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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운명에 맞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운명의 피바람’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거미집의 성> -

석기용

2021-03-17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영화와 드라마(웹툰, 만화 등 포함)는 내 일도 아닌데 마치 내 일처럼 함께 웃고 울고 한숨쉬고 기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을 가진 대중문화콘텐츠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대리만족을 통해 잠시 재밌고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도록 하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일까.  평소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영화(드라마) 속에 숨겨져 있어 미처 눈치채기 힘들었던 세상과 인생에 관한 질문, 이들을 낳은 시대적 상황,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해당 작품을 흥미롭게 살펴본 철학자들을 통해 알아보자.



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받을 때 완전히 겁에 질린 와시쓰의 표정은 압권이다. 여기에는 실은 재미난 일화가 숨어 있다. 촬영 전 약속과 달리 구로사와 감독이 소품이 아닌 진짜 화살을 날리는 바람에 배우는 정말로 공포감을 느꼈고 그 감정이 자연스레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감독과 배우가 불화를 겪기도 했다는데, 어쨌든, 그때 그 표정은 그냥 연기가 아니었다.



3년 후 자신이 죽을 운명이 적힌 책



리처드테일러 형이상학 metaphysics 출처 알라딘

리처드테일러 <형이상학>(이미지 출처 : 알라딘)



예전에 미국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가 쓴 어떤 철학 개론서에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운명’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가 꾸며낸 가상의 인물 오스모(Osmo)의 짧고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오스모는 어느 날 시내에서 아내와 만나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한다. 조금 이르게 시내에 도착한 오스모는 시간도 때울 겸 자주 가던 근처 도서관을 찾는다. 이리저리 서가를 돌아다니던 중 이상하게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복도를 발견한다. 그 길을 따라가니 두께만 다를 뿐 모양이 똑같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서가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는 책 제목은 알고 보니 전부 사람의 이름이고,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 펼쳐보니 책 제목의 당사자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게 될 모든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그럼 혹시 내 이름의 책도 있을까?’ 오스모는 알파벳 순서를 따라가다가 드디어 ‘Osmo’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발견한다. 그런데 왠지 책이 좀 얇다. 책장을 넘기니 그동안 자기가 겪어온 모든 인생사가, 지금은 다 잊어버린 사소한 일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옛일의 추억을 떠올리며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오늘 지금 바로 이 시간에 관한 항목에까지 이른다. 도서관에서 책에 푹 빠져 약속 시간을 깜빡하는 바람에 아내와 다툰다는 내용이다. 정신이 번쩍 든 오스모는 서둘러 책을 다시 꽂아놓고 아내를 만나러 가지만 기다리다 화가 나서 집에 그냥 돌아간 아내와 저녁에 말다툼을 하게 된다. 아까 읽다 만 책의 남은 분량이 얼마 안 되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며칠 후 다시 도서관을 찾아간 오스모는 나머지 부분을 계속 읽어 나간다. 책에는 그로부터 3년 후까지의 이야기만 실려 있다. 3년 후 어느 날 오스모가 포트웨인행 비행기에 탔다가 착륙 도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그의 일생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스모는 다짐한다. ‘절대로 포트웨인에 가는 비행기는 타지 말아야지. 그러면 될 거야.’ 3년 후 오스모는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세인트폴행 비행기에 오른다. 한참 타던 중 기장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도착 공항 사정으로 인근 포트웨인 공항에 착륙하겠단다. 그렇게 포트웨인 공항에 착륙하던 비행기는 사고를 일으켜 불길에 휩싸이고 많은 사상자가 생긴다. 불운하게도 우리의 주인공 오스모 역시 사망자 명단에 오른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기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어떤 사내가 벌떡 일어나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단다. 그는 급기야 조종실로 난입해 항로 변경을 요구하며 기장과 몸싸움을 벌였고, 사고 원인을 조사한 당국은 몸싸움 과정에서 생긴 조종실 기기 파손이 사고 발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발표하였다.



운명의 두 측면, 불편함과 안도감



운명

운명



우리에게 친숙한 이 ‘운명’이라는, 어떨 때는 ‘숙명’이라고도 불리는 생각의 장치는 우리 마음속에서 특이한 양면 효과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오스모의 비극이 보여주듯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척 애를 써봤음에도 나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이 장치가 묘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에 괴로워하며 신세 한탄에 빠졌을 때 은밀히 이 장치를 가동한다. 마음의 표층에서 우리를 그리도 괴롭히던 “도대체 어째서 일이 그렇게밖엔 안 된 걸까! 난 왜 이 정도밖에 안 될까!”라는 자책과 원망을 “그건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 그건 운명이야, 내가 겪어야 할 숙명이었던 거야!”로 은근슬쩍 바꾸어 놓는 것이다. 우리는 운명의 장난에 치를 떨며 자기 앞에 주어진 이 잔인한 숙명을 성토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리고 그 덕분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실패의 책임 문제는 슬그머니 한쪽으로 치워버린다.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거야. 그러니 내 잘못도 없어!”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람들이 ‘운명’이라는 생각에 은연중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내심 이런 수지타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운명이라면 굳이 아등바등할 이유가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라면, 내가 무엇을 어찌하든 될 일은 될 것이고 안 되더라도 내 책임은 아니다. 내 선택이, 그리고 그에 따른 내 노력이 미래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어야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게 있다. 모든 게 다 그저 그리될 운명이라면 우리가 아등바등 뭔가를 이루고자 애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그 결과를 놓고 ‘이건 잘했군’, ‘저건 못했네’ 따질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그리스를 침공하기 위해 애써 해협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가 폭풍우에 단번에 쓸려 내려가자, 무심한 자연법칙에 따라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출렁이고 있었을 뿐인 바다를 채찍질해 그 죄를 물었다는 페르시아 황제의 처사만큼이나 실없어 보일지 모른다. 우리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에 든 오이디푸스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건 모두 그에게 주어진 지독한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운명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그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운명을 가엾어하지, 그의 패륜을 욕하지 않는다. 자,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냥 이렇게 모든 일을 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쓸데없이 자책하거나 다른 이를 원망할 것도 없이 그저 그 운명에 우리의 삶을 맡겨버리면 되는 걸까.



운명을 조종하는 것은 숨겨진 욕망



프로이트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프로이트(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오이디푸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오이디푸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프로이트(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1856~1939)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대해서 예전부터 내려오던 흔한 풀이와는 아주 많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삶을 지배한 것은 실은 그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원초적인 성적 욕망의 산물이란다. 결국은 저 깊숙이 은폐되어 있던 욕망이 그의 운명을 좌우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런 욕망을 갖게 된 것도 물론 그의 책임은 아니다. 그 욕망은 생존과 번식의 본능을 가진 생명체에게 자동으로 장착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프로이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빼앗은 철천지원수를 처치할 절호의 기회를 잡고도 주저하다 일을 그르친 햄릿의 마음속에도 똑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내가 내 운명을 어찌할 수 없듯 내 욕망도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일까? 이제 면죄부는 운명이 아니라 숨어서 그 운명을 조종한 우리의 욕망이 발행하게 되는 걸까? 그저 정해진 운명의 장난 때문인지, 끝없이 품어져 나오는 욕망의 분출 때문인지, 운명과 욕망이 서로 뒤엉키고 어우러져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우리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해볼 것을 자극한다.



“영주가 되리라” 혼령의 예고 후 벌어진 참극




거미집의 성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거미집의 성>(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거미집의 성>은 지금은 작고한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셰익스피어가 쓴 원작 <맥베스>의 중세 스코틀랜드 배경을 일본 전국 시대로 옮겨와 각색하고 연출한 1957년도 흑백 영화로, 20세기 영상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그 탁월한 연출력을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원작에 충실하다.


스즈끼 영주 휘하의 탁월한 두 장수 와시쓰(원작의 맥베스 장군이다)와 미키가 반란군을 진압하는 큰 공로를 세운 후 본성인 거미집의 성으로 귀환하던 중 인근에 있는 천혜의 험지 거미집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혼령을 마주친다. 혼령은 와시쓰가 북성의 성주가 되고 곧이어 최고 영주가 되어 본성을 차지하게 되리라 그의 운명을 예언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혼령은 절친 미키의 아들이 훗날 와시쓰의 영주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 덧붙인다. 그 이후로 영화에서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와시쓰와 그의 아내 아사지의 끓어오르는 욕망이 혼령의 예언을 하나씩 실현해가는(‘자신의 운명이 하나씩 실현되어가는’이라고 해야 할까) 과정이 참혹하게 펼쳐진다. 먼저 와시쓰는 아내와 공모하여 자신을 믿고 찾아온 주군을 무참히 살해하는 하극상을 연출하고, 그 죄를 다른 이들에게 뒤집어씌워 더불어 살해한 후 마침내 본성의 영주가 된다. 그다음에는 후사를 남에게 넘겨줄 수 없어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동료 장수 미키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낸다. 그렇게 미키는 처치했으나 정작 그의 아들은 자객의 칼을 피해 간신히 탈출한다. 하지만 끝없이 밖으로 부풀어 오르는 이들 부부의 욕망은 거꾸로 그들 내면의 죄책감도 몹시 자극한다. 와시쓰는 죽은 친구의 혼령이 연회장에 나타나고 주군을 죽일 때 사용한 장도가 날아다니는 환영에 시달린다. 정신이 나간 아내 아사지는 영주 살해에 가담하여 피를 묻힌 자신의 손을 시도 때도 없이 씻어내려 하고 결국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은 총체적 파국이다. 죽은 스즈끼 영주의 아들을 중심으로 와시쓰를 단죄하기 위해 연합한 대항군이 진군해 오면서 위기에 처한 와시쓰는 다시 혼령을 찾아간다. 그는 ‘거미집의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패배는 없다’라는 혼령의 마지막 예언을 듣고 자신의 운명에 안도한다. ‘아무렴 그 큰 숲이 움직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와시쓰의 운명은 완전한 파멸로 막을 내린다. 숲이 움직인 것이다.



거미집의 성 영화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거미집의 성>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와시쓰의 최후는 매우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특히 마지막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받을 때 완전히 겁에 질린 와시쓰의 표정은 압권이다. 여기에는 실은 재미난 일화가 숨어 있다. 촬영 전 약속과 달리 구로사와 감독이 소품이 아닌 진짜 화살을 날리는 바람에 배우는 정말로 공포감을 느꼈고 그 감정이 자연스레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감독과 배우가 불화를 겪기도 했다는데, 어쨌든, 그때 그 표정은 그냥 연기가 아니었다. 



끝없는 비극의 원인은 욕망인가, 아니면 그저 운명일 뿐인가



거미집의 성 영화 스틸컷 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거미집의 성>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장면은 따로 있다. 앞서 스즈끼 영주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부하 장수가 실패의 대가를 치르며 자결했던 방에서 와시쓰가 아내와 음모를 꾸미는 장면이다. 흑백 영상임에도 구로사와의 연출은 벽면에 온통 시뻘건 피로 칠갑을 한 끔찍한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부와 권력을 향한 인간이 욕망이 참혹한 피를 부르며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던 바로 이 방에서 또 다른 인간의 욕망이 다시 꿈틀대며 새로운 음모를 꾸며내고 또 한 번의 파멸과 비극을 예고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엾은 인간사인가.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혼령이 예언한 그대로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과 최후의 파국은 다 누구도 탓할 길 없이 그저 와시쓰의 운명일 뿐이었나, 아니면 와시쓰의 운명을 예언한 혼령이란 다름 아닌 바로 그의 탐욕스러운 욕망의 현현일 뿐이었나. 실은 혼령의 예언 따위는 결국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렇더라도 의문은 계속 남는다. 설령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욕망 탓이라고 해도, 과연 우리가 우리 욕망을 다스리는 주인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출처를 알 길 없이 절대 마르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샘솟아나 그 자신도 어쩔 길이 없는 욕망의 노예일 뿐일까? 그래서 우리 인간은 결국 어쩔 길이 없는 운명적인 결말을 향해서 거부할 수 없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는 걸까?



니체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니체(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셰익스피어의 원작도 그렇지만 구로사와의 이 영화에서도 한 가지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남는다. 자객을 피해 달아난 미키의 아들이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언대로 언젠가 그 아들이 나타나 다시 한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운명의 피바람이 불게 되는 걸까? 아니면 그는 말 같지도 않은 예언 따윈 잊어버리고 덧없이 부귀영화를 쫓는 헛된 욕망을 다스리며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가게 될까? 그런데 진정 자유로운 의지를 발휘해 가혹한 운명을 이겨내고 부당한 욕망을 잠재울 힘이 우리 인간에게 정말로 있기나 한 걸까? 어쩌면 자신의 운명과 싸워 이기려 하지도 말고, 운명에 빌붙어 도피하지도,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지도 말며, 그냥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벌어지는 그대로 긍정하라는 독일 철학자의 니체의 말대로 사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삶의 진짜 주인이 되는 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모르파티!”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인간은 운명에 맞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순수하고 거짓 없는...공자의 ‘사무사’(思無邪)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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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용
석기용

성신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언어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우교수를 거쳐 지금은 성신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간 다수의 전문 철학서와 교양 인문서를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 《비트겐슈타인과 정신분석》,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과학의 미래》,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철학으로 읽는 괴테 니체 바그너》, 《삶의 품격에 대하여》, 《사이보그 시티즌》, 《그리고 나는 스토아주의자가 되었다》, 《난파된 정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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