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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시간의 흐름이 환상일지라도

- 이달의 답변 -

안중호

2021-03-05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달의 질문] 계절에 시작과 끝이 있을까요? / 질문자 - 이미아(한국경제신문 기자)

 

Q. 과연 계절에 시작과 끝이 있을까요? 인간은 왜 시간의 순서를 만들고, 거기에 고정관념을 부여할까요? 석학이신 과학자 안중호 선생님께 고견을 구합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안동대 명예교수 안중호



A. 설사 시간의 흐름이 환상일지라도

 

  

난 세기 이래 철학자들은 시간의 실재성 여부를 놓고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물리학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지요. 상당수의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의 주류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근본적으로 없다고 합니다. 소수이지만 시간은 실재하며 현재만이 의미가 있다는 ‘현재주의’의 주장도 있습니다. 양자의 간극은 커 보입니다. 그러나 근원이야 어떻든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현실 세상에는 엄연히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시간을 자각하고 ‘현재’에 충실하려는 자세가 우리의 삶을 값지게 하는 것이 아닌지......



오랜 철학적 난제이자 논란거리



계절과 시간

계절과 시간



이미아 기자님이 던져주신 의문점들은 생활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내용인 듯하나, 실제로는 철학적, 과학적으로 많은 난제와 논란거리를 안고 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조차 『고백록』에서 “도대체 시간은 무엇인가? 누가 내게 묻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막막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계절의 시작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계절은 순환한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순환이 아니지요. 올해의 봄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언급하신 대로 지구상의 어떤 곳에는 한 계절 혹은 두 계절만 있습니다. 물론 사계절이 있는 지역에서는 식물이 돋아나는 봄을 계절의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서양 풀들은 늦봄이나 여름에 누렇게 영글고 가을에 새로 돋아나는 종도 많은 듯합니다. 저는 식물은 잘 모르지만 보리, 서양 잔디 등을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언급하신 프리지아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른 봄에 피지만 원산지인 남아프리카에서는 8월쯤 개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설사 봄을 계절의 시작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절기의 변화를 느끼는 심리적 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이런 여러 점으로 미루어 계절에 시작점을 부여하는 것은 다분히 주관적, 심리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간에 관한 여러 정의들



사전과 시간

사전 속 시간



계절의 변화는 천체의 움직임 때문이지만 그것은 결국 시간이 작용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권위 있는 <미국 헤리티지 영어사전>은 시간을 ‘명백한 비가역적 이어짐으로 사건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일어나는 비공간 연속체’라고 어렵게 정의했습니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시간의 뜻을 무려 30개 이상 열거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 중에 큰 생각 없이 쓰는 시간이라는 단어에 이처럼 많은 의미가 있으며, 뜻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의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네댓 개의 속성을 단독적으로, 혹은 섞어서 시간이라고 부르고 있는 듯합니다. 가령, 시간은 어떤 특정한 순간을 의미합니다. 또, 사건들에 순서를 매겨주는 그 무엇도 시간이라고 인식합니다.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든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1911~2008)는 시간이란 ‘모든 사건이 한 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자연의 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시간이 사건에 순서표를 달아준다는 설명이지요. 한편, 우리는 시간을 흐르는 그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과거 → 현재 → 미래의 순서로 시간이 흐른다고 인식하지요. ‘시간의 화살’은 비가역적으로 항상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예측하거나 미래를 기억하는 일은 불가능하지요. 뿐만 아니라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이나 지속 기간도 시간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질문하신 중에 “시간은 흐르는 존재인데 어떻게 분절했을까요?”라는 문구가 특히 눈에 띕니다. 시간은 정말 흐를까요? 오래 전부터 철학자들이 논쟁을 벌여온 난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변화의 척도라고 했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에 변화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뉴턴도 시간은 실재한다고 생각했지요. 다만, 변화 유무와 무관하게 시간은 그냥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를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인 시간’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마음이 시간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시간을 초월하며, 그런 방식으로 무(無)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설명입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각기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기억, 감지, 기대감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공(空)사상을 세워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도의 승려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 AD 150~250)도 ‘과거, 미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태어남, 늙음, 죽음에 대해 산만하게 논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중론』11-6)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논제



영국 철학자 맥타카트 출처 위키피디아

영국 철학자 맥타카트(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근세에 들어 시간의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 본격적인 논쟁을 촉발한 계기는 케임브리지의 철학자 맥타가트(J.M.E. McTaggart, 1866~1925)의 1908년 논문이었습니다. 그는 <시간의 비실재성(Unreality of Time)>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시간을 두 가지 방식으로 배열해 분석했습니다. 첫 번째 ‘A계열’이라 이름 붙인 방식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일직선상에 순차적으로 이어 배열합니다. 여기서는 현재가 과거에는 미래였으며, 미래에는 과거가 됩니다. 즉, ‘현재’라는 상태가 끊임없이 갱신되며 이어집니다. 한편, ‘B계열’은 어떤 두 사건을 시간선상에 각기 고정시켜 놓고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가령, 어떤 사건을 기준으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1초 전’, ‘이틀 후’ 혹은 ‘동시’ 등으로 비교하는 방식이지요. 맥타가트는 시점이 고정된 B계열에서는 그것만으로는 시간의 흐름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반면, A계열에서는 ‘현재’가 유동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변화하므로 시간의 흐름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속성이 전혀 다른 과거, 현재, 미래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데서 오는 논리적 모순이 있습니다. 그는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매우 정교한 형이상학적 논리를 펼쳤습니다. 결국 어떤 경우이건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맥타가트의 역설은 오늘날까지도 시간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논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오직 현재에서만 의미가 있을까



현재의 시간

현재의 시간



시간의 흐름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맥타가트의 역설은 통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부정하는 여러 반박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재주의(presentism)입니다. 이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론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기대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관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오직 ‘지금’ 하나로 있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ēs, BC 510년~BC 450년)나, 자연 속에서의 시간은 지금뿐이며 과거와 미래는 의식 속에 있다는 독일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주의는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무너져 내립니다. 웬 상대성 이론이냐고 지레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사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도 처음 몇 년 동안은 자신의 이론에 숨겨진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만큼 기이하고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진수는 이론 발표 2년 후인 1907년 아인슈타인을 수학을 못하는 ‘게으른 개’로 불렀던 취리히 공대 시절의 스승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가 정립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은 시공간(spacetime)이라는 개념이지요. ‘민코프스키 공간’ 혹은 ‘빛원뿔(light cone)’로 설명되는 원리의 수학적 세부 내용은 제쳐두고 그 결과만 이해하셔도 충분합니다.



민코프스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민코프스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특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시간은 관측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절대적이지 않고, 이론의 이름 그대로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가령,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것을 바라보는 관측자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빠르게 움직이는 KTX 안에 있는 친구의 시간은 밖에서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게 됩니다. 친구와 나의 시간이 상대적인 것입니다. 물론, 이 효과는 일상적인 속도에서는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워지면 뚜렷이 드러납니다. 한술 더 떠, 10년 후에 발표된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물체도 시간을 변화시킵니다. 초등학교 시절 뉴턴의 사과에서 익히 배웠듯이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중력)이 작용하지요. 그래서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중력)이 약한 높은 산에서는 평지에서 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중력이 시공간을 변형시키기 때문입니다. 앞서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다루는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구조(차원)임을 밝혔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공간이 그렇듯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도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가령, 근처에 아무 천체도 없는 우주 공간 한가운데의 두 물체를 두고 ‘어느 쪽이 높은 곳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난센스입니다. 두 물체의 높낮이를 식별할 대상, 즉 기준틀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here)’라는 장소도 우주의 어느 곳이나 될 수 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이 ‘여기’라고 부른 공간과 부산에 있는 사람이 지칭하는 ‘여기’는 다릅니다. ‘여기’라는 곳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절대적인 어떤 특정 공간이 될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현재(now)’라는 시간도 관측자의 위치나 운동 상태에 따라 아무 때나 될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현재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간’ 혹은 ‘동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특수 상대성 이론의 ‘민코프스키 공간’으로 정확히 설명되나, 여기서는 쉬운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원주의’, 시간의 흐름은 착각일 뿐


 

a, b 가로등을 동시에 켜는 순간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은 두 불빛을 동시에 본다. 그러나 B의 방향으로 다가가고 있는 비행기에서는 B의 빛을 먼저 보고 조금 후에 A의 빛을 본다.

A, B 가로등을 동시에 켜는 순간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은 두 불빛을 동시에 본다.

그러나 B의 방향으로 다가가고 있는 비행기에서는 B의 빛을 먼저 보고 조금 후에 A의 빛을 본다.



사진에서처럼 두 개의 가로등 A와 B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정확히 그 중간 지점에 철수가 있습니다. 철수는 두 가로등의 스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스위치를 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철수의 경우입니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돌 수 있을 만큼 매우 빠르지만, 어쨌든 전달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즉, 가로등 빛이 철수에게 도달하려면 아무리 짧더라도 시간이 걸립니다. 철수와 A, B 두 가로등 사이의 거리는 같습니다. 따라서 빛이 A, B 가로등에서 철수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도 같습니다. 바꾸어 말해, 스위치가 켜진 직후 철수는 두 가로등의 빛을 ‘동시’, 즉 같은 시간에 보게 됩니다. 그런데 A에서 B의 방향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에서 이를 관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가로등의 빛이 비행기로 오는 동안에 극히 짧은 거리이지만 비행기는 B 쪽으로 조금 움직입니다. 즉, 비행기와 A, B 가로등 사이의 거리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비행기에서는 보다 가까운 B의 빛을 먼저 보고 A의 빛은 조금 후에 볼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철수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비행기에서는 다른 시간에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철수가 ‘동시’라고 생각하는 어떤 시점의 ‘현재’가 비행기에서 보면 한 사건은 그 보다 약간 ‘과거’에, 또 다른 사건은 ‘미래’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위의 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합니다. 비행기는 초고속이라도 빛의 속도의 백만 분의 1, 고도도 빛이 1초 동안 가는 거리의 수만 분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미소(微少)한 과거, 현재, 미래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매우 먼 거리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나 천체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가령, 광속에 근접한 속도로 수백만 광년(1광년은 빛이 1년간 이동한 거리임. 편집자 주) 떨어진 먼 공간을 날아가고 있는 우주선을 가정해보지요. 그 우주선에서 서로 250만 광년 떨어진 지구와 안드로메다 성운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우주선의 위치와 운동 상태에 따라 0초~250만 년 사이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과거와 현재, 미래는 구분이 없으며, 다만 상대적일 뿐입니다. 이처럼 관찰자에게만 다를 뿐 과거, 현재, 미래에 구분이 없다는 관점을 영원주의(eternalism)라고 부릅니다. ‘현재’라고 부를 특정한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주의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은 환상 혹은 착각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은 환상일 뿐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거리를 계산하는 GPS 위성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거리를 계산하는 GPS 위성(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상대성 원리는 물체나 천체와 같은 거시세계를 다루는 물리이론입니다. 이와 함께 현대물리학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분야가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입니다. 원자, 전자,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물질의 구성입자(소립자)를 다루는 분야이지요. 양자역학에서의 시간은 더 충격적입니다. 예컨대 반(反)입자라고 불리는 어떤 소립자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도 올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의 수학적 의미에 대한 주류적 설명인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미시세계에서는 인과율도 부정됩니다. 시간적으로 앞선 원인과 뒤따르는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무작위적인 확률에 따를 뿐입니다. 미래의 사건이 과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화살은 자연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지난 세기 이래의 저명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영원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론적 주장에만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가령, GPS는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시간을 계산해 정확한 거리를 나타냅니다. 원자폭탄이나 원자로에서 일어나는 반응, 그리고 다양한 첨단 전자장치들이 양자역학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수많은 실험 및 관측 증거들이 두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인식하는 것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뇌가 만드는 환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과 베쏘 이미지 출처 Alchetron

아인슈타인과 베쏘(이미지 출처 : Alchetron)



1955년 아인슈타인은 절친했던 동창 베소(M. Besso, 1873~1955)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이제 그는 저보다 조금 앞서 이 기이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처럼 신념이 있는 물리학자들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환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33일 후 자신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대부분의 선도적 물리학자들이 시간의 흐름이 환상이라는 영원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물리학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다면 뉴턴의 운동법칙도, 상대성 이론도, 양자역학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수이지만 영원주의를 반대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숀 캐롤(Sean M. Carroll,1966~) 교수는 시간의 실재성에 대해 과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과학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시간을 두고 환상 여부를 따지는 짓이 부질없다는 것이지요. 그와 관련된 논란은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의 몫이 아니겠냐고 제안합니다.



‘영원주의’와 ‘현재주의’ 타협, 제3의 개념 등장



카를로 로벨리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카를로 로벨리(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현재주의와 영원주의의 충돌에 대해 흥미로운, 그러나 매우 설득력 있는 제안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제2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는 프랑스 엑스마르세이유 대학의 이탈리아계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는 2019년의 논문(Neither Presentism nor Eternalism; Foundations of Physics, 49, 12. 2019. pp. 1325)에서, 두 주장을 타협하는 제3의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세상을 근원적으로 분석해보면 시간의 흐름이 환상이라는 영원주의가 옳지만, 현실에서는 현재주의가 적용된다는 ‘국소적 현재(local present)’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가령, 첨단장비의 도움 없이 우리의 뇌가 인식할 수 있는 시간분해능(식별 가능한 가장 짧은 시간)은 약 0.1초입니다. 그보다 짧은 시간을 우리의 뇌는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0.1초 동안 빛은 지구 지름의 2.5배쯤 되는 3만 km를 갑니다. 따라서 이 거리보다 훨씬 작은 생활영역을 가진 우리의 능력으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등한 세상의 진짜 모습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 현재를 과거, 미래와 구분해 인식합니다. 만약 우리 뇌의 시간분해능이 0.00000001초로 충분히 정밀하다면 3m 거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도 시간의 흐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정밀 기기는 그것을 구분하고 있지요.


이는 마치 지구를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지표에서 보면 세상이 평평하지요. 그러나 높이 올라가 인공위성에서 보면 지구의 둥근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만약 땅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울퉁불퉁한 흙이 보일 것입니다. 땅은 전혀 평평하지 않지요. 시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거시세계를 다루는 상대성 이론,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이 모두 같은 결과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나 그로부터 파악한 모든 물리법칙들은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합니다. 과거, 미래와 구분되는 ‘현재’를 우리는 너무도 생생히 느끼고 있습니다. 로벨리가 제안하는 바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재’는 시간분해능의 한계나 특수 상대성 원리의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낮은 속도에서만 나타나는 ‘국소적 현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적, 미시적 규모에서의 근본에 있어서는 시간의 흐름이 환상이라는 겁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감사를!!



사계절

사계절의 뚜렷한 계절감



아름다운 봄꽃 프리지아가 던져준 생각을 너무 사변적으로 이끌어 여기까지 온 듯합니다. 로벨리의 해석처럼 근본적 자연법칙과 달리 우리는 시간이 실재한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철학적, 과학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환상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감사히 여기는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삶은 재즈와 닮았다. 즉흥적일 때야말로 가장 반짝이니까(Life is a lot like jazz. It’s best when you improvise)”라는 미국의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말처럼 저 역시 ‘현재,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가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질문을 주신 기자님께서 묘사한 봄의 매화와 벚꽃, 여름의 눈부신 햇살과 울창한 숲, 가을의 햇곡식과 햇과일. 그리고 겨울에 가족, 연인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그 모두가 ‘지금 이 순간’들이 주는 기적이 아닐까요? 좋은 질문으로 제 시간의 의미까지 다시 돌아보게 해준 이미아 기자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나마 의미있는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3월 [이달의 답변] 설사 시간의 흐름이 환상일지라도 ⑭

3월 [이달의 질문] 계절에 시작과 끝이 있을까요? ⑬

2월 [이달의 답변] ‘듣기의 윤리학’을 배워야 할 시간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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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호
안중호

성균관대 금속공학과를 졸업 후 벨기에 루벵대(UC Louvain)에서 석사, 박사를 했다. 한국기계연구원 선임연구원, (국립)안동대학교 신소재공학교수, 공과대학장, 한국분말야금학회장을 거치며 170편(SCI 137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 안동대 명예교수. 과학교양서 『과학오디세이 유니버스』, 『과학오디세이 라이프』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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