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열중하는 ‘시장’이 있다. 지인이 인터넷에 열어 놓은 중고 벼룩시장이다. 주로 작가들이 가입해서인지 나오는 물건이 남다르다. 생필품뿐 아니라 작품이 저렴한 가격에 기습적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댓글로 “저요!”를 가장 먼저 외치는 사람이 임자라, 댓글란은 늘 복작복작하다. 기쁨과 장탄식이 교차한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취향의 좋은 물건이 어찌나 싸게 나오는지, 선착순에 밀려 놓쳐버린 아쉬움에 휴대폰을 잡고 ‘새로고침’하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간다. 일상에 지장이 막심하다. 오죽했으면 방장이 “판매는 금, 토, 일만”이라고 못을 박았을까.
폭풍 같은 주말이 지나면 그때부터는 ‘인증샷’의 행렬이다. 각자 제가 산 것을 자랑하기 바쁘다. 아쉽게 기회를 놓친 이들이 침을 흘리며 다음주엔 더 열심히 매진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다. 그런 재미에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 내놓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내놓을 생각 없던 물건을 자랑 겸 찍어 올렸다가 사람들의 성화에 팔아버리기도 하고, “나도 그것 있는데!”하다가 얼결에 팔아버리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먼저 올리며 집안을 뒤져 달라 요청하기도 한다. 그렇게 판 물건을 택배로 보내기도 하지만 직접 만나 전달하는 재미도 크다. 물건 사고 팔러 만나서 사조직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덤으로 주는 물건도 늘어간다. 배보다 배꼽이 크면 어떤가. 좋은 사람들이 만나는데.
벼룩시장 전성기
내 벼룩시장의 역사는 사실 꽤 오래되었다. 인터넷이 막 활성화되던 시기, 인터넷 중고 경매시장에 열광하여 수많은 시간을 탕진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물건들이었지만 그랬기에 더 부담없이 구입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러다 ‘득템’이라도 하면 어찌나 기쁘던지 동네방네 자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쇼핑이라기보다 게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벼룩시장을 애용하기 시작하면서 내 옷 스타일도 확연하게 자유로워졌다. 평소라면 시도해보기 어려운 옷을 싸다는 이유로 쉽게 사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종이인형놀이하듯이 이런저런 옷을 사서 시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제쳐두거나 되팔았다. 그러면서 핫팬츠 입는 재미에 맛들이고, 스윙댄스 파티드레스를 수집하고, 마작을 하러 갈 때 입을 치파오를 겹겹이 걸어두게 되었다. 새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 운동복을 검색하고, 새 취미를 시작하게 되면 벼룩시장 부터 열어본다. 그렇게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는 ‘패피’가 되었다.
인터넷 중고 경매시장에 시들해질 무렵에는 동네 플리마켓이 활성화되었다. 돈보다 사람들을 만나 놀고 물건도 정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카페나 골목을 채웠다. 득템의 재미도 재미였지만,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데 벼룩시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벼룩시장은 같은 취향과 처지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힘이 있다. 육아용품이 필요한 사람은 물건뿐 아니라 육아정보도 나누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취미용품을 사이에 두고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준다. 출퇴근용 정장원피스를 원하는 사람과 징 박힌 가죽자켓을 원하는 사람은 각자 같은 취향의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떤다. 취향이 비슷하면 삶에도 통하는 게 많기 마련이니까.
벼룩시장은 내 취향에 맞는 물건을 저렴하게 획득한다는 것 외에도, ‘환경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도 주었다. 지구는 이미 포화상태이므로 낭비하거나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공감 아래 이런저런 물건을 리폼해 보기도 했지만, 용도를 찾아주지 못하면 또 다른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재활용보다는 재사용이 환경에는 더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잊히고 묵은 물건들을 다시 햇볕 아래 끄집어내 더 유용하게 써줄 사람에게 보내는 것만큼 좋은 ‘소비’가 어디 있을까.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면서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이집 저집에서 물건을 버려야 한다는 충만한 의욕으로 퇴출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니멀리즘은 소비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 삶의 가치가 다른 곳에 있음을 밝혔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퇴출된 물건은 한편 처치 곤란이다. 사람들은 곤도 마리에의 조언에 따라 ‘가슴이 설레지 않는’ 물건이 얼마나 쓸 만한 상태인지 충분히 살펴보지 않고 버렸다. 미니멀리즘 전도사들은 버리려 마음먹은 물건은 남에게 주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그저 짐을 전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을 유행시킨 일본은 한편으로는 케냐의 환경부장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왕가리 마타이를 통해 ‘모타이나이’(もったいない)라는 말을 세계에 전파한 전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깝다’는 뜻의 이 단어는 무조건 버리는 것이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손에 든 물건을 버리라는 경고음과 아깝다는 속삭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보면 자연히 벼룩시장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버리는 건 아깝지만, 적재적소에 보내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이다. 덕분에 현금도 만지면 좋고. 그렇게 온/오프라인 벼룩시장은 생활에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맥시멀리스트 소비자인 내게는 호시절이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무조건 일단 벼룩시장부터 검색해본다. 새 물건을 사지 않고 헌 물건을 사는 것만으로도 지구환경을 보호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어째 점점 더 짐이 느는 느낌이지만 다 잘 쓰고 있으니 됐다고 자위한다. 그러다보니 집 자체가 벼룩시장과 닮아가고 있다. 쇼핑이 너무나 하고 싶을 때는 내 옷장을 뒤져본다. 그러면 언젠가 벼룩시장에서 산 게 분명한, 처음 보는 옷이 나오기 마련이다. 내가 ‘옷장에서 쇼핑하기’라고 부르는 연례행사다.
벼룩시장이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 ‘소비의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샀는데 별로면 다시 팔면 되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쇼핑을 하고 있었다. 나만 그럴까? 수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런 마음으로 소비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가 수많은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성업하고, 웬만한 인터넷 카페는 자체 장터를 가지고 있으며, 벼룩시장만 전담하는 앱이 유행한다. 물건을 살 때 신중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이 소비사회의 대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의 증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비가 곧 나다
우리 가족은 각자 성격이 무척 달랐는데, 소비에 있어서도 그랬다. 아버지는 “비싼 물건을 비싸게 산 게 자랑”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비싼 물건을 싸게 산 게 자랑”인 사람이었으며, 언니는 “싸고 유용한 물건을 싸게 산 게 자랑”인 사람이었다. 산수에 약한 나는 그저 뭐든 산 게 자랑인 사람이다. 우리는 어쨌든 만나면 서로 새 물건을 자랑하기 바빴다.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이 보였다.
뭔가를 사는 건 늘 해왔지만 소비가 일종의 ‘존재 증명’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하고 싶은 일이 없어졌을 때였다. 하고 싶은 일이 없으니 자동적으로 사고 싶은 것이 늘었다. 마치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도 작용한다는 듯, 욕망의 크기는 같았지만 성격이 변했다. 한 글자 차이였지만 그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 좀 수월하게 여겨졌고, 물건의 성능이 내 존재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건 꽤 간편한 일이었다. 노력과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니까. 돈은 좀 들지만.
사회도 내게 ‘발언은 소비로 하라’고 요구했다. 내가 선호하는 가치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소비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내가 올바르다고 판단한 기업이나 활동은 물건을 사는 형태로 지지하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기업이나 가게의 상품은 불매한다. 가끔 어떤 기업은 원래 내가 그곳의 물건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불매도 의미 없을 때가 있지만,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으로 그 기업의 매출이 하락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응징했다며 기뻐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의 책을 사고 작품을 사고 굿즈를 산다. 좋은 영화가 나오면 영화표를 사고 굿즈를 산다. 좋은 음악이 있으면 음반을 사고 굿즈를 산다. 응원하는 단체에는 후원금을 보내거나 굿즈를 사는 형식으로 후원한다. ‘말보다 행동’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말보다 구매’로 바뀐 건 꽤 되었다. “요즘 무슨 생각해?” 라는 질문도 곧 “요즘 뭘 사?”로 바뀔 게다. 사람들은 삶을 산다. 그리고 물건을 산다. 이 절묘한 동음이의는 곧 같은 의미의 동사가 될 것 같다. 내 소비생활도 되짚어보니 역시 그렇다.
소비는 인간관계도 좌우한다. 어디를 가든 돈이 드는 지금 상황에서는 돈이 없으면 친구를 만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소비하지 않을지 결정에 따라서 만나는 사람의 범위와 성격도 달라진다. 술을 끊고 나서 가장 크게 변한 건 건강상태도 몸무게도 아니었다. 인간관계의 지도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수많은 술친구들과 멀어졌다. 그들은 당황하고 섭섭해 하더니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술 생각은 안 나도, 그리운 단골집에 가고 싶어질 때는 종종 있다. 아늑한 분위기, 맛있는 안주, 음악. 하지만 술을 사 먹을 수 없으므로 갈 일이 없다.
술을 끊으면서 잃어버린 인간관계가 있다면 술 대신 늘어난 소비에 따라 넓어진 인간관계도 있으리라. 총량은 같을지 몰라도 그들 덕분에 내 삶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을 결정한 것이 바로 “어디에 돈을 쓸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 돈을 쓰는지에 따라 정의되고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다시 말해 소비가 곧 나다.
요즘 나의 소비는
얼마 전 벼룩시장에서 내 옷 몇 벌을 산 분이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이 드레스의 전 주인은 소신이 있고 강한 멋진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분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건을 통해서 타인에게 전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일부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 단순하게 물건과 돈을 교환하지 않는다. 내 일부를 내보내고, 내 일부를 채운다. 그렇게 우리는 소비를 통해 세상과 서로에게 삼투압 한다.
요즘 나의 관심은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을 의뢰하는 연락이 오면 ‘이 일을 하면 이것을 살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했다. 요즘에는 ‘이걸 안 사면 일 하나를 덜 해도 돼’라는 마음으로 산다. 소비를 줄이면 내 시간이 늘고 여유가 늘어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천천히 줄이고, 꼭 필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만 사고, 가능한 한 중고로 사는 것. 자칭 ‘쇼핑의 여왕’이던 나는 이렇게 내 삶을 가다듬는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일까? 요즘 그 경계를 더듬더듬 살펴보고 있다. 지갑을 꼭 쥐고서.
작가이자 북칼럼니스트. 매번 흥미를 느끼는 주제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에 대해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행운을 누려왔다. 읽는 것, 읽어주는 것, 읽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통해 함께 사는 삶을 실감한다. 『나에게, 여행을』 『가꾼다는 것』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등의 책을 쓰고 신문연재와 방송 출연으로 사람들과 접점을 넓혀왔다. 2013년부터 매달 ‘박사의 책 듣는 밤’을 열어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미지_ⓒ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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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곧 나다
삶을 산다. 그리고 물건을 산다.
박사
2019-12-16
요즘 내가 열중하는 ‘시장’이 있다. 지인이 인터넷에 열어 놓은 중고 벼룩시장이다. 주로 작가들이 가입해서인지 나오는 물건이 남다르다. 생필품뿐 아니라 작품이 저렴한 가격에 기습적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댓글로 “저요!”를 가장 먼저 외치는 사람이 임자라, 댓글란은 늘 복작복작하다. 기쁨과 장탄식이 교차한다. 쉽게 만나기 어려운 취향의 좋은 물건이 어찌나 싸게 나오는지, 선착순에 밀려 놓쳐버린 아쉬움에 휴대폰을 잡고 ‘새로고침’하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간다. 일상에 지장이 막심하다. 오죽했으면 방장이 “판매는 금, 토, 일만”이라고 못을 박았을까.
폭풍 같은 주말이 지나면 그때부터는 ‘인증샷’의 행렬이다. 각자 제가 산 것을 자랑하기 바쁘다. 아쉽게 기회를 놓친 이들이 침을 흘리며 다음주엔 더 열심히 매진할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다. 그런 재미에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 내놓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내놓을 생각 없던 물건을 자랑 겸 찍어 올렸다가 사람들의 성화에 팔아버리기도 하고, “나도 그것 있는데!”하다가 얼결에 팔아버리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먼저 올리며 집안을 뒤져 달라 요청하기도 한다. 그렇게 판 물건을 택배로 보내기도 하지만 직접 만나 전달하는 재미도 크다. 물건 사고 팔러 만나서 사조직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덤으로 주는 물건도 늘어간다. 배보다 배꼽이 크면 어떤가. 좋은 사람들이 만나는데.
벼룩시장 전성기
내 벼룩시장의 역사는 사실 꽤 오래되었다. 인터넷이 막 활성화되던 시기, 인터넷 중고 경매시장에 열광하여 수많은 시간을 탕진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물건들이었지만 그랬기에 더 부담없이 구입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러다 ‘득템’이라도 하면 어찌나 기쁘던지 동네방네 자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쇼핑이라기보다 게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벼룩시장을 애용하기 시작하면서 내 옷 스타일도 확연하게 자유로워졌다. 평소라면 시도해보기 어려운 옷을 싸다는 이유로 쉽게 사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종이인형놀이하듯이 이런저런 옷을 사서 시도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제쳐두거나 되팔았다. 그러면서 핫팬츠 입는 재미에 맛들이고, 스윙댄스 파티드레스를 수집하고, 마작을 하러 갈 때 입을 치파오를 겹겹이 걸어두게 되었다. 새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 운동복을 검색하고, 새 취미를 시작하게 되면 벼룩시장 부터 열어본다. 그렇게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는 ‘패피’가 되었다.
인터넷 중고 경매시장에 시들해질 무렵에는 동네 플리마켓이 활성화되었다. 돈보다 사람들을 만나 놀고 물건도 정리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카페나 골목을 채웠다. 득템의 재미도 재미였지만,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데 벼룩시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벼룩시장은 같은 취향과 처지의 사람들을 묶어주는 힘이 있다. 육아용품이 필요한 사람은 물건뿐 아니라 육아정보도 나누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취미용품을 사이에 두고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준다. 출퇴근용 정장원피스를 원하는 사람과 징 박힌 가죽자켓을 원하는 사람은 각자 같은 취향의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떤다. 취향이 비슷하면 삶에도 통하는 게 많기 마련이니까.
벼룩시장은 내 취향에 맞는 물건을 저렴하게 획득한다는 것 외에도, ‘환경을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도 주었다. 지구는 이미 포화상태이므로 낭비하거나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공감 아래 이런저런 물건을 리폼해 보기도 했지만, 용도를 찾아주지 못하면 또 다른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재활용보다는 재사용이 환경에는 더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잊히고 묵은 물건들을 다시 햇볕 아래 끄집어내 더 유용하게 써줄 사람에게 보내는 것만큼 좋은 ‘소비’가 어디 있을까.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면서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이집 저집에서 물건을 버려야 한다는 충만한 의욕으로 퇴출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니멀리즘은 소비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우리 삶의 가치가 다른 곳에 있음을 밝혔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퇴출된 물건은 한편 처치 곤란이다. 사람들은 곤도 마리에의 조언에 따라 ‘가슴이 설레지 않는’ 물건이 얼마나 쓸 만한 상태인지 충분히 살펴보지 않고 버렸다. 미니멀리즘 전도사들은 버리려 마음먹은 물건은 남에게 주지도 말라고 선언했다. 그저 짐을 전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을 유행시킨 일본은 한편으로는 케냐의 환경부장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왕가리 마타이를 통해 ‘모타이나이’(もったいない)라는 말을 세계에 전파한 전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깝다’는 뜻의 이 단어는 무조건 버리는 것이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손에 든 물건을 버리라는 경고음과 아깝다는 속삭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보면 자연히 벼룩시장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버리는 건 아깝지만, 적재적소에 보내는 건 괜찮지 않을까?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말이다. 덕분에 현금도 만지면 좋고. 그렇게 온/오프라인 벼룩시장은 생활에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맥시멀리스트 소비자인 내게는 호시절이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무조건 일단 벼룩시장부터 검색해본다. 새 물건을 사지 않고 헌 물건을 사는 것만으로도 지구환경을 보호하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어째 점점 더 짐이 느는 느낌이지만 다 잘 쓰고 있으니 됐다고 자위한다. 그러다보니 집 자체가 벼룩시장과 닮아가고 있다. 쇼핑이 너무나 하고 싶을 때는 내 옷장을 뒤져본다. 그러면 언젠가 벼룩시장에서 산 게 분명한, 처음 보는 옷이 나오기 마련이다. 내가 ‘옷장에서 쇼핑하기’라고 부르는 연례행사다.
벼룩시장이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라 ‘소비의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샀는데 별로면 다시 팔면 되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쇼핑을 하고 있었다. 나만 그럴까? 수많은 사람들이 아마 그런 마음으로 소비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가 수많은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성업하고, 웬만한 인터넷 카페는 자체 장터를 가지고 있으며, 벼룩시장만 전담하는 앱이 유행한다. 물건을 살 때 신중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이 소비사회의 대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의 증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비가 곧 나다
우리 가족은 각자 성격이 무척 달랐는데, 소비에 있어서도 그랬다. 아버지는 “비싼 물건을 비싸게 산 게 자랑”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비싼 물건을 싸게 산 게 자랑”인 사람이었으며, 언니는 “싸고 유용한 물건을 싸게 산 게 자랑”인 사람이었다. 산수에 약한 나는 그저 뭐든 산 게 자랑인 사람이다. 우리는 어쨌든 만나면 서로 새 물건을 자랑하기 바빴다.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이 보였다.
뭔가를 사는 건 늘 해왔지만 소비가 일종의 ‘존재 증명’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하고 싶은 일이 없어졌을 때였다. 하고 싶은 일이 없으니 자동적으로 사고 싶은 것이 늘었다. 마치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도 작용한다는 듯, 욕망의 크기는 같았지만 성격이 변했다. 한 글자 차이였지만 그 차이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 좀 수월하게 여겨졌고, 물건의 성능이 내 존재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건 꽤 간편한 일이었다. 노력과 시간을 들일 필요도 없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니까. 돈은 좀 들지만.
사회도 내게 ‘발언은 소비로 하라’고 요구했다. 내가 선호하는 가치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소비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내가 올바르다고 판단한 기업이나 활동은 물건을 사는 형태로 지지하고,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기업이나 가게의 상품은 불매한다. 가끔 어떤 기업은 원래 내가 그곳의 물건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불매도 의미 없을 때가 있지만,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활동으로 그 기업의 매출이 하락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응징했다며 기뻐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의 책을 사고 작품을 사고 굿즈를 산다. 좋은 영화가 나오면 영화표를 사고 굿즈를 산다. 좋은 음악이 있으면 음반을 사고 굿즈를 산다. 응원하는 단체에는 후원금을 보내거나 굿즈를 사는 형식으로 후원한다. ‘말보다 행동’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말보다 구매’로 바뀐 건 꽤 되었다. “요즘 무슨 생각해?” 라는 질문도 곧 “요즘 뭘 사?”로 바뀔 게다. 사람들은 삶을 산다. 그리고 물건을 산다. 이 절묘한 동음이의는 곧 같은 의미의 동사가 될 것 같다. 내 소비생활도 되짚어보니 역시 그렇다.
소비는 인간관계도 좌우한다. 어디를 가든 돈이 드는 지금 상황에서는 돈이 없으면 친구를 만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무엇을 소비하고 무엇을 소비하지 않을지 결정에 따라서 만나는 사람의 범위와 성격도 달라진다. 술을 끊고 나서 가장 크게 변한 건 건강상태도 몸무게도 아니었다. 인간관계의 지도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수많은 술친구들과 멀어졌다. 그들은 당황하고 섭섭해 하더니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술 생각은 안 나도, 그리운 단골집에 가고 싶어질 때는 종종 있다. 아늑한 분위기, 맛있는 안주, 음악. 하지만 술을 사 먹을 수 없으므로 갈 일이 없다.
술을 끊으면서 잃어버린 인간관계가 있다면 술 대신 늘어난 소비에 따라 넓어진 인간관계도 있으리라. 총량은 같을지 몰라도 그들 덕분에 내 삶은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을 결정한 것이 바로 “어디에 돈을 쓸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어디에 돈을 쓰는지에 따라 정의되고 끊임없이 재정의된다. 다시 말해 소비가 곧 나다.
요즘 나의 소비는
얼마 전 벼룩시장에서 내 옷 몇 벌을 산 분이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이 드레스의 전 주인은 소신이 있고 강한 멋진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분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물건을 통해서 타인에게 전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의 일부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 단순하게 물건과 돈을 교환하지 않는다. 내 일부를 내보내고, 내 일부를 채운다. 그렇게 우리는 소비를 통해 세상과 서로에게 삼투압 한다.
요즘 나의 관심은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을 의뢰하는 연락이 오면 ‘이 일을 하면 이것을 살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했다. 요즘에는 ‘이걸 안 사면 일 하나를 덜 해도 돼’라는 마음으로 산다. 소비를 줄이면 내 시간이 늘고 여유가 늘어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을 천천히 줄이고, 꼭 필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만 사고, 가능한 한 중고로 사는 것. 자칭 ‘쇼핑의 여왕’이던 나는 이렇게 내 삶을 가다듬는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일까? 요즘 그 경계를 더듬더듬 살펴보고 있다. 지갑을 꼭 쥐고서.
작가이자 북칼럼니스트. 매번 흥미를 느끼는 주제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에 대해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행운을 누려왔다. 읽는 것, 읽어주는 것, 읽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통해 함께 사는 삶을 실감한다. 『나에게, 여행을』 『가꾼다는 것』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등의 책을 쓰고 신문연재와 방송 출연으로 사람들과 접점을 넓혀왔다. 2013년부터 매달 ‘박사의 책 듣는 밤’을 열어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미지_ⓒ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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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 현실이 되는 소비의 미래
황지영
왜 지금, 착한 소비인가?
천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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