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교수 마누 프라카시는 색다른 물건을 공개합니다. 종이로 만든 현미경이죠. 프라카시 교수의 원래 전공은 생물공학입니다. 굳이 현미경을 만들 이유는 없었지요.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원래의 전공이 아닌 일을 합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선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말라리아로 죽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이들을 치료해야 하는 병원이나 진료소도 마찬가지로 가난합니다. 선진국의 원조를 받기도 하지만 말라리아 원충을 검사할 현미경이 턱없이 모자라지요.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말라리아 원충을 검사할 수 있는 종이 현미경을 개발하고, 그 제작법과 사용법을 인터넷과 유튜브에 올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들이 만든 현미경에 뭔가 아주 새로운 기술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또 이들이 아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아닙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전문적 지식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절대 이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프라카시와 그의 동료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지요.
이런 기술을 ‘적정기술’이라고 합니다. 아주 첨단을 달리는, 그래서 무지막지한 연구비가 필요한 기술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기본 토대 위에 인간을 위한,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간편하고 유용하며, 가격이 싼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이지요. 종이 현미경을 만들었던 프라카시는 작년에 실 팽이를 응용한 ‘페이퍼퓨지’라는 원심분리기를 만들었습니다. 전기가 필요 없는 이 원심분리기는 단돈 2센트면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리아 원충을 찾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프라카시와 그 동료들 덕분에 아프리카의 가난한 진료소는 환자의 혈액을 원심분리하고, 이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프라카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3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겐 커피 한 잔보다 싼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이윤 그 이상의 가치
기업으로서는 전혀 만들 가치가 없는 상품이었을 겁니다. 기존 현미경 가격의 1천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싸구려 제품입니다. 기존 상품보다 천 배가 넘는 물량을 팔아야 겨우 같은 매출이 나지만 수익은 더 악화되겠지요. 더구나 아주 쉽게 만들 수 있으니 개발해도 다른 이들이 금방 보고 따라 만들 수 있어 경쟁은 더 치열할 것입니다.
원심분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달러가 넘는 가격의 원심분리기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 연구소와 대학, 기업들이 있는데,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200원짜리 원심분리기를 만들 이유가 없지요.
언제부터인가 과학기술은 고도로 기술이 축약된 비싼 장비와 고급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그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비싼 제품을 구매합니다. 100만 원을 넘나드는 고급 스마트폰, 양문형 냉장고와 드럼형 세탁기는 우리의 삶을 보다 스마트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혜택마저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터넷에 연결되지 못한 인류가 전체의 절반이고, 개인용 PC를 가지지 못한 이들도 숱합니다. 정수기는커녕 마실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전염병과 오염물질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지요. 현재의 과학기술은 기업과 시장 그리고 이윤과 너무나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어 소외된 이들에게 응당 돌아가야 할 몫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보면 전혀 입장이 달라집니다. 1,000원짜리 현미경 하나, 200원짜리 원심분리기 하나가 말라리아로 죽어갈 목숨 하나를 살리는 것이지요. 과학기술이 만든 새로운 혁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대라는 말이 있지요. 특정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 행동이나 뜻을 함께하는 것이라 합니다. 연대라고 하면 같이 집회를 열거나 시위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요사이는 해시태그를 통해서 서로 뜻을 같이하기도 합니다. 미투운동(#MeToo)이나 위드유운동(#WithYou)이 대표적이지요. 그러나 연대에는 그 말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또 과학기술이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바로 적정기술과 같은 것이지요. 21세기까지 과학이 쌓아 올린 놀라운 성과들은 과학자들만의 노력의 결과는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가 그들을 뒷받침했고, 거기에는 정작 과학기술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의 피와 땀이 있는 거지요. 한편으론 이런 가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경제적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프라카시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윤을 뛰어넘는 과학적 연대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과학이 만들어 낸 놀라운 변화의 뒤편에서 삶의 기본적 토대조차 허물어지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다양한 연대가 더욱 절실한 이유입니다.
적정기술처럼 가난한 이를 위한 기술적 혁신도 지속하여야 하며, 이러한 적정기술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정기술을 연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하며, 시민 모두가 그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도록 다양한 차원의 홍보도 필요하겠지요. 과학기술의 혜택이 모든 시민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과학자에게만 향하는 건 물론 아닐 것입니다. 과학정책을 수립하는 공무원들과 과학 전문 기자들, 그리고 저 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와 시민단체의 역할도 당연히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분명히 있지요.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성을 가기 위한 신기술이나 세계 최초라는 딱지 혹은 몇십조 원의 매출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과학기술일 수 있습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과학을 공부하고 쓰고 말한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과학문화위원회 회원이다.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멸종 생명진화의 끝과 시작』 『짝짓기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경계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등을 썼다. '인문학을 위한 자연과학 강의' '생명진화의 다섯 가지 테마' '과학사 강의'의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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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커피 한 잔보다 싼 과학기술
이윤을 뛰어넘는 연대가 필요하다.
박재용
2018-04-16
단돈 2센트의 기술
2012년 미국 스탠퍼드대학 교수 마누 프라카시는 색다른 물건을 공개합니다. 종이로 만든 현미경이죠. 프라카시 교수의 원래 전공은 생물공학입니다. 굳이 현미경을 만들 이유는 없었지요.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원래의 전공이 아닌 일을 합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선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말라리아로 죽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이들을 치료해야 하는 병원이나 진료소도 마찬가지로 가난합니다. 선진국의 원조를 받기도 하지만 말라리아 원충을 검사할 현미경이 턱없이 모자라지요. 그래서 동료들과 함께 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말라리아 원충을 검사할 수 있는 종이 현미경을 개발하고, 그 제작법과 사용법을 인터넷과 유튜브에 올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들이 만든 현미경에 뭔가 아주 새로운 기술이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또 이들이 아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아닙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전문적 지식과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절대 이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프라카시와 그의 동료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지요.
▲ 종이 현미경을 발명한 마누 프라카시 ©Courtesy of Prakash Lab at Stanford University
이런 기술을 ‘적정기술’이라고 합니다. 아주 첨단을 달리는, 그래서 무지막지한 연구비가 필요한 기술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기본 토대 위에 인간을 위한,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간편하고 유용하며, 가격이 싼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이지요. 종이 현미경을 만들었던 프라카시는 작년에 실 팽이를 응용한 ‘페이퍼퓨지’라는 원심분리기를 만들었습니다. 전기가 필요 없는 이 원심분리기는 단돈 2센트면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라리아 원충을 찾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프라카시와 그 동료들 덕분에 아프리카의 가난한 진료소는 환자의 혈액을 원심분리하고, 이를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프라카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3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겐 커피 한 잔보다 싼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이윤 그 이상의 가치
기업으로서는 전혀 만들 가치가 없는 상품이었을 겁니다. 기존 현미경 가격의 1천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싸구려 제품입니다. 기존 상품보다 천 배가 넘는 물량을 팔아야 겨우 같은 매출이 나지만 수익은 더 악화되겠지요. 더구나 아주 쉽게 만들 수 있으니 개발해도 다른 이들이 금방 보고 따라 만들 수 있어 경쟁은 더 치열할 것입니다.
원심분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달러가 넘는 가격의 원심분리기에도 기꺼이 지갑을 열 연구소와 대학, 기업들이 있는데,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200원짜리 원심분리기를 만들 이유가 없지요.
▲ 종이 원심 분리기 ‘페이퍼퓨지’ ©Courtesy of Prakash Lab at Stanford University
언제부터인가 과학기술은 고도로 기술이 축약된 비싼 장비와 고급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그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비싼 제품을 구매합니다. 100만 원을 넘나드는 고급 스마트폰, 양문형 냉장고와 드럼형 세탁기는 우리의 삶을 보다 스마트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과학기술의 혜택마저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터넷에 연결되지 못한 인류가 전체의 절반이고, 개인용 PC를 가지지 못한 이들도 숱합니다. 정수기는커녕 마실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전염병과 오염물질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지요. 현재의 과학기술은 기업과 시장 그리고 이윤과 너무나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어 소외된 이들에게 응당 돌아가야 할 몫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보면 전혀 입장이 달라집니다. 1,000원짜리 현미경 하나, 200원짜리 원심분리기 하나가 말라리아로 죽어갈 목숨 하나를 살리는 것이지요. 과학기술이 만든 새로운 혁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 ©Courtesy of Prakash Lab at Stanford University
혁신과 변화 뒤편의 연대
연대라는 말이 있지요. 특정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 행동이나 뜻을 함께하는 것이라 합니다. 연대라고 하면 같이 집회를 열거나 시위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고, 요사이는 해시태그를 통해서 서로 뜻을 같이하기도 합니다. 미투운동(#MeToo)이나 위드유운동(#WithYou)이 대표적이지요. 그러나 연대에는 그 말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또 과학기술이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바로 적정기술과 같은 것이지요. 21세기까지 과학이 쌓아 올린 놀라운 성과들은 과학자들만의 노력의 결과는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국가가 그들을 뒷받침했고, 거기에는 정작 과학기술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의 피와 땀이 있는 거지요. 한편으론 이런 가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경제적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프라카시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윤을 뛰어넘는 과학적 연대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과학이 만들어 낸 놀라운 변화의 뒤편에서 삶의 기본적 토대조차 허물어지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다양한 연대가 더욱 절실한 이유입니다.
적정기술처럼 가난한 이를 위한 기술적 혁신도 지속하여야 하며, 이러한 적정기술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도록 법적 장치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정기술을 연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하며, 시민 모두가 그 필요성을 공감할 수 있도록 다양한 차원의 홍보도 필요하겠지요. 과학기술의 혜택이 모든 시민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과학자에게만 향하는 건 물론 아닐 것입니다. 과학정책을 수립하는 공무원들과 과학 전문 기자들, 그리고 저 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와 시민단체의 역할도 당연히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과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 또한 분명히 있지요.
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성을 가기 위한 신기술이나 세계 최초라는 딱지 혹은 몇십조 원의 매출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과학기술일 수 있습니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과학을 공부하고 쓰고 말한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과학문화위원회 회원이다.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멸종 생명진화의 끝과 시작』 『짝짓기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경계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등을 썼다. '인문학을 위한 자연과학 강의' '생명진화의 다섯 가지 테마' '과학사 강의'의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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