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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집, 그 욕망과 미망의 역사

한국 소설에서 발견한, 서울의 집과 그에 대한 욕망들

송은영

2019-09-09

 

하이데거는 거주가 인간 실존의 본질이자 존재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장소에 오랜 시간 머무는 거주는 필연적으로 집과 방이라는 공간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집과 방이 존재의 안정감과 정체성의 기반이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할까? 



서울, 버텨야 하는 희망 



오늘날 서울의 집 한 채는 집값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만약 젊은이들이 서울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면, 결혼과 출산을 할 확률도 높아지고, 저축과 재테크를 계획할 가능성도 늘어날 것이다. 집은 주거 공간이면서 삶의 희망과 미래를 담는 그릇이다. 그러나 서울에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종종 좌절과 고통의 시간과 함께 한다. 

더 이상 정직하고 꾸준하게 벌어서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꿈이 가능하지 않은 서울에서,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모든 기회와 자산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지금 청년들의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에게도 서울의 집이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도 서울에 집을 마련하기 위한 시련의 시간을 견뎠을까?


서울의 풍경. 아파트로 가득하다


소설가 이청준은, 1970년대 후반에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5년을 회고하며 이런 구절을 남겼다. “사람들은 이 서울에 그처럼 많은 불빛과 창문들이 많아도 자기 한 몸뚱이 깃들일 곳을 위해서는 이 도시가 얼마나 비좁고 매정스런 곳인가를 배우게 된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상경했던 이 소설가는, 대학을 졸업하며 서울에 자신을 비끄러맬 끈이 사라지자 서울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는 “이 자랑스런 도시 서울에 내 집 한 칸을 지니려는 신앙 속에서 나의 20대와 30대는 온갖 기구와 봉사를 다 바쳐 온 느낌이 든다”고 고백했다.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소설가 박태순은 아예 <서울의 방>이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이 서울의 집에 대해 내린 진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사실 내 경우에 있어서도 힘들었던 것은 바로 서울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전체를 따져놓고 볼 때, 서울이라고 하는 공간성은 위대한 것이다. 어쨌든 서울은 다른 곳에 비하여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커다란 방과 같은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허용 안 되는 어떤 알파가 여기에는 첨가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서울은 그 자체가 집이고 방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서울에 살고 싶어하고 좀처럼 서울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서울의 방’만이 자신들이 원하는 자아, 삶, 목적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희망의 정체가 무엇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 어떤 알파”일 뿐이다. 그것은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의 집적체이며, 서울은 그것을 응축시킨 ‘욕망의 집결지’였다.



이주민, 서울이란 미로를 떠돌다 



서울에 집을 마련하겠다는 일념으로 몇십 년 간 이어진 행렬을 이촌향도라는 건조한 단어로 요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을 서울로 향하게 만든 욕망의 내용, 실현과 좌절, 그에 뒤따르는 여러 감정들을 하나도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을 향한 욕망은 거대한 도시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미망(迷妄)의 수많은 개인사들을 만들었다. 


서울이라는 미로 안에서 펼쳐진 이 욕망과 미망의 역사 속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긴 이주민은 ‘떠돌이’였다. 빈번한 이동은 이주민의 운명이었다. 서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언젠가 정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나로 기꺼이 도시 유랑민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낯선 도시에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의 집에 얹혀살거나 판자촌에서 하숙하면서 몇 달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다. 역설적이게도 언제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언젠가 정주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생존한다는 것


그러나 김승옥의 소설 <역사>와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에서 볼 수 있던, 판잣집과 하숙집 골방에서 시름시름 앓던 청년들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도시 난민에 가까웠던 이주민들이 경제 성장의 세례를 받게 되자, 하나둘씩 판자촌을 떠나 번듯한 단독주택과 화려한 아파트의 삶을 동경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도시 빈민의 비참한 환경을 따듯한 시선으로 재현한 박태순의 <정든 땅 언덕 위> 같은 소설 대신, 증오심 가득한 철거민의 마음을 다룬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파트에서 사는 '새로운 삶'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울의 도시 경관을 변화시킨 가장 거대한 원동력은 아파트로 상징되는 새로운 거주 공간에 대한 열망이었다. 서구식 생활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은 점점 더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옮겨갔다. 강남 일대와 한강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자, 아파트는 본격적으로 중상류층의 집단적 주거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아파트는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서양식 주거문화에 대한 동경과 젊은 세대의 개방성, 지적 허영심의 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차별화된 공간이었다.


박완서의 소설 〈포말의 집〉의 여주인공은 솔직하다. “이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은 거의 개인주택을 원하지 않는다. 개인주택에 살던 시절을 지긋지긋해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좀 더 나은 생활에 대한 꿈은 더 큰 아파트 아니면 더 호화로운 아파트지 개인주택하곤 상관이 없다. 아파트라는 첨단의 주택의 주민들은 이 첨단의 주택에 지극히 만족하고 이 첨단의 주택을 사랑했다.


아파트는 많은 도시인들의 꿈이다

 

아파트의 병리학을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 최인호의 대표작 〈타인의 방〉은 시종일관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묘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는 가족 구성과, 몇 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사내와 여인이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나는 복도식 아파트의 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집에 들어와 코트, 넥타이, 와이셔츠를 벗는 아파트 생활자는 안방과 마루 대신 새롭게 “침실”과 “거실”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공간을 오간다. 아파트에는 “문 앞에 프레스라고 쓰인 신문 투입구”도 있고, 타일 바닥이 깔린 욕조가 있는 욕실에는 “키 큰 맨드라미처럼 우울하게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는 샤워기”도 있으며, 거실에는 피곤한 몸을 뉘일 수 있는 소파가 있다. 아파트를 묘사하는 이 소설의 디테일들은 서구식 생활의 이미지를 덮어쓰고 있다.


이 시기의 소설가들은 누군가 고유성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피아노나 세탁기를 산다 해도 다른 사람이 모방 소비로 쫓아감으로써 동일화되는 패턴을 가진 아파트의 삶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박완서의 소설 〈닮은 방들〉의 주인공은 상호 모방으로 서로 닮아가는 상황에서 점점 좌절을 느끼고 탈출하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박완서의 다른 소설 〈여인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따라 해도 “나는 소원 성취한 승리감은커녕 차츰 비참한 열패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여주인공에게 아파트의 삶이 주는 열패감은 “내가 내 인생을 사는 동안 줄창 걸머져야 할 운명 같이만 여겨졌다.” 박완서 소설 속의 아파트 여성들은 성취감보다 이길 수 없는 경주에 뛰어들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경제적 부와 그것의 향유를 추구하는 욕망은 언제나 욕구 불만의 결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부르디외의 말대로 하위 계급들은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학력 자본 등 여러 상징 자본을 갖춘 상위 계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모방함으로써 계급적 구별 짓기가 낳는 차이를 따라잡고자 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박완서의 <닮은 방들>, <낙토의 아이들>, <포말의 집> 등은 아파트의 과시적이고 모방적인 삶을 비판하면서도 그 소비의 욕망을 인정하고 실현하는 여성들을 그리고 있다. 교육을 통한 계급 세습과 사회자본의 획득을 그린 이 소설들은 2019년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집, 거주 공간에서 계급 상승의 사다리로 



한국에서 아파트의 성공은 현대적 삶의 이미지를 활용한 상품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아파트는 현대성의 상징이며 상품의 물신화의 최고 정점에 있다. 서울의 최고 인기 상품인 아파트를 팔아야 하는 건설사들의 홍보 전략, 한국의 전통적 관습에서 더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취향, 생활의 편리성과 안전성 등이 결합된 결과다. 더욱이 ‘고층화’된 현대도시에 대한 선호는 고층 아파트의 인기를 더욱 가속화했다. 아파트는 한국인들이 현대적 주택에 대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효과이다. 

 

판매하는, 재산 증식의 대상으로 되어버린 집


강남 개발로 상징되는 새로운 중심의 형성은, 집을 거주와 생활의 공간이 아닌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부의 원천으로 바라보게 하는 관점의 변화를 낳았다. 지가 앙등의 신화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집에서 이전과 다른 의미의 기회를, 가능성을, 미래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저 서울에서 살고 교육을 받을 수만 있으면 자신의 자식 세대가 스스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의 시대는 지나갔다. 부동산이 계급 상승의 사다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이 말하듯, 강남에 들어선 아파트들은 새로운 낙토였다. “이곳의 땅은 시시하게 벼 포기나 감자 알맹이 따위를 번식시키진 않았다. 직접 황금을 번식시켰다. 그 황금은 그 땅을 땀 흘려 파는掘 사람의 것이 아니라 파는賣 사람의 것이었다.” 황금이 나오는 땅은 파는dig 곳도 아니고 사는live 곳이 아니며, 바야흐로 사는buy 곳이 되었다. 그 결과 서울의 집은 거주의 편리성보다 경제적 이익 산출의 관점에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욕망의 사슬, 그 중심에 있는 서울의 집



현재 한국 사회는 상당수의 국민이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도, 동시에 위장 전입과 학벌주의를 당연시하고 부동산 투기의 마인드로 집 구입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당연한 상태에 도달해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도시 공간을 공공의 자산으로 생각하기보다 소유권을 가진 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하며, 강제 철거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습득한 경제적 공간 감각에 기대어 부동산 투자와 아파트 매매를 통한 시세 차익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모든 문제들을 국가의 발전주의 정책과 식민주의적 사고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서울 정착에 성공하여 서울 사람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간 동조자이자 공범자였기 때문이다. 서울의 집은 그 욕망의 사슬 중심에 있었다. 그 욕망과 미망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현한 한국 소설들은 부모와 자식 세대의 무의식적 공범 관계를 폭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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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영
송은영

문학/문화연구자. 저서로 <서울 탄생기>, <르네상스인 김승옥>(공저), <비평 현장과 인문학 편성의 풍경들>(공저) 등이 있으며, 도시문화와 청년문화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_ⓒ송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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