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자 과학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하는데, 우울증에 걸린 주인공은 오히려 안정을 되찾는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에서는 외계 행성의 충돌로 파국의 위기에 놓인 지구를 배경으로 엇갈린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한다.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기로 다가온 행성은 공포심을 자아내면서도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파국(catastrophe)'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 영화 <멜랑콜리아>(2011년) 포스터
파국은 한동안 유행어처럼 번졌다. 파국을 주제로 한 전시도 많았고 제목에 이 단어가 들어간 책도 눈에 띄게 많았다. 영화 <멜랑콜리아>도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대재난인 파국이 이처럼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일본 대지진, 인도네시아 쓰나미, 쓰촨 대지진 등의 초대형 재난이 그런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과연 재난이라는 파국의 뒤에는 지구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집 <임박한 파국>(2012년)
재난은 우리 삶의 타자(他者)이다. 그것도 철저한 타자이다. 그것은 안전한 삶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말 그대로 우리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재앙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과 재난이야말로 진정한 타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타자를 배제할 수 없으며,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따라서 거꾸로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일찍부터 우리 바깥에 있는 낯선, 그러나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을 다루는 방법을 나름대로 발달시켜왔다. 초기에는 주술과 종교, 예술이 그런 기능을 했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침내 인간은 합리적인 예측과 체계적인 기술을 구사하는 과학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는 힘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재난은 과학으로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타자는 자연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도 우리 자신의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타자를 다루는 기술은 과학을 넘어서 미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기술로서의 디자인
어찌 보면 디자인도 그러한 타자의 기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은 낯선 것을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시각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디자인 역사가인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움을 수용하도록 만든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에는 사물을 그 본질과 다른 어떤 것으로 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1 그래서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와 전자를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형태를 통해 눈에 보이게 만들고, 디지털 기술을 컴퓨터와 휴대폰이라는 형태로 손에 잡히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현대사회의 소비주의에 봉사해온 것이다.
1 에이드리언 포티, 허보윤 옮김,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일빛, 17쪽
하지만 재난과 파국은 디자인에 전혀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디자인이 미적 기술을 넘어서 윤리적 기술일 것을 명령한다. 이제 우리는 디자인에서 미학을 넘어선 윤리학, 아니 미학과 윤리학의 만남, 현대판 선미일치(善美一致), 즉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재난은 인간에게 철저한 타자지만,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인 또한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타자의 미학인가? 타자의 윤리학인가?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 폴란드 출신의 산업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인 크지슈토프 보디츠코(Krzysztof Wodiszko)는 이방인을 위한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동유럽 이민자로서 뉴욕에 정착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외국인 지팡이(Alien Staff)>(1993)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용 도구인데, 마치 고대의 선지자처럼 이것을 들고 있는 모습이 뭔가 묵시록적이면서도 이채롭다. 이외에도 보디츠코는 <소수자를 위한 수레-연단(Vehicle-Podium)>(1977년)과 <노숙자 수레(Homeless Vehicle)>(1988) 등을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디자인을 통해 타자의 윤리학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수레-연단>(1977년)
▲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외국인 지팡이>(1993년)
보디츠코의 작업이 주로 인간-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매개시킬 것인가에 주목한다면,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ばんしげる)는 직접 난민과 이재민을 지원하는 작업을 해왔다. 종이를 재료로 한 건축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재민들을 위한 종이 칸막이 시스템(2011)을 개발했다. 그는 일찍이 르완다 내전 난민을 위한 디자인에서부터 고베, 쓰촨, 아이티 대지진 등의 각종 재난에 자신이 만든 독특한 종이 구조물을 제공해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재해 지역에도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도 제가 건축가로서 계속하고 싶은 일입니다."
▲ 반 시게루의 이재민을 위한 종이 칸막이 시스템, 동일본 대지진
반 시게루의 활동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난민들을 지원하는 사랑의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활동은 매우 숭고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디자인은 재난조차도 익숙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 아닌가. 너무 위악적인 물음일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재난이라면 우리는 그것조차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디자인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미학을 넘어선 윤리학, 아니 미학과 윤리학의 일치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디자인이 타자의 미학이자 윤리학으로서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모두 대상으로 삼는 것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디자인이 본래 자연과 기술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라는 점을 상기하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을 자주 잊게 만드는 것 또한 현대 디자인이 처해 있는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다.
재난 상황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묻다
타자의 미학인가? 타자의 윤리학인가?
최범
2018-08-06
타자(他者)로 찾아온 파국, 재난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자 과학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하는데, 우울증에 걸린 주인공은 오히려 안정을 되찾는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에서는 외계 행성의 충돌로 파국의 위기에 놓인 지구를 배경으로 엇갈린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한다. 금방이라도 부딪칠 것처럼, 어마어마한 크기로 다가온 행성은 공포심을 자아내면서도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파국(catastrophe)'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 영화 <멜랑콜리아>(2011년) 포스터
파국은 한동안 유행어처럼 번졌다. 파국을 주제로 한 전시도 많았고 제목에 이 단어가 들어간 책도 눈에 띄게 많았다. 영화 <멜랑콜리아>도 그 중 하나일 수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대재난인 파국이 이처럼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일본 대지진, 인도네시아 쓰나미, 쓰촨 대지진 등의 초대형 재난이 그런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과연 재난이라는 파국의 뒤에는 지구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집 <임박한 파국>(2012년)
재난은 우리 삶의 타자(他者)이다. 그것도 철저한 타자이다. 그것은 안전한 삶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말 그대로 우리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끔찍한 재앙이다. 그런 점에서 죽음과 재난이야말로 진정한 타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타자를 배제할 수 없으며,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따라서 거꾸로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일찍부터 우리 바깥에 있는 낯선, 그러나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을 다루는 방법을 나름대로 발달시켜왔다. 초기에는 주술과 종교, 예술이 그런 기능을 했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침내 인간은 합리적인 예측과 체계적인 기술을 구사하는 과학을 통해 자연을 통제하는 힘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재난은 과학으로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타자는 자연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도 우리 자신의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타자를 다루는 기술은 과학을 넘어서 미학과 윤리학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타자의 기술로서의 디자인
어찌 보면 디자인도 그러한 타자의 기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은 낯선 것을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시각적 기술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디자인 역사가인 에이드리언 포티(Adrian Forty)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움을 수용하도록 만든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에는 사물을 그 본질과 다른 어떤 것으로 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1 그래서 디자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와 전자를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형태를 통해 눈에 보이게 만들고, 디지털 기술을 컴퓨터와 휴대폰이라는 형태로 손에 잡히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현대사회의 소비주의에 봉사해온 것이다.
1 에이드리언 포티, 허보윤 옮김, 《욕망의 사물, 디자인의 사회사》, 일빛, 17쪽
하지만 재난과 파국은 디자인에 전혀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그것은 디자인이 미적 기술을 넘어서 윤리적 기술일 것을 명령한다. 이제 우리는 디자인에서 미학을 넘어선 윤리학, 아니 미학과 윤리학의 만남, 현대판 선미일치(善美一致), 즉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를 요청한다. 왜냐하면 재난은 인간에게 철저한 타자지만,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인 또한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타자의 미학인가? 타자의 윤리학인가?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 폴란드 출신의 산업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인 크지슈토프 보디츠코(Krzysztof Wodiszko)는 이방인을 위한 일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동유럽 이민자로서 뉴욕에 정착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외국인 지팡이(Alien Staff)>(1993)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용 도구인데, 마치 고대의 선지자처럼 이것을 들고 있는 모습이 뭔가 묵시록적이면서도 이채롭다. 이외에도 보디츠코는 <소수자를 위한 수레-연단(Vehicle-Podium)>(1977년)과 <노숙자 수레(Homeless Vehicle)>(1988) 등을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디자인을 통해 타자의 윤리학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수레-연단>(1977년)
▲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외국인 지팡이>(1993년)
보디츠코의 작업이 주로 인간-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매개시킬 것인가에 주목한다면,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ばんしげる)는 직접 난민과 이재민을 지원하는 작업을 해왔다. 종이를 재료로 한 건축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재민들을 위한 종이 칸막이 시스템(2011)을 개발했다. 그는 일찍이 르완다 내전 난민을 위한 디자인에서부터 고베, 쓰촨, 아이티 대지진 등의 각종 재난에 자신이 만든 독특한 종이 구조물을 제공해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재해 지역에도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도 제가 건축가로서 계속하고 싶은 일입니다."
▲ 반 시게루의 이재민을 위한 종이 칸막이 시스템, 동일본 대지진
반 시게루의 활동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난민들을 지원하는 사랑의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의 활동은 매우 숭고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디자인은 재난조차도 익숙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 아닌가. 너무 위악적인 물음일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재난이라면 우리는 그것조차도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디자인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미학을 넘어선 윤리학, 아니 미학과 윤리학의 일치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디자인이 타자의 미학이자 윤리학으로서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모두 대상으로 삼는 것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사실 디자인이 본래 자연과 기술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라는 점을 상기하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을 자주 잊게 만드는 것 또한 현대 디자인이 처해 있는 상황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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