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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공간, 예측 불가능한 매력

덕수궁 돌담길 정동을 중심으로

조한

2018-07-30


좋은 연애의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사랑 예찬(Éloge de l'Amour(2009), In Praise of Love(2012)』을 출간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유(Alain Badou, 1937~)는 사랑을 정치, 수학, 예술과 함께 철학의 4가지 조건 중 하나라고 했다. 바디유에 의하면 철학의 목적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러한 진리는 바로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통해서만 사유가 가능하다. 아울러 이러한 사건을 발생시키는 4가지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예측 불가능한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예측 불가능한 철학의 조건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있을까? 어마어마한 정치적 사건들과 문학적 사건, 그리고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나 있긴 하다.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 있는 정동(貞洞)이다.



장소 1. 정릉(貞陵)에서 유래된 정동

태조 이성계의 못다한 사랑


정동이라는 이름은 애절한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1396) 강씨의 능묘인 정릉(貞陵)이 이곳에 자리 잡은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당시 왕비와 사이가 각별했던 태조 이성계는 도성 안에 능묘를 둘 수 없다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왕비의 능묘를 조성하게 했다. 바로 옆에는 함께 묻힐 자신의 수릉(壽陵)도 미리 마련해놨다.


또한 불심이 깊었던 왕비를 위해 정릉 동쪽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흥천사(興天寺)도 세웠다. 태조 이성계는 왕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침소에 들었고, 왕비의 명복을 비는 목탁 소리를 들은 후에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처인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 한씨의 소생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두 아들인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정릉은 도성 밖 양주 사한리(지금의 성북구 정릉동)로 쫓겨났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와 죽어서도 같이 사랑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정릉

▲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 ⓒ문화재청



장소 2. 연애당이 된 정동교회

휘장으로 나누어진 배재학당·이화학당 학생들


태조 이성계의 사랑으로 시작된 정동에는 사랑의 공간이 참 많다. 정동 중앙에 우뚝 솟은 붉은 벽돌의 정동교회도 그런 공간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은 1885년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가 처음에는 한옥으로 세웠는데, 1897년에 이르러 벽돌 건물이 그 자리에 서게 됐다. 예배당을 사이에 두고 왼쪽 언덕 위에는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학교이자 중등교육 기관인 배재학당(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서울시 기념물 16호)이 있다. 오른쪽에는 1886년 감리교회 해외여성선교회의 선교사인 메리 스크렌튼(Mary Scranton, 1832~1909)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현 심슨 기념관, 등록문화제 3호)이 자리 잡았다.


정동교회

▲ 정동교회 ⓒ문화재청


두 학교 모두 기독교 학교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정동교회를 찾았고, 당시 남녀 구분이 유별한 조선의 풍습을 감안하여 예배당 가운데에는 휘장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남쪽 문으로는 배재학당 남학생들과 남자 신도들이 들어와 왼쪽에 앉고, 북쪽 문으로는 이화학당 여학생들과 여자 신도들은 들어와 오른쪽에 앉았다. 비록 휘장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한 지붕 아래 남녀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오히려 휘장 때문에 서로가 보이지 않았는데,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더 가슴이 뛰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런 설렘을 적은 수많은 연애편지가 휘장 위로 넘나들었고, 그런 이유로 벧엘예배당은 ‘연애당(戀愛堂)’으로 불렸다. 1890년에 들어서는 최초의 신식 결혼이 열렸고, 1899년 7월 14일에 열린 배재학당 남학생과 이화학당 여학생 두 쌍의 합동결혼식이 장안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소 3. 아관파천의 현장, 구 러시아 공사관

문 하나로 연결된 고종과 엄비


정동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은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의 현장으로서,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과 엄비(순헌황귀비, 영친왕의 어머니) 두 사람에게는 부부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왕이 왕비의 처소를 찾는 것은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왕의 처소였던 경복궁 강녕전에서 왕비의 처소인 교태전까지는 무려 100m에 달하는 거리였고, 실내가 아닌 야외 공간을 거쳐 가야만 했다.


하지만 구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이 있던 방과 엄비의 방은 채 몇 미터도 되지 않았다. 물론 세자와 같이 방을 사용했던 고종에게 지금의 안방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바로 문을 열면 사랑하는 이가 지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감이 더 각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 문 하나가 왕과 왕비라는 이름을 내려두고, 서로를 남편과 아내의 애틋한 마음을 보탤 수 있던 매개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구러시아공사관

▲ 구 러시아 공사관 ⓒ문화재청



장소 4. 영성문 언덕길에서 사랑을 속삭이다

울창한 돌담 속 젊은 연인들


덕수궁 돌담길이 연애의 길로 불렸던 최초의 문헌적 근거는 아마도 정비석의 1954년 소설 『자유부인』일 것이다. 대학교수 부인의 일탈과 애정행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자유부인』은 서울신문에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연재되어 매회 신문이 매진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사회적 도덕관념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섰다. 연재 후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어 14만 부나 팔린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다.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왔다. 영성문 언덕길은, 한편에는 유서 깊은 덕수궁의 돌담이 드높이 싸여있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영사관 지금의 대사관 돌담이 높다랗게 막힌데다가, 좌우편 담 안엔 수목들이 담장 밖에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서, 영성문 언덕길은 마치 자연의 터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영성문 언덕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물정(物情)도 바뀌는 법인지, 오늘의 영성문 고개서는 이미 옛날의 그윽하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 소설 『자유부인』 내용 中에서

 

20대 젊은이들이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는 위 내용에서 추정컨대, 1930~1940년대에 덕수궁 돌담길에 많은 젊은 연인들이 몰려들었던 것 같다. 양쪽으로 높은 돌담이 늘어서 있고, 돌담 위로 넘어온 울창한 나무들이 마치 터널 같은 느낌을 만들어낸다는 소설의 묘사는 지금의 언덕길과 많이 다르지 않다. 원래 영성문은 덕수궁의 북문으로, 영성문 고갯길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0년 일제에 의해서다.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던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일제에 의해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하고 고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덕수궁에 거처를 정하게 된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덕수궁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일제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다음 해 덕수궁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뚫으면서 영성문을 헐어버리고 잘려나간 북서쪽의 넓은 땅 역시 팔아버렸다. 그렇게 정치적 이유로 만들어진 영성문 고갯길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언덕길이 되면서 수많은 이들의 연애의 공간이 된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

▲ 덕수궁 돌담길



다시, 예측 불가능한 연애의 공간


그렇다면 도대체 좋은 연애의 공간이 되는 기본 조건은 무엇일까? 정동을 가로지른 연애의 공간들을 잘 살펴보면 바디유 철학의 조건들처럼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들이라는 점이다. ‘남녀유별’의 관습과 새로운 문물의 충돌이 만들어낸 흰 장막은 건너편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하나에 연애를 상상하게 만들고, 을미사변이라는 안타까운 사건이 만들어낸 아관파천은 문 하나를 사이로 한 나라의 왕과 왕비를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 또한 망국의 가슴 아픈 사건들 때문에 잘려지고 비워진 공간은 끊임없는 사랑으로 이어지고 채워지는 사랑의 언덕길이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 데이트하기 좋은 연애의 공간을 찾는 것은 매번 큰 고민거리이다. 쇼핑도 하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멋진 것도 보고 싶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조건은 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우리는 진정으로 예측 불가능한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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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조한
조한

1969년 북한산 아래 미아동에서 태어났다. 10대는 강남개발의 중심인 압구정동에서, 20대는 젊은 예술의 메카 홍대와 미국의 예일대학교에서, 30대는 시카고에서 건축가라는 꿈을 찾았다. 40대에는 다시 홍대에 자리 잡았다. ‘장소의 기억’과 ‘시간의 감동’은 항상 공부의 대상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지난 2013년에는 서울에서 보낸 시간의 단면을 담아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돌베개)』를 출간하였다. 현재 ‘생태/생성 건축철학 연구소’의 대표이자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서, 건축·철학·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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