 문서 등에 관한 일을 하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갑골문(甲骨文, 중국의 고대 문자로 거북이의 배딱지[龜甲]와 짐승의 견갑골[獸骨]에 새긴 상형문자이며 한자의 원형이 됨)을 살펴보면, 전쟁 같은 사건의 발생과 경과, 길흉에 대한 점복 결과, 점복에 따른 이행의 결과, 즉 점의 적중 여부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갑골문은 역사 기록이며, 후대(後代) 사람들은 점을 치지 않고도 전대(前代)의 갑골문, 즉 거북 배딱지에 적힌 사건의 결과를 보고서 전대의 행적을 따르거나 전대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바로 이런 데서 ‘귀감(龜鑑, 본뜻은 귀갑, 즉 거북 배딱지를 거울로 삼는다는 의미이다)’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그래서 역사학에서는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역사 연구 본연의 목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5)부터 근대의 역사가들을 거쳐 20세기의 E. H. 카(1892~1982)에 이르기까지 역사에서의 인과(因果) 문제 탐구에 몰두했다. 헤로도토스는 『Historia(역사)』의 저술 목적이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어 헬라스(그리스)인들과 비(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기” 위함이라 천명했다. 즉 역사학의 시작이 기록 보존과 원인 탐구 목적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현실에선 원인이, 역사 서술에선 결과가 먼저



그런데 말은 쉬워 보이지만, ‘원인’을 제대로 아는 것은 쉽지 않다. 역사 서술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동등한 자격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역사는 결과만 분명하고 원인은 결과를 바탕으로 역사가들이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나중이지만 역사가의 사고에서는 결과가 먼저이고 원인이 나중이다. 역사가의 손을 거쳐 완성된 역사 서술 결과에서는 현실 세계처럼 결과보다 원인이 앞서지만, 역사가가 역사 서술을 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결과를 먼저 꼽아놓고 원인을 찾는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 출처 연합뉴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가령 우리나라 축구사에서 히딩크 감독을 초빙하여 계약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만약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이 초라한 성적을 냈다면 그 선택은 거의 조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월드컵 4강의 원동력 찾는 과정에서 그 선택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원인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난 7회 칼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빛과 그림자>에서 언급한, 역사에 ‘만약’을 적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가부 논란이 생긴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라고 하는 입장은 “지나간 결과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으며, ‘만약’을 가정하는 역사 서술은 역사의 인과관계를 염두에 두고 “결과는 과거의 선택에 따라 가변적이다.”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로또 당첨의 원인이 ‘혜안’이 될 수 있나



결과를 두고 그 원인, 즉 기원을 알고 싶은 욕망을 가지거나 ‘만약’을 상정하는 것은 역사가들만 가진 특수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의 보편적인 습성이다. 자연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항상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가설을 세운다. 평범한 사람들 역시 자신을 성찰하고 원하는 미래상을 가꾸기 위해 현재 처지의 기원을 찾는데, 때로는 자신을 홍보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내거나 망상하기도 한다. 성공한 이는 자신의 성공이 피나는 노력의 결과임을 피력하기 위해 그럴싸한 원인을 찾고,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실패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나 외부의 영향 때문이라고 변명하기 위해 다른 핑계 즉 원인을 둘러댄다. 가령 로또에 당첨된 사람은 자신의 혜안이 당첨의 원동력이라 피력하는 경우가 있고, 비행 청소년의 부모는 자식의 교우관계가 비행의 원인이라 핑계를 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개 전자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 즉 어떤 복권 당첨자의 소감을 빌자면 ‘얻어걸린 것’이고 후자는 자신의 가정 교육이 잘못인 경우가 많다.



즉석식복권스피또 당첨자소감한마디 재능은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얻어걸린 자를 이길 수 없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복권, 소액으로 건전하게 즐기실 때 나에게는 희망이 되고, 우리에겐 행복이 됩니다. 출처 동행복권 홈페이지

복권 당첨자 소감(이미지 출처 : 동행복권 홈페이지)



이처럼 결과를 두고 원인을 찾는 것은 누구나 일상에서 접하는 인간 본성이지만, 깊이 논의하기 시작하면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역사학에서도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역사 인과성’ 문제를 오래도록 논의했고 현재도 논박 중인데, 다음 회 칼럼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8. 역사가 교훈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7.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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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석
윤진석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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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사진 이미지

정**

2021-04-15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최** 사진 이미지

최**

2021-04-16

주제가 너무 좋은것 같아요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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