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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없는 것도 있는 것만큼 있다.”

-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 세상의 생성 소멸을 설명해주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김헌

2021-03-15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세상엔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철학은 시작됩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직접 찾아가 보고,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도 합니다. 치열한 노력 끝에 앎에 이르러 느끼는 희열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요. 이 모든 과정을 다듬어 낸 그리스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철학의 뿌리를 찾고자 합니다.

 


렇듯, 데모크리토스의 빈 공간은 원자에게 움직이고 변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사고는 단순한 자연 현상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할 일로 가득한 우리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여유 없이 빠듯한 우리의 마음에도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숨 쉴 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두부를 끝까지 자르면 남는 것은



두부

두부



접시 위에 두부 한 모를 올려놓습니다. 칼로 반을 자릅니다. 반쪽을 다시 반으로 자르고, 그 반쪽을 다시 자르고, 또 그렇게 잘라나가면, 어디까지 자를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마지막 조각에 이르겠지요? 설마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자르는 순간,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두부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온 것이 될 텐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마지막 조각은 두부일까요? 아니면 두부가 아닌 전혀 다른 것일까요?


지금까지 이곳에서 연재했던 글들을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 몇몇 철학자들의 답이 떠오를 겁니다. 탈레스는 그 마지막 조각을 물이라고 하겠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할 테고, 엠페도클레스라면 불, 물, 공기, 흙이라고 말할 것이며, 아낙사고라스는 우주를 모두 품은 작은 씨앗이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물이나 불이 어떻게 두부가 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은 씨앗이 있어, 그 속의 두부 성분이 떨어져 나와 하나의 두부가 되고, 그렇게 두부를 만드는 지성(nous)이 따로 있다는 설명은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근본 요소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



철학자 데모크리토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이런 논의에서 새롭고도 아주 현대적인 답변을 낸 사람이 있습니다. 에게해 북쪽 압데라 출신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80년)입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계속 쪼개나가면, 마지막에는 결코 쪼개지지 않는 원초적인 질료에 이른다고 했지요. 그것을 ‘아톰(atom)’이라고 불렀습니다. ‘톰’은 ‘자른다’라는 뜻인데, 거기에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인 ‘아’가 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톰’은 ‘더 이상 잘리지 않는 놈’이라는 뜻이 되지요. 그것을 우리는 ‘원자(元子)’라고 새기며, 데모크리토스를 ‘원자론자’라고 부릅니다. 원자는 색도, 맛도, 냄새도 없고, 모양과 크기, 위치 이외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이론적으로는 먼지같이 작은 원자가 있는가 하면, 아예 눈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것에서부터 수박만한 원자도 있습니다.


그 원자들이 결합하고 분리되면서 모든 사물을 만들어냅니다. 크기와 모양, 위치 이외에 어떤 특징도 없는 원자들이 결합해서 어떻게 두부나 콩나물이 되며, 그것들을 먹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요? 여전히 설명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 불, 공기, 흙 같은 특정한 물질이나 만물을 품은 씨앗보다는 원자가 세상의 근본 요소라는 설명이 좀 더 세련돼 보입니다.


특히 운동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데모크리토스는 아낙사고라스의 지성, 즉 물질 이외의 정신적인 존재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는 오직 물질적인 요소와 원리로만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지요. 영혼, 정신, 이성이니 하는 것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물질적인 원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태도는 현대적인 관점에 가깝지요. 많은 과학자가 인간의 정신 활동을 뇌의 생리학적인 활동으로 설명하며, 신체와 분리된 영혼이나 정신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처음으로 텅 빈 공간의 있음을 인정한 철학자 데모크리토스



파르메니데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파르메니데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리고 데모크리토스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의 존재를 인정했는데, 그것은 이전의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그리스의 철학자, 기원전 510~450년)가 말했듯,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니,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결국 모든 운동과 생성 소멸, 변화까지 부정했고, 존재는 오로지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자, 나와 두부 사이에 공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로 가득 차 있겠지요? 그렇다면 나와 두부 사이에는 공기가 빈틈없이 꽉 찬 것이고, 셋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니까, 존재라는 이름으로 한 덩어리를 이루게 됩니다. 셋 사이를 구분하는 선이 있을까요? 경계선이 없다면 셋은 한 덩어리가 되고, 경계선이 있다면 나와 선과 공기와 선과 두부가 모두 ‘존재’라는 이름으로 꽉 이어져 있는 셈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물이 존재하고, 움직이며,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감각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 모든 존재는 꼼짝없이 통째로 연결된 한 덩어리인 것이지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는 탈레스의 말도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해석해보면, 두부도 물이고 나도 물이며, 두부와 나 사이를 채우고 있는 공기도 물이니 세상은 온통 물로 가득 찬 수족관과 같은 꼴입니다. 불로 이루어졌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라면, 온 세상은 빼곡하게 불로 가득 찬 불바다겠지요. 4원소론을 주장한 엠페도클레스나 씨앗을 말한 아낙사고라스를 따르더라도,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해석해보면, 세상은 존재로 꽉 채워져 숨 막힐 것만 같은 모양새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운동을 설명해도 꽉 찬 존재의 세계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사실 엄밀히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그 허우적거림조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세상 만물이여, 꼼짝 마!’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는 지엄하기 짝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반박하기 어려운데, 사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은 그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투성이입니다. 많은 것들이 따로따로 있고, 움직이고 변해가니까요. 우리는 존재의 다수성과 운동, 변화, 생성 소멸을 매 순간 느끼고 있는데, 그놈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것을 모두 부정해야만 하니, 참으로 갑갑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명백한 현상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요?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가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운동과 다수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노력도 숨통이 막히기는 마찬가지지요. 현상과 논리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숨 쉴 틈을 주는, 행복에 더 가까운 생각



여유

여유



데모크리토스는 텅 빈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현상을 구제할 해법을 찾습니다. ‘그래, 있는 것은 있다. 그러나 없는 것도 있는 것만큼이나 있다.’라고 말하면서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언제나 있기만 한 원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있는 것은 있다’라는 명제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도 있다고 말하면서 ‘없는 것은 없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원자는 햇빛 찬란한 봄날 허공을 떠도는 먼지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텅 빈 공간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세상의 다수성과 운동, 생성 소멸이 비로소 설명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데모크리토스의 빈 공간은 원자에게 움직이고 변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사고는 단순한 자연 현상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할 일로 가득한 우리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여유 없이 빠듯한 우리의 마음에도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숨 쉴 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내 삶의 중요한 거점이 될 만한 것은 원자처럼 단단하게 지켜 나가야겠지만, 우리의 일정 속에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텅 빈 공간을 충분히 갖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일상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뜻깊게 만들어 빼곡하게 채워놓는 삶보다는, 쉬어갈 수 있는 텅 빈 공간이 있는 삶이 행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7. “없는 것도 있는 것만큼 있다.”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6. “만물을 품은 씨앗을 이성이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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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김헌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é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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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진 이미지

조**

2021-03-31

그리스 철학자들의 심도 깊은 이야기를 담아낸 철학의 역사 재미있게 봤어요.

서** 사진 이미지

서**

2021-03-25

철학에 대해 심도있게 고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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