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유랑하던 유대인들 중 일부가 20세기 초 러시아 아나테브카로 흘러들어간다. 나라가 없으니 정부도 없고 법도 없다. 러시아 당국도 지배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이 떠돌이 공동체가 별 탈 없이 굴러갈 것인가? 사는 것은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인데, 굴러 떨어지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전통이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옷 입고, 결혼하고, 기도하고, 랍비의 가르침을 따르고, 상술(商術)을 익히고, 심지어 구걸하는 것까지 전통이 있었다. 전통은 그들의 뼈와 살에 스며들어 있는 사고방식이요 생활 방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전통음식, 전통주, 전통가요, 전통의상, 전통시장, 전통가옥, 전통놀이 등을 놓고 볼 때, 전통이란 전승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은 민족의 취향이 오랜 세월 동안 배어들고, 다듬어지고 보존되어온 문화이다. 그래서 한 민족의 전통은 그 민족 고유의 풍미(風味)를 말해준다.
전통은 시대가 변하고 인지(認知)가 발달함에 따라 부침한다. 오늘날 사자(死者)는 더 이상 울긋불긋한 꽃상여를 타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을 알려주오," “어화 넘자.” 하는 상여소리를 들으며 장지로 가는 호사를 누릴 수 없다. 대신 화장터에서 사자만 견딜 수 있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연기로 사라진다. 초가집과 부뚜막이 사라진 자리에 아파트와 가스레인지가 들어서고, 벽에 똥칠하는 노부모를 고려장 시키는 대신 요양원으로 모신다. 우리 고유의 농악 대신 사물놀이가 세계인의 가슴을 뛰게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에게 전통은 오래된 것, 낡은 것, 고리타분한 것, 보수적인 것, 촌스러운 것, 미신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선진 문화에 밀리는 전통 문화는 존속하기 어렵다.
전통이라고 해서 다 보존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전통을 모두 무시하는 것도 경솔한 일일 것이다. 오늘의 삶 속에서 보존하는 것이 좋은 전통도 있을 것이요, 시대정신에 맞지 않아 퇴출되는 전통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떤 잣대로 전통문화의 옥석을 가릴 것인가?
나는 먼저 좋은 사회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조건들을 생각해볼 것이다. 그 조건들에 비추어 보아 전통의 진면목을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좋은 사회의 조건들을 전통의 옥석을 가리는 기준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나는 ‘전통’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오래된 전통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그래서 미구(未久, 머지 않은 시간. 편집자주.)에 전통으로 굳어져 버릴 수 있는 문화, 풍토, 경향도 전통의 범주에 넣어 논할 것이다.
나는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좋은 사회의 조건들이 어떻게 전통의 옥석을 가리는 기준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일 것이다. 좋은 사회를 위해 이로운 전통과 무해한 전통은 그냥 두면 되기에 거론하지 않고, 주로 해악이 될 만한 문화를 거론할 것이다.
좋은 사회의 조건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좋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물 좋고 공기 좋고,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다. 의식주 걱정이 없고, 편리한 대중교통 수단, 완벽한 의료보험 제도가 있다. 범죄와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고, 독단, 불신, 테러, 전쟁 등이 발을 붙일 수 없다. 좋아하고 보람된 일이 있어 유쾌하게 노동하고 성취감을 느끼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인간선택의 원리가 보편화되어, 장애인, 아동, 여성, 노인,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정착되어 있고, 잘 나지는 못했어도 소외되거나 인권 침해를 당하지 않고, 보호받고, 존중받고, 다 같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 언론은 신속 정확한 보도와 날카롭고 균형 잡힌 논평으로 민심의 향방을 선도한다. 정치인들은 나라 전체의 고통을 앓는 확대된 자아를 가지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공직자들은 청렴하고, 신속하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준다. 법조인들도 권력과 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이해관계와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준다.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교육 기회가 주어지며, 다양한 개성들의 조화와 협력, 세계와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차원 높은 문화생활, 다양한 여가 활동과 취미 생활이 가능하다. 종교의 자유는 다양한 종교 생활을 보장하고, 서로 다른 종교들은 독단에서 벗어나 공존한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 향기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멋진 사람들이 이웃이다.” - 필자의 『철학하는 인간』 중에서
▲ <철학하는 인간>
이 정도면 꿈같은 사회일 것이다. 이런 곳이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묻고 두리번거리는 것은 어리석다. 두리번거릴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좋은 사회에 접근해 가고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인 문화를 짚어보기로 한다.
1)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
좋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은 생존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적어도, 먹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안전해야 한다. 이 생존 조건을 위협하는 문화는 적폐로 간주될 수 있다.
극우적 사고
우리나라는 상위 10%가 국부의 45%를 차지하고 있고, 최저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층이 1500만 명 정도라 한다. 복지제도는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극우적 사고는 이 제도를 못마땅해 한다.
머리가 좋아 일류 대학을 나와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여 고액 연금을 받는 사람들, 사업 수완이 좋아 큰 재산을 모은 사람들, 타고난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세상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들, 심지어 자기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큰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사람들, 세칭 금수저들은 대부분 극우적 사고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무능하고 어리석고, 무절제하고 게으르며, 노력하기보다 불로소득을 탐하기 때문에 가난은 자업자득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기 못나서 못 사는데, 왜 우리가 도와야 하지?”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복지 정책을 비판한다.
복지제도는 극빈층에 대한 동정이나 선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처방이다. 따라서 극우적 사고는 정당화되지 못한다. (여기서 길게 논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적어도 어떤 형식으로든 혜택받은 자들이 경영할 책임이 있고, 그 중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급선무이다. <월든>을 쓴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귀담아 듣자.
“우리의 고통의 대부분은 신체적 냉기(冷氣) 이상으로 사회적 냉기에 기인한다.”
공동 밥상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겪으며 우리는 우리의 공동 밥상 문화가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밥상에 찌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들을 올려놓고 둘러앉아 침을 튀겨가며 대화하고, 하나의 찌개 그릇에 여러 숟갈들이 들락거리는 공동 밥상 문화는 즉각 청산해야 할 것이다.
안전 불감증
2020년 7월 9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산업재해 현황 사망자 수와 업무상 질병자 수는 2019년 1만7천215명으로 5년 사이 76.9% 늘었다. 산업재해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 중요한 것은 ‘안전’의 가치라고 했다. 안전은 물이나 전기와 같이 모든 대상에게 필요한 공적 소비재가 된다고 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의식하고는 있지 못하지만, 안전 불감증 환자들이다. 고속버스에서 안전띠를 맨 사람은 10%도 안 된다.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으면 벌금 20만 원이라는데, 단속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없다. 교통경찰도 안전 불감증을 앓고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2) 더불어 살기를 가로막는 것들
좋은 사회는 더불어 살기가 잘 된 사회이다. 법질서가 확립되어야 하고,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구성원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준법정신 죽이기
법은 지켜야 한다. 그리고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강한 준법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준법정신을 법 집행을 관리하고 감독해야 당국이 앞장서서 노골적으로 마비시키려는 듯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도로에 주정차 금지선(두 개의 노란 선)이 그어져 있고, <견인지역>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 지역이 많다. 그런데 그 지역에 차들이 거의 빈틈없이 주차해 있다. 그래도 차들은 단속되지 않고, 어쩌다 단속되더라도 일관성이 없어서, 시민들은 재수 없게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주정차 금지 구역에 주차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는 시민의 준법정신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서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책임 없는 자유
▲ 가짜뉴스(이미지 출처 : pixabay)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유의 주체가 개인이며 동시에 책임의 주체도 개인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는 넘치는 반면, ‘표현의 책임’은 실종해 있다. 거짓말, 가짜 뉴스, 추정에 불과한 가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발언들로 민심이 왜곡되고 갈등이 증폭된다. 악성 댓글로 마음 약한 사람들이 상처받고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된다. 가짜 뉴스에 당한 사람들은 후일 가짜임이 밝혀져도 일단 뒤집어쓴 오물은 그대로이다. 이러한 현상이 버젓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인간관계의 기본인 소통은 두 가지 원칙을 전제한다. 참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진실성의 원칙,’ 그리고 그 말이 참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증책임의 원칙’이 그것이다. 그런데 주로 일부 정치인과 일부 언론인이 앞장서서 이 두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이를 막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불필요한 혼란에 휩싸여 막대한 국력의 낭비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 동부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새워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이 뼈아프다.
미숙한 걷기
더불어 살기의 기초는 잘 걷기이다. 잘 걷지 못하면 서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걸을 줄 모른다. 이는 아주 오래된 문화적 전통으로서 인간관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길을 걷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스쳐 지나게 된다. 어느 정도로 스쳐야 할까? 어깨와 어깨를 가볍게 부딪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걷기는 잘못된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19로 거리두기를 하기에 서로 부딪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걷기는 생활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 영역에 대한 감각이 아주 예민하다. 앞마당 잔디밭에 허락 없이 한 걸음만 들어가도 가택침입죄가 성립한다. 다른 사람과 스쳐 지나갈 때 옷깃만 스쳐도 서로 “익스큐즈 미!” 하고 양해를 구한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매너가 낯설 수밖에 없다.
대형 양판점 코스트코에서의 일이었다. 카트를 밀고 직진하고 있었는데, 샛길에서 카트가 나오다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백인 남자였다. 나도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가라고 양보의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우선 통행권이 있습니다.” 나는 큰 통로에서 직진하고 있었고 그는 작은 길에서 큰 통로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백인에게 한국인들의 쇼핑하는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통행권 같은 것은 없다. 카트들이 뒤엉키고 부딪치고, 카트로 사람을 밀기도 하고, 길을 막고 물건을 고르기 일쑤다. 무질서 그 자체다. 통행의 규칙도 없고, 양보도 배려도 없다. 양보한다 해도 고맙다는 말은 들을 수 없다. 모두 바쁘게 자기 갈 길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걷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도로에서 차들이 움직이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보행자보다 차가 우선이고, 불법 주정차하고, 불법 유턴하고, 접촉사고가 빈번하고, 위태롭게 끼어들고, 단속 카메라가 안 보이면 과속하고, 차간 거리를 무시하고 바짝 붙어 달리고, 건듯하면 경적을 울려대고, 네거리에서 차들이 엉켜 오도 가도 못 하게 되고, 음주운전하고, 고속도로 주행 중 차를 세워놓고 주먹질을 하기도 한다. 차들은 운전하는 사람의 행동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미숙한 걷기가 운전 방식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걸을 줄 모르는 사람은 운전 말고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양보, 배려, 관용, 공감, 연민, 사랑, 자비, 보살핌, 나눔 등이 요구되는, ‘더불어 살기’라는 고도로 난해한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배우고 생각하기를 방해하는 것들
좋은 사회는 구성원들이 평생 배우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배우고 생각하기는 개인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의 성숙도도 높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배우고 생각하는 삶을 저해하는 문화는 적폐로 간주해야 한다.
책 안 읽기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서점들이 사라진다. 그나마 소수 서점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수험생을 위한 참고서들 덕분이다. 출판사들이 적자 운영에 허덕이다가 도산하고,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은 곰팡이 냄새를 피운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자를 독점하는 계층이 부와 권력의 주체였고, 문자에서 소외된 계층은 가난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이었다. 그러던 역사가 문자의 공유와 함께 자유, 평등, 인권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책을 외면하는 기이한 문화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인간은 원시인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현대인으로 ‘진화’해 간다. 이 진화의 기회를 놓치면, 20세기에 태어난 아이도 원시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존의 원시 부족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정신적 진화의 자양분은 책 안에 있다. 책, 특히 고전은 빼어난 인류의 선각자들이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해 놓은 지식과 지혜의 보고이다. 이러한 책들을 읽음으로써 원시인은 세계와 삶을 이해하고 깨인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현대인으로 진화한다. 뛰어난 지력과 문제의식의 소유자는 책을 읽음으로써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책 읽지 말고 그냥 공부만 해라.”고 하고 자신들 역시 일 년에 책 한 권도 접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대학도서관 모습(이미지 출처 : pixabay)
닫힌 대학도서관
선진국의 대학들은 시민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하여 지역 사회에 대한 대학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들, 특히 사립대학들 가운데 도서관을 개방하고 있는 곳이 별로 없다. 도서관은 넓고, 높고, 컴퓨터와 개인 열람실 등 최고급의 설비와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이용하는 학생들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언제나 비어있다.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그 빈자리에 시민들이 앉고, 서가에서 놀고 있는 책들을 시민들이 빌려다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도난 등의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는 시민들을 잠재적 범인으로 여기는 심사이다. 전국의 모든 대학도서관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 없는 사람들
인간은 본능과 정열의 노예로 살지 않고 오히려 이 본능과 정열까지도 이성적으로 통제하며 사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소망을 전제로 하여 판단하고 행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동시에 문화와 역사를 창조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발명왕 에디슨의 한탄이 아프다.
“5%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10%는 자신들이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은 85%는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생각대로 살게 된다. 떠밀려 사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소망이 아니라 대세가, 강자가 주입한 신념과 소망으로 산다. 그러니 생각한다고 해도 생각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이스라엘의 속담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깊이 파기 위해서 넓게 판다.”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넓고 깊게 생각한 위대한 선각자들 덕에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제고되었다. 노예제도가 사라졌고, 대다수의 나라에서 정치 체제가 민주화되어 가고 있으며, 자유와 평등은 상식이 되어있고, 인권은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아무래도 역사 발전의 동력이기보다는 수혜자에 불과한 것 같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던 먼저 세상을 뜬 함석헌 옹의 호소가 무색하다.
운전을 하다 보면 흔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저 멀리 적색 신호등이 켜 있는 게 보이면 어떻게 운전하는 것이 좋을까? 빨리 달려갈 필요가 없다. 가속 페달을 밟지 않고 천천히 가다 보면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그대로 주행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연료도 절약되고 매연도 줄이고 차의 수명도 늘어난다. 그런데 적색 신호를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가 신호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그들은 운전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매사를 그렇게 생각 없이 처리할 가능성이 커 안타깝다. 우리 모두 걸음마를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4) 자아실현을 멈추게 하는 것들
장미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다면 너무 아까운 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인간으로 태어나 어영부영 살다가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사회는 가능한 한 많은 구성원들이 자아실현을 하고,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취업 지상주의
행복한 사람은 할 일이 있는 사람이지만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우주의 질서에 황홀해 하던 소년이 후일 세무사가 되어 평생 세금 계산을 하며 산다고 해서 행복할 리 없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학생들은 자신의 문제의식과는 관계없이 취업이 잘 되는 전공을 선택한다. 천재들이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철학을 하려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부모들은 가능한 한 자식이 의사나 판검사가 되길 바라고, 적어도 컴퓨터 전문가나 공무원과 같은 안정된 직장을 얻기를 바란다. 의사는 의학 기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기능인이다. 법조인은 법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능인이다. 컴퓨터 전문가 역시 컴퓨터를 만들거나 조작하는 기능인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천직으로 여기고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교육 풍토가 일반적으로 자아실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의 일기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현실의 교육은 “자유롭게 굽이치는 시내를 밋밋한 도랑으로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경쟁력이 없는 기초학문 분야의 학과들은 대학에서 퇴출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는 대학취업률 등을 평가해 대학에 재정을 차등지원 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대학을 취업 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상공농사(商工農士)로 역전되었다. 상술과 기술이 국부를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士)의 몰락은 정신문화의 쇠락(衰落)을 가져와 공상(工商)의 성공마저 하찮게 보이게 한다.
우리 국민의 도덕적, 문화적 성숙도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교통사고 사망률. 산업재해율, 강간범죄율 등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된 삼십여 개 국가들 가운데 상위권이며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의 조화를 이룰 줄 모르고,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가운데 반사회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이들이 많다. 국가적 목표는 ‘경제 성장’으로서, 물질적 풍요만을 지향하고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줄 모른다. 길가에 늘어선 것들은 대부분 음식점, 술집, 카페 등이다. 대학 주변에 문화적 향취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무엇을 만날 수 있는가? 서점도 고전 음악 감상실도 없다. 미술관은 파리를 날리고, 음악회는 공짜 표를 뿌려도 관객이 없다. 음식 산업과 향락 산업만이 번창한다. 우리는 아직 원초적 욕망을 최대의 관심사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쇠락이 인문학의 몰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취업 지상주의는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파괴의 주범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비로운 우주의 거주자이며, 그것도 다른 존재와는 달리 자신의 신념과 소망으로 삶과 문화와 역사를 창출하는 존엄한 존재이고, 누구나 소우주이고, 유한한 시간을 사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자이고, 삶은 무상으로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다. 그런데 취업 지상주의는 어떤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이 소중한 삶을 돈벌이로 전락시킨다. 돈의 가치를 폄훼(貶毁)하자는 것이 아니다. 돈 때문에 진정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문화를 우려하는 것이다.
인재 죽이기
좋은 사회는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는 뛰어난 인물들이 소수나마 꾸준히 배출되는 사회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재를 죽이는 기괴한 문화가 우리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인재의 산실은 대학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학들은 인재 육성에 거의 관심이 없다. 우리의 세계적 기업들은 경제 수준을 세계 정상급으로 견인하는 데 앞장서고 있고 체육, 음악, 영화, 드라마 등의 예체능계에서는 세계적 인물들을 배출한다. 하지만 노벨상은 평화상 외에는 받은 게 없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재가 나올 수 없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좋은 대학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교수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대학들은 세계 각국의 유명한 교수들을 높은 연봉을 주면서 스카우트하고 강의 부담을 덜어주고 연구비를 주면서 연구를 독려한다. 그런 연구 풍토에서 교수들은 자유롭고 여유 있게 연구하여 세계적 수준의 연구물을 내놓는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교수들이 많은 대학이 좋은 대학이다.
우리의 경우 좋은 대학은 교수들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대학이고, 서울에 가깝기만 해도 좋은 대학이 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수한 교수들이 자아실현을 할 만한 연구 풍토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외국의 유명 교수 밑에서 학위를 하고 갓 돌아온 신임 교수는 얼마간 반짝반짝한다. 그러나 예외 없이 3년 내에 망가지고 만다. 노교수들이 젊은 교수들에게 연구할 여건을 마련해 주는 대신 여러 강좌를 맡기는 데다 무엇보다 온갖 잡무를 떠넘기기 때문이다.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세계적 학자가 될 수도 있었던 젊은 교수가 한국에 와서 삼류 학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를 보면 이 점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진다. 이 연구소의 교수가 되면, 높은 연봉을 받고 연구만 하면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진행한다. 아무런 의무도 없고 누구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연구소를 떠날 때도 보고서를 써내야 할 의무도 없다.
이 연구소의 첫 초빙 교수는 아인슈타인이었다. 그가 나빠지는 독일 내부 상황과 반 유대인, 반 상대성이론, 반아인슈타인 음모를 피해 이 연구소로 왔을 때, 아인슈타인의 친구인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 말했다.
“물리학의 교황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제 자연과학의 중심은 미국이 될 것이다.” 이 연구소는 마치 블랙홀처럼 전 세계의 스타급 학자들을 빨아들였다. 논리학자 괴델과 알론조 처치, 수학자 밀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등 세계적인 학자들 대부분이 한 번은 이곳을 거쳐 갔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된 이유 중에는 이처럼 인재 육성에 아낌없는 투자를 할 줄 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재 죽이기의 풍토는 우리의 DNA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앞서 가는 꼴을 못 본다. 어떻게 하면 이 풍토를 바꿀 수 있을까?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어느 정권이든 명운을 걸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하자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이다.
가지치기 잘하고 사람을 잘 키워야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유대인들이 새 땅을 찾아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과 함께 탄압이 강해지면서 아나테브카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랍비여, 우리는 평생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분이 오실 때가 아닌가요?” 이 물음에 랍비가 답한다. “이젠 다른 곳에서 기다려야 해. 자, 다들 짐을 꾸리세.”
다른 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자 프로이트드, 작가 토마스 만, 지휘자 번스타인, 작곡가 말러,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의 전 국무장관 키신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유대인들이다. 미국 월가를 점령하고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가장 큰 세력도 유대인 그룹이다. 유대인은 미국 인구의 3%에 못 미친다. 그런데도 미국 유명 대학교 교수의 30% 정도가 유대인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약 15%가 유대인이다.어찌 된 것인가? 여러 가설들 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들의 교육 전통이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른 판단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논쟁과 토론을 유도하여, 서로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평가해 보도록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마따호쉐프(너의 생각은 무엇이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이유는 알 것 없이 오직 ‘정답’만 말하게 하는 우리의 학교 교육과, 아이들을 무조건 학원을 보내거나 과외를 시키면 되는 줄로 아는 우리의 부모들과 비교해 볼 때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나무가 튼실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면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적폐가 될 만한 문화는 과감히 잘라낼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논한 여러 우려할 만한 문화들의 핵심에는 사람이 있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 교육에 진력(盡力)해야 할 것이다.
철학자. 전 한신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Barbara)에서 석사 및 박사를 한 후 한신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철학연구회 회장과 계간 <철학과현실> 편집고문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논리와 비판적 사고』, 『둥근 사각형의 꿈: 삶에 관한 철학적 성찰』, 『어찌 이방이 사또를 치리오: 비판적 사고 기초편』,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를 가려냈을까: 비판적 사고 응용편』, 『마음의 철학』, 『비판적 사고론』, 『철학하는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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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려두면 자칫 적폐가 될 우리 문화현실
- 이달의 답변 -
김광수
2020-09-04
[이달의 질문] 전통과 적폐는 어떻게 다른가? / 질문자 - 철학자 안광복
Q. 그렇다면 전통과 적폐를 가릴 기준은 무엇일까요? 철학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없었을까요? 석학이신 김광수 선생님께 고견을 구합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철학자 김광수
A. 전통이란 무엇인가
▲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포스터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전통(Tradition)」이라는 곡으로 막을 올린다.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며 사는가?
내가 한 마디로 말해주지.
전통!
오랜 세월 유랑하던 유대인들 중 일부가 20세기 초 러시아 아나테브카로 흘러들어간다. 나라가 없으니 정부도 없고 법도 없다. 러시아 당국도 지배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이 떠돌이 공동체가 별 탈 없이 굴러갈 것인가? 사는 것은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인데, 굴러 떨어지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전통이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옷 입고, 결혼하고, 기도하고, 랍비의 가르침을 따르고, 상술(商術)을 익히고, 심지어 구걸하는 것까지 전통이 있었다. 전통은 그들의 뼈와 살에 스며들어 있는 사고방식이요 생활 방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전통음식, 전통주, 전통가요, 전통의상, 전통시장, 전통가옥, 전통놀이 등을 놓고 볼 때, 전통이란 전승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전통은 민족의 취향이 오랜 세월 동안 배어들고, 다듬어지고 보존되어온 문화이다. 그래서 한 민족의 전통은 그 민족 고유의 풍미(風味)를 말해준다.
전통은 시대가 변하고 인지(認知)가 발달함에 따라 부침한다. 오늘날 사자(死者)는 더 이상 울긋불긋한 꽃상여를 타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을 알려주오," “어화 넘자.” 하는 상여소리를 들으며 장지로 가는 호사를 누릴 수 없다. 대신 화장터에서 사자만 견딜 수 있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연기로 사라진다. 초가집과 부뚜막이 사라진 자리에 아파트와 가스레인지가 들어서고, 벽에 똥칠하는 노부모를 고려장 시키는 대신 요양원으로 모신다. 우리 고유의 농악 대신 사물놀이가 세계인의 가슴을 뛰게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에게 전통은 오래된 것, 낡은 것, 고리타분한 것, 보수적인 것, 촌스러운 것, 미신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선진 문화에 밀리는 전통 문화는 존속하기 어렵다.
전통이라고 해서 다 보존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전통을 모두 무시하는 것도 경솔한 일일 것이다. 오늘의 삶 속에서 보존하는 것이 좋은 전통도 있을 것이요, 시대정신에 맞지 않아 퇴출되는 전통도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떤 잣대로 전통문화의 옥석을 가릴 것인가?
나는 먼저 좋은 사회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조건들을 생각해볼 것이다. 그 조건들에 비추어 보아 전통의 진면목을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좋은 사회의 조건들을 전통의 옥석을 가리는 기준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나는 ‘전통’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오래된 전통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그래서 미구(未久, 머지 않은 시간. 편집자주.)에 전통으로 굳어져 버릴 수 있는 문화, 풍토, 경향도 전통의 범주에 넣어 논할 것이다.
나는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좋은 사회의 조건들이 어떻게 전통의 옥석을 가리는 기준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일 것이다. 좋은 사회를 위해 이로운 전통과 무해한 전통은 그냥 두면 되기에 거론하지 않고, 주로 해악이 될 만한 문화를 거론할 것이다.
좋은 사회의 조건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좋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물 좋고 공기 좋고,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다. 의식주 걱정이 없고, 편리한 대중교통 수단, 완벽한 의료보험 제도가 있다. 범죄와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고, 독단, 불신, 테러, 전쟁 등이 발을 붙일 수 없다. 좋아하고 보람된 일이 있어 유쾌하게 노동하고 성취감을 느끼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인간선택의 원리가 보편화되어, 장애인, 아동, 여성, 노인,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정착되어 있고, 잘 나지는 못했어도 소외되거나 인권 침해를 당하지 않고, 보호받고, 존중받고, 다 같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 언론은 신속 정확한 보도와 날카롭고 균형 잡힌 논평으로 민심의 향방을 선도한다. 정치인들은 나라 전체의 고통을 앓는 확대된 자아를 가지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공직자들은 청렴하고, 신속하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준다. 법조인들도 권력과 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이해관계와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해 준다.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교육 기회가 주어지며, 다양한 개성들의 조화와 협력, 세계와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차원 높은 문화생활, 다양한 여가 활동과 취미 생활이 가능하다. 종교의 자유는 다양한 종교 생활을 보장하고, 서로 다른 종교들은 독단에서 벗어나 공존한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 향기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멋진 사람들이 이웃이다.” - 필자의 『철학하는 인간』 중에서
▲ <철학하는 인간>
이 정도면 꿈같은 사회일 것이다. 이런 곳이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묻고 두리번거리는 것은 어리석다. 두리번거릴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급속도로 좋은 사회에 접근해 가고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마음으로 부정적인 문화를 짚어보기로 한다.
1)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
좋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은 생존일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적어도, 먹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안전해야 한다. 이 생존 조건을 위협하는 문화는 적폐로 간주될 수 있다.
극우적 사고
우리나라는 상위 10%가 국부의 45%를 차지하고 있고, 최저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절대적 빈곤층이 1500만 명 정도라 한다. 복지제도는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극우적 사고는 이 제도를 못마땅해 한다.
머리가 좋아 일류 대학을 나와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여 고액 연금을 받는 사람들, 사업 수완이 좋아 큰 재산을 모은 사람들, 타고난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세상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들, 심지어 자기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큰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사람들, 세칭 금수저들은 대부분 극우적 사고를 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무능하고 어리석고, 무절제하고 게으르며, 노력하기보다 불로소득을 탐하기 때문에 가난은 자업자득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기 못나서 못 사는데, 왜 우리가 도와야 하지?”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복지 정책을 비판한다.
복지제도는 극빈층에 대한 동정이나 선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처방이다. 따라서 극우적 사고는 정당화되지 못한다. (여기서 길게 논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적어도 어떤 형식으로든 혜택받은 자들이 경영할 책임이 있고, 그 중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급선무이다. <월든>을 쓴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귀담아 듣자.
“우리의 고통의 대부분은 신체적 냉기(冷氣) 이상으로 사회적 냉기에 기인한다.”
공동 밥상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겪으며 우리는 우리의 공동 밥상 문화가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밥상에 찌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들을 올려놓고 둘러앉아 침을 튀겨가며 대화하고, 하나의 찌개 그릇에 여러 숟갈들이 들락거리는 공동 밥상 문화는 즉각 청산해야 할 것이다.
안전 불감증
2020년 7월 9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산업재해 현황 사망자 수와 업무상 질병자 수는 2019년 1만7천215명으로 5년 사이 76.9% 늘었다. 산업재해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 중요한 것은 ‘안전’의 가치라고 했다. 안전은 물이나 전기와 같이 모든 대상에게 필요한 공적 소비재가 된다고 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의식하고는 있지 못하지만, 안전 불감증 환자들이다. 고속버스에서 안전띠를 맨 사람은 10%도 안 된다. 안전띠를 착용하지 않으면 벌금 20만 원이라는데, 단속했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없다. 교통경찰도 안전 불감증을 앓고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2) 더불어 살기를 가로막는 것들
좋은 사회는 더불어 살기가 잘 된 사회이다. 법질서가 확립되어야 하고, 자유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구성원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준법정신 죽이기
법은 지켜야 한다. 그리고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강한 준법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준법정신을 법 집행을 관리하고 감독해야 당국이 앞장서서 노골적으로 마비시키려는 듯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도로에 주정차 금지선(두 개의 노란 선)이 그어져 있고, <견인지역>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는 지역이 많다. 그런데 그 지역에 차들이 거의 빈틈없이 주차해 있다. 그래도 차들은 단속되지 않고, 어쩌다 단속되더라도 일관성이 없어서, 시민들은 재수 없게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주정차 금지 구역에 주차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는 시민의 준법정신을 마비시키는 것으로서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책임 없는 자유
▲ 가짜뉴스(이미지 출처 : pixabay)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유의 주체가 개인이며 동시에 책임의 주체도 개인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는 넘치는 반면, ‘표현의 책임’은 실종해 있다. 거짓말, 가짜 뉴스, 추정에 불과한 가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발언들로 민심이 왜곡되고 갈등이 증폭된다. 악성 댓글로 마음 약한 사람들이 상처받고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된다. 가짜 뉴스에 당한 사람들은 후일 가짜임이 밝혀져도 일단 뒤집어쓴 오물은 그대로이다. 이러한 현상이 버젓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인간관계의 기본인 소통은 두 가지 원칙을 전제한다. 참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진실성의 원칙,’ 그리고 그 말이 참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증책임의 원칙’이 그것이다. 그런데 주로 일부 정치인과 일부 언론인이 앞장서서 이 두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이를 막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불필요한 혼란에 휩싸여 막대한 국력의 낭비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 동부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새워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이 뼈아프다.
미숙한 걷기
더불어 살기의 기초는 잘 걷기이다. 잘 걷지 못하면 서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잘 걸을 줄 모른다. 이는 아주 오래된 문화적 전통으로서 인간관계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길을 걷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스쳐 지나게 된다. 어느 정도로 스쳐야 할까? 어깨와 어깨를 가볍게 부딪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걷기는 잘못된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19로 거리두기를 하기에 서로 부딪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걷기는 생활 여러 곳에서 목격된다.)
서양 사람들은 자기 영역에 대한 감각이 아주 예민하다. 앞마당 잔디밭에 허락 없이 한 걸음만 들어가도 가택침입죄가 성립한다. 다른 사람과 스쳐 지나갈 때 옷깃만 스쳐도 서로 “익스큐즈 미!” 하고 양해를 구한다.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매너가 낯설 수밖에 없다.
대형 양판점 코스트코에서의 일이었다. 카트를 밀고 직진하고 있었는데, 샛길에서 카트가 나오다가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백인 남자였다. 나도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가라고 양보의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우선 통행권이 있습니다.” 나는 큰 통로에서 직진하고 있었고 그는 작은 길에서 큰 통로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백인에게 한국인들의 쇼핑하는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통행권 같은 것은 없다. 카트들이 뒤엉키고 부딪치고, 카트로 사람을 밀기도 하고, 길을 막고 물건을 고르기 일쑤다. 무질서 그 자체다. 통행의 규칙도 없고, 양보도 배려도 없다. 양보한다 해도 고맙다는 말은 들을 수 없다. 모두 바쁘게 자기 갈 길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방식은 걷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도로에서 차들이 움직이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보행자보다 차가 우선이고, 불법 주정차하고, 불법 유턴하고, 접촉사고가 빈번하고, 위태롭게 끼어들고, 단속 카메라가 안 보이면 과속하고, 차간 거리를 무시하고 바짝 붙어 달리고, 건듯하면 경적을 울려대고, 네거리에서 차들이 엉켜 오도 가도 못 하게 되고, 음주운전하고, 고속도로 주행 중 차를 세워놓고 주먹질을 하기도 한다. 차들은 운전하는 사람의 행동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미숙한 걷기가 운전 방식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걸을 줄 모르는 사람은 운전 말고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양보, 배려, 관용, 공감, 연민, 사랑, 자비, 보살핌, 나눔 등이 요구되는, ‘더불어 살기’라는 고도로 난해한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배우고 생각하기를 방해하는 것들
좋은 사회는 구성원들이 평생 배우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배우고 생각하기는 개인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의 성숙도도 높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배우고 생각하는 삶을 저해하는 문화는 적폐로 간주해야 한다.
책 안 읽기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서점들이 사라진다. 그나마 소수 서점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수험생을 위한 참고서들 덕분이다. 출판사들이 적자 운영에 허덕이다가 도산하고,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들은 곰팡이 냄새를 피운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자를 독점하는 계층이 부와 권력의 주체였고, 문자에서 소외된 계층은 가난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이었다. 그러던 역사가 문자의 공유와 함께 자유, 평등, 인권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런데 책을 외면하는 기이한 문화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인간은 원시인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현대인으로 ‘진화’해 간다. 이 진화의 기회를 놓치면, 20세기에 태어난 아이도 원시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존의 원시 부족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정신적 진화의 자양분은 책 안에 있다. 책, 특히 고전은 빼어난 인류의 선각자들이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해 놓은 지식과 지혜의 보고이다. 이러한 책들을 읽음으로써 원시인은 세계와 삶을 이해하고 깨인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현대인으로 진화한다. 뛰어난 지력과 문제의식의 소유자는 책을 읽음으로써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책 읽지 말고 그냥 공부만 해라.”고 하고 자신들 역시 일 년에 책 한 권도 접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 대학도서관 모습(이미지 출처 : pixabay)
닫힌 대학도서관
선진국의 대학들은 시민들에게 도서관을 개방하여 지역 사회에 대한 대학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들, 특히 사립대학들 가운데 도서관을 개방하고 있는 곳이 별로 없다. 도서관은 넓고, 높고, 컴퓨터와 개인 열람실 등 최고급의 설비와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이용하는 학생들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언제나 비어있다.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다. 그 빈자리에 시민들이 앉고, 서가에서 놀고 있는 책들을 시민들이 빌려다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도난 등의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는 시민들을 잠재적 범인으로 여기는 심사이다. 전국의 모든 대학도서관이 시민들에게 개방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 없는 사람들
인간은 본능과 정열의 노예로 살지 않고 오히려 이 본능과 정열까지도 이성적으로 통제하며 사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소망을 전제로 하여 판단하고 행위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동시에 문화와 역사를 창조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발명왕 에디슨의 한탄이 아프다.
“5%의 사람들은 생각한다. 10%는 자신들이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은 85%는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지 않으면, 남의 생각대로 살게 된다. 떠밀려 사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소망이 아니라 대세가, 강자가 주입한 신념과 소망으로 산다. 그러니 생각한다고 해도 생각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이스라엘의 속담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깊이 파기 위해서 넓게 판다.”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넓고 깊게 생각한 위대한 선각자들 덕에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제고되었다. 노예제도가 사라졌고, 대다수의 나라에서 정치 체제가 민주화되어 가고 있으며, 자유와 평등은 상식이 되어있고, 인권은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아무래도 역사 발전의 동력이기보다는 수혜자에 불과한 것 같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던 먼저 세상을 뜬 함석헌 옹의 호소가 무색하다.
운전을 하다 보면 흔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저 멀리 적색 신호등이 켜 있는 게 보이면 어떻게 운전하는 것이 좋을까? 빨리 달려갈 필요가 없다. 가속 페달을 밟지 않고 천천히 가다 보면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그대로 주행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연료도 절약되고 매연도 줄이고 차의 수명도 늘어난다. 그런데 적색 신호를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가 신호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그들은 운전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매사를 그렇게 생각 없이 처리할 가능성이 커 안타깝다. 우리 모두 걸음마를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4) 자아실현을 멈추게 하는 것들
장미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다면 너무 아까운 일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인간으로 태어나 어영부영 살다가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사회는 가능한 한 많은 구성원들이 자아실현을 하고,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취업 지상주의
행복한 사람은 할 일이 있는 사람이지만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우주의 질서에 황홀해 하던 소년이 후일 세무사가 되어 평생 세금 계산을 하며 산다고 해서 행복할 리 없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학생들은 자신의 문제의식과는 관계없이 취업이 잘 되는 전공을 선택한다. 천재들이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철학을 하려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부모들은 가능한 한 자식이 의사나 판검사가 되길 바라고, 적어도 컴퓨터 전문가나 공무원과 같은 안정된 직장을 얻기를 바란다. 의사는 의학 기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기능인이다. 법조인은 법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능인이다. 컴퓨터 전문가 역시 컴퓨터를 만들거나 조작하는 기능인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천직으로 여기고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교육 풍토가 일반적으로 자아실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의 일기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현실의 교육은 “자유롭게 굽이치는 시내를 밋밋한 도랑으로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경쟁력이 없는 기초학문 분야의 학과들은 대학에서 퇴출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는 대학취업률 등을 평가해 대학에 재정을 차등지원 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대학을 취업 학원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상공농사(商工農士)로 역전되었다. 상술과 기술이 국부를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士)의 몰락은 정신문화의 쇠락(衰落)을 가져와 공상(工商)의 성공마저 하찮게 보이게 한다.
우리 국민의 도덕적, 문화적 성숙도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교통사고 사망률. 산업재해율, 강간범죄율 등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된 삼십여 개 국가들 가운데 상위권이며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의 조화를 이룰 줄 모르고,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가운데 반사회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이들이 많다. 국가적 목표는 ‘경제 성장’으로서, 물질적 풍요만을 지향하고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줄 모른다. 길가에 늘어선 것들은 대부분 음식점, 술집, 카페 등이다. 대학 주변에 문화적 향취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무엇을 만날 수 있는가? 서점도 고전 음악 감상실도 없다. 미술관은 파리를 날리고, 음악회는 공짜 표를 뿌려도 관객이 없다. 음식 산업과 향락 산업만이 번창한다. 우리는 아직 원초적 욕망을 최대의 관심사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문화의 쇠락이 인문학의 몰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취업 지상주의는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파괴의 주범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비로운 우주의 거주자이며, 그것도 다른 존재와는 달리 자신의 신념과 소망으로 삶과 문화와 역사를 창출하는 존엄한 존재이고, 누구나 소우주이고, 유한한 시간을 사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자이고, 삶은 무상으로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다. 그런데 취업 지상주의는 어떤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이 소중한 삶을 돈벌이로 전락시킨다. 돈의 가치를 폄훼(貶毁)하자는 것이 아니다. 돈 때문에 진정한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문화를 우려하는 것이다.
인재 죽이기
좋은 사회는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는 뛰어난 인물들이 소수나마 꾸준히 배출되는 사회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재를 죽이는 기괴한 문화가 우리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인재의 산실은 대학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학들은 인재 육성에 거의 관심이 없다. 우리의 세계적 기업들은 경제 수준을 세계 정상급으로 견인하는 데 앞장서고 있고 체육, 음악, 영화, 드라마 등의 예체능계에서는 세계적 인물들을 배출한다. 하지만 노벨상은 평화상 외에는 받은 게 없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재가 나올 수 없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좋은 대학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교수들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대학들은 세계 각국의 유명한 교수들을 높은 연봉을 주면서 스카우트하고 강의 부담을 덜어주고 연구비를 주면서 연구를 독려한다. 그런 연구 풍토에서 교수들은 자유롭고 여유 있게 연구하여 세계적 수준의 연구물을 내놓는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교수들이 많은 대학이 좋은 대학이다.
우리의 경우 좋은 대학은 교수들의 수준과는 관계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대학이고, 서울에 가깝기만 해도 좋은 대학이 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수한 교수들이 자아실현을 할 만한 연구 풍토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외국의 유명 교수 밑에서 학위를 하고 갓 돌아온 신임 교수는 얼마간 반짝반짝한다. 그러나 예외 없이 3년 내에 망가지고 만다. 노교수들이 젊은 교수들에게 연구할 여건을 마련해 주는 대신 여러 강좌를 맡기는 데다 무엇보다 온갖 잡무를 떠넘기기 때문이다.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세계적 학자가 될 수도 있었던 젊은 교수가 한국에 와서 삼류 학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를 보면 이 점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진다. 이 연구소의 교수가 되면, 높은 연봉을 받고 연구만 하면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진행한다. 아무런 의무도 없고 누구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연구소를 떠날 때도 보고서를 써내야 할 의무도 없다.
이 연구소의 첫 초빙 교수는 아인슈타인이었다. 그가 나빠지는 독일 내부 상황과 반 유대인, 반 상대성이론, 반아인슈타인 음모를 피해 이 연구소로 왔을 때, 아인슈타인의 친구인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이 말했다.
“물리학의 교황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제 자연과학의 중심은 미국이 될 것이다.” 이 연구소는 마치 블랙홀처럼 전 세계의 스타급 학자들을 빨아들였다. 논리학자 괴델과 알론조 처치, 수학자 밀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등 세계적인 학자들 대부분이 한 번은 이곳을 거쳐 갔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된 이유 중에는 이처럼 인재 육성에 아낌없는 투자를 할 줄 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재 죽이기의 풍토는 우리의 DNA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앞서 가는 꼴을 못 본다. 어떻게 하면 이 풍토를 바꿀 수 있을까?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어느 정권이든 명운을 걸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하자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이다.
가지치기 잘하고 사람을 잘 키워야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유대인들이 새 땅을 찾아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과 함께 탄압이 강해지면서 아나테브카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랍비여, 우리는 평생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분이 오실 때가 아닌가요?” 이 물음에 랍비가 답한다. “이젠 다른 곳에서 기다려야 해. 자, 다들 짐을 꾸리세.”
다른 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한 것이다. 과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자 프로이트드, 작가 토마스 만, 지휘자 번스타인, 작곡가 말러,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의 전 국무장관 키신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유대인들이다. 미국 월가를 점령하고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가장 큰 세력도 유대인 그룹이다. 유대인은 미국 인구의 3%에 못 미친다. 그런데도 미국 유명 대학교 교수의 30% 정도가 유대인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약 15%가 유대인이다.어찌 된 것인가? 여러 가설들 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들의 교육 전통이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른 판단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한 많은 논쟁과 토론을 유도하여, 서로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평가해 보도록 한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마따호쉐프(너의 생각은 무엇이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이유는 알 것 없이 오직 ‘정답’만 말하게 하는 우리의 학교 교육과, 아이들을 무조건 학원을 보내거나 과외를 시키면 되는 줄로 아는 우리의 부모들과 비교해 볼 때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일나무가 튼실한 열매를 맺도록 하자면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적폐가 될 만한 문화는 과감히 잘라낼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논한 여러 우려할 만한 문화들의 핵심에는 사람이 있다.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 교육에 진력(盡力)해야 할 것이다.
9월 [이달의 답변] 내버려두면 자칫 적폐가 될 우리 문화현실 ②
9월 [이달의 질문] 전통과 적폐는 어떻게 다른가? ①
철학자. 전 한신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Barbara)에서 석사 및 박사를 한 후 한신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철학연구회 회장과 계간 <철학과현실> 편집고문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논리와 비판적 사고』, 『둥근 사각형의 꿈: 삶에 관한 철학적 성찰』, 『어찌 이방이 사또를 치리오: 비판적 사고 기초편』,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를 가려냈을까: 비판적 사고 응용편』, 『마음의 철학』, 『비판적 사고론』, 『철학하는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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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적폐는 어떻게 다른가?
안광복
1. 재밌는 역사 이야기, 난해한 역사학 공부
윤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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