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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품어준, 집 

장서가이자 애묘인인 일인가구가 떠나는 '집을 찾는 모험'

박사

2019-09-23

 

나에게 딱 맞는 집은 어디에 있을까?



문득 지금의 집이 내게는 완벽한 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뜬금없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만 오면 천정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집주인과 부동산에 설왕설래하고, 옥상 아래 첫 집이라 여름 내내 달구어져 에어컨 없이는 숨도 쉬기 힘들었던 집. 방마다 종유석처럼 자라는 책 더미 때문에 바닥을 본지 오래, 남아있는 거라고는 오솔길밖에 없는 집. 밤이 되면 삼층 저 아래 건넛집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까지 들리는 집. 그런데 이 집이 내게 완벽하다니. 친구에게 얘기하자 친구도 어리둥절해 했다.


“비 새는 것도 거의 잡았잖아. 이제는 천정 얼룩만 남았는걸. 여름 더위야 에어컨이 있으니 괜찮고. 내 물건들도 어쨌든 놓을 자리는 있잖아. 필요한 것, 있을 것 다 갖고 있으니 완벽한 집이지.”

그러자 친구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자 없는 집을 가장 좋은 집이라고 하다니. 너도 참 소박하다.”

소박한 것일까? 세상에는 집이 꼭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못 가진 집이 많다. 벽, 문, 부엌, 화장실, 전기, 수도, 하수구. 적당한 삶의 질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그중에 없어도 살만한 것을 꼽는다면 먼저 부엌일 것이다. 어렸을 때 몇 년간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 딸린 작은 방에서 산 적이 있다. 다 있었지만 부엌은 없었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 지금은 먹자거리로 유명하지만 그때는 작은 상점들이 늘어선 시장이었던 서촌 금천교시장이 있었다. 주로 중국음식을 시켜먹었고 때때로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끼니를 굶을 일은 없었다. 지금도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언니는 종종 말한다. “아파트에서 부엌을 빼면 방 하나를 더 만들 수 있는데.


문이 없는 것은 좀 곤란하지만, 없다고 못 사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 후배 집에 놀러갔다가 그 집에 문이 없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사실 화장실도 없었지만 그 동네에 유일하게 번듯한 건물인 공중화장실이 있었으니 그나마 나았다. 문 대신 드리운 거적을 들추면 어둡고 작은 부엌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작은 방이 나왔던 기억. 지금 그 동네는 아파트촌이 되었다. 그 작은 집도 불도저에 밀려갔을 것이다. 번듯한 공중화장실과 함께. 


처음 나와 살던 집에는 보일러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보일러의 흔적만 있었다. 아마도 연탄보일러였을 구멍에는 벽돌이 채워져 있었다. 그 집은 대학생 여럿이 돈을 모아 빌린 낡은 구옥이었다. 벽이 무너지면 그 방의 문을 닫고 다른 방으로 이사해 살았다. 그래도 어쨌든 보일러 빼고는 있을 건 다 있었다. 보일러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은 힘들었지만 못할 일은 아니다. 한겨울에 집에 돌아오면 전기장판이 늘 켜져 있던 이불 속으로 뛰어들곤 했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옷 갈아입는 기술은 이때 확실히 늘었다.     

 

창문은 없어도 곤란하지만 허술해도 곤란하다.


두 번째 이사 간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친구네 집이 4층에 있어 급하면 그 집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매번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부엌이야 없어도 그런대로 살만하지만 화장실은 확실히 없으면 곤란하다. 그래도 여차저차 살 수는 있다. 동네 지리와 건물화장실 위치에 환해지면.


선배언니의 집은 거기에 더해서 하수구도 없었다. 수도는 있는데 하수구는 없다니 기이한 구조다. 게다가 그 집은 지하에 있는데. 선배는 싱크대에서 씻은 뒤, 싱크대 아래의 양동이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 오수를 수챗구멍에 버렸다. 이런 집에 살면 부지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이 조금이라도 넘치면 처리할 방법이 없어 난감하니, 깔끔하게 살고 싶다면 부지런히 층계를 오르내려야 한다.   


강남의 한 빌딩 지하에 있던 그 집도 그랬다. 넓은 지하를 삼등분하여 각각 방을 들였다. 그 집엔 화장실도 없고 창문도 없었다. 간단한 세면도구만 1층 회사 화장실에 두고,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부지런히 씻는다 했다. 늦게 일어나면 눈꼽만 떼고 나와야 할 판국이다. 오피스 건물로 가득찬 강남에 이런 방이 있다니. 집을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는 지금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반지하에 산다면 창문은 있는 게 좋을까 없는 게 좋을까. 반지하 집은 대부분 집을 들여다보기 쉬운 위치에 창문이 있다. 창문이 없어도 곤란하지만 허술해도 곤란하다. 그럴 바에는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살던 반지하 집 창문은 빌라 뒤뜰로 나 있었는데, 한밤중에 누군가 그 창문을 다 떼어낸 적이 있다. 자다 깨어보니 밤하늘 별이 총총 보였을 때의 당황스러운 기분이 종종 생각난다. 범죄로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지만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창문이 없는 집은 너무 암울하다. 이것저것 다 없더라도 창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독립한 이후의 내 삶은 “집을 찾아 떠도는 모험”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원하는 조건은 까다로운데 현실적인 조건은 늘 박하니, 발품을 파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2년이 지날 때마다 살만한 적당한 집을 찾아 뒤지며 ‘현실의 나’를 돌아본다. 어떨 때는 ‘아직도’. 어떨  때는 ‘여전히’. 어떨 때는 ‘이만하면’ 어떨 때는 ‘제법’. 접속사는 수시로 바뀌지만, 사실 고만고만한 집들을 거쳐 이곳에 와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일인가구라는 것. 따로 방을 써야 할 식구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선택의 폭은 확연히 넓어진다. 원룸이어도 괜찮고 방이 많아도 괜찮다. 방이 없으면 다목적 가구를 궁리하고 방이 많으면 용도별 세분화를 시도한다. 취향은 탁 트인 공간이지만 오밀조밀한 공간이어도 어떻게 쓸까 상상을 펼치는 걸 좋아하니, 넓이만 어느 정도 확보되면 구조에는 훨씬 너그러워진다. 내방을 갖고 싶어하는 아이, 자기 서재가 있었으면 하는 남편이 없다는 게 이렇게 홀가분한 일일 줄이야! 


그렇듯 좋은 면도 있지만, 혼자 사는 집을 구하는 건 훨씬 까다롭게 조건을 따져야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치안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 동네도 따져야 하고, 건물도 따져야 하고, 이웃도 따져야 한다. 복도가 있는 건물은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봐야 하고, 낮은 층이라면 창문 밖이 어디와 연결되는지 살펴야 한다. 정류장에서 얼만큼 들어오는지, 근처에 가까운 가게는 무엇이 있는지, 경찰서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아보지 않고 섣불리 계약할 수는 없다. 도움을 청할 동네친구가 있는가도 고려할 요소가 된다.  


일인가구라고 해서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말썽이라고는 전혀 부릴 것 같지 않게 생겼지만 존재 자체가 말썽인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반려동물이 있으면 구할 수 있는 집의 범위는 반으로 줄어든다. 반려동물은 안 된다고 아예 못박은 집들도 많고, 고양이들이 행복하게 살기 어려운 구조의 집들도 있으니 그렇잖아도 까다로운 조건은 더 까다로워진다. 사실 집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나보다 내 고양이들의 취향이 더 중요하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밖에서 지내지만 고양이들은 24시간 365일을 집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집을 보러 가서 내 고양이라면 이곳을 어떻게 이용할지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건 내가 팔불출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이 공평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책이 주인인 나의 집


거기에 더불어 내게는 책이 있다. 그것도 많다. 이사를 할 때마다 몇 천 권의 책을 정리하지만 그만큼 다시 차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집 일순위가 우리집 같은 집, 책이 많은 집이다. 알지만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다. 종이책이 아닌 이북을 이용해볼까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내게 이북은 책이 아니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겨우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응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책이 많은 집은 재난에도 취약하다. 


재작년에 내가 살고 있는 빌라 1층에서 불이 났다. 불길이 2층을 핥으며 올라올 때 잠에서 깨어, 소방관들이 산소호흡기를 물려 구조해주어 겨우 살 수 있었다. 불길이 잡히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땔감”들이었다. 저 많은 책에 불이 옮겨붙었으면 어떻게 되었으려나. 아찔했다. 그때 이놈의 책들을 몽땅 정리해버리리라 결심했지만, 인생은 결심한 대로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책은 바닥을 덮으며 증식하는 중이다. 내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어찌보면 책일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늘어놓아보아야 무슨 소용일까. 사실 집을 구할 때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무언가는 희생해야 하고 어떨 때는 뜻밖의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부암동의 집이 그랬다. 그리고, 그 집 덕분에 삶의 방향이 조금이지만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방 세 개에 마당, 마당에 창고까지 붙어있는 오래된 단독주택에 들어가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단독주택은 꽤나 손을 많이 탄다. 웬만한 집주인은 여자 혼자 살겠다는데 선뜻 집을 내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다른 조건을 따질 경황이 없었다. 살던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피붙이 근처에 가 살고 싶었다. 늘 번화가 한복판에 살던 내게 부암동은 시골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낡았고, 습했고, 추웠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랬지만 나는 그 집에서 살게 되어 행복했다. 


그 집에서 살면서 나는 친구들을 불러모아 노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수시로 방방마다 빼곡하게 들어찰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싸온 음식을 풀고 수다를 떨었다. 이것저것 해먹고 무리지어 산책도 다녔다. 친구들은 시골 외갓집에 온 기분이라 했다. 보일러를 한껏 올리고 웃풍 센 방에서 이불을 둘러 덮고 앉아 밤새워 놀면서 나는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갔다. 이전의 삶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덜 벌고 더 많은 시간을 누리는 법. 자연과 계절의 흐름을 타는 법. 이웃과 삶을 나누는 법. 다른 방식의 삶으로 좀 더 쉽게 갈아타는 법. 불편하고 분에 넘치는 집에 살면서 내가 배운 것들이다. 그 집은 나를 품어주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켰다. 그 집에서의 시간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더 예민하고 강퍅한 인간이 되었으리라. 


그 풍요롭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요즘 작은 빌라에 산다. 이곳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요즘 갖고 싶은 것은 법당이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마루가 갖고 싶다. 누구와도 쉽게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암동의 집처럼 떠들썩하고 복작대지 않아도, 사람들이 한가로운 마을 정자에 들렀다 가듯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집. 그곳에서 내 삶이 가루분유 물에 풀리듯 풀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 책들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그러고보면 집은 갖춰야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없어야 하는 것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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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북칼럼니스트
박사

작가이자 북칼럼니스트. 매번 흥미를 느끼는 주제를 발견할 때마다 그것에 대해 쓸 수 있는 기회를 만나는 행운을 누려왔다. 읽는 것, 읽어주는 것, 읽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업을 통해 함께 사는 삶을 실감한다. 『나에게, 여행을』 『가꾼다는 것』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등의 책을 쓰고 신문연재와 방송 출연으로 사람들과 접점을 넓혀왔다. 2013년부터 매달 ‘박사의 책 듣는 밤’을 열어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미지_ⓒ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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