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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대를 넘어

제주 4·3 70년, 침묵과 금기의 역사

박문국

2018-04-02

동백꽃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에 핀다. 초목이 눈발에 가려 자취를 감출 때 홀로 찬란히 피어 어슬한 시간을 버틴다. 선비의 절개를 형상화한 듯한 그 모습은 봄의 따스함을 기다리는 다른 꽃들과는 차별화되는 고상함을 풍긴다. 한편 동백꽃은 지는 모습도 독특하다. 한 잎 한 잎 떨어지며 천천히 시들어가는 꽃들과는 달리, 동백꽃은 가장 싱싱할 때, 그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꽃봉오리째로 뚝 떨어진다. 생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동백꽃의 꽃잎은 하늘을 바라본다.


이 동백꽃은 제주도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순히 제주도가 동백꽃의 명소여서만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70년 전, 가장 일찍 피었다 봉오리째 떨어진 역사가 제주에 있다.


빨갱이 섬의 오명


제주도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오랜 기간 독립된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고려 때 한반도 정권에 복속된 이후로는 독특한 자연환경에 기인한 특산품의 생산지로써 기능하였는데, 지형 대부분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질적 특성 탓에 논농사는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오랜 기간 굶주림과 공납을 재촉하는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려왔고 국가 전체가 흔들리는 혼란기 때는 육지 이상의 고난에 직면하곤 했다. 여말선초에 있었던 목호의 난, 구한말의 신축민란(이재수의 난)이 제주도에서 발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비극의 역사는 해방정국 때도 반복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광복 직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과 북을 점령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좌우익의 이념 갈등이 극대화된 시기이다. 특히 남한에서는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양측의 테러 및 시위가 빈번했는데, 미 군정은 혼란을 막고 좌익의 세력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치안력 강화에 집중했다. 문제는 효율성만을 고려해 과거 한반도의 치안을 담당했던 친일 경찰을 그대로 등용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미 군정의 비호를 받아 과거의 강압적 통치를 반복했고 이에 따른 민중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행사 직후 발생한 제주도민과 경찰의 충돌은 이러한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경찰의 발포로 인해 6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경무국장 조병옥은 경찰의 과잉대응을 인정치 않고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며 강경한 탄압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제주도의 고위관리가 극우 인사로 교체되고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단체가 경찰력으로 충원되었다. 이들은 1년간 약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을 검거하고 고문을 일삼았는데 대부분 무고하게 좌익으로 몰려 잡혀 들어간 일반인이었다.


<3.1 대시위> 강요배 화백

 

▲ <3.1 대시위>  강요배 화백(출처=4.3미술제 홈페이지)


물론 이때 검거된 모든 사람이 무고한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의 간부급 인사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검거되는 지도부가 늘어날수록 제주 남로당의 기조는 모험주의로 흘러갔고 이들은 5.10 총 선거를 반대한다는 명목 아래 무장봉기를 계획하게 된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책 김달삼 주도로 약 350명의 남로당원이 경찰서와 우익인사들의 가옥을 습격한다. 제주도를 침묵의 섬으로 바꾼 제주 4·3사건의 시작이다.


초토화 작전


4월 3일 당일 남로당 무장대의 공격으로 인해 12명의 경찰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제주 4·3사건의 방아쇠를 당긴 건 분명 좌익세력이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키운 건 우익 진영의 대응이었다. 이들은 무장대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목표의식이 전무했다. 일례로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의 노력으로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서북청년단이 중심이 된 극우 집단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조작하여 협상 자체를 무산시킨 바 있다. 설상가상으로 김익렬이 좌익분좌로 몰려 해임된 뒤 후임으로 부임한 송요찬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통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조선일보』, 1948년 10월 20일 기사


미 군정 문서는 이에 대해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군 내부에서는 ‘초토화 작전’이라 지칭되곤 했는데, 그 말은 곧 제주도 내 모든 도민을 폭도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침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제주 4·3사건의 혼란으로 제주지역의 5.10총 선거가 보이콧된 것에 대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이라는 완전무결한 정통성에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제주 4·3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자유 진영의 방파제라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미국에게 증명하고자 했다. 즉 제주도민을 국민이 아닌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리품과 같이 취급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948년 10월부터 3월까지 약 5개월 간 토벌대에 의한 집중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한라산에 숨어들어 간 무장대와 민간인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중간지대에 살던 주민들을 해안으로 분산시켰는데, 미처 중간지대를 떠나지 못한 노인이나 어린이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발견 즉시 사살당했다. 마을은 모두 불태워져 지금까지도 그 흔적은 한라산 중간지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 사람들진압작전을 계획 중인 미군 대위와 경비대 장교

▲ (좌)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 사람들, (우)진압작전을 계획 중인 미군 대위와 경비대 장교 ⓒ미 국립기록문서관리청

 


다랑쉬굴은 이러한 아픔을 간직한 대표적인 장소이다. 중간지대에 살던 주민 중 일부가 토벌대와 무장대를 피해 다랑쉬 오름의 한 굴에 피신해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토벌대가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질식사시킨 것이다. 희생자 중에는 9살의 어린 아이도 있었다.


해안지역이라고 안전한 건 아니었다. 북촌리에서 자행된 학살 사건이 대표적인 예인데, 무장대의 습격을 받은 토벌대가 북촌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집합시킨 뒤 화풀이 삼아 무자비하게 사격을 가한 것이다.


"사람들이 동요해 흩어지기 시작하자, 군인들이 사람들 머리 위로 총을 난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댓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중엔 한 부인도 있었는데, 업혀 있던 아기가 그 죽은 어머니 위에 엎어져 젖을 빨더군요. 그날 그곳에 있었던 북촌리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겁니다."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 김석보 씨의 증언


학살의 주체는 토벌대만이 아니었다. 산속에 숨어든 무장대 또한 밤마다 몰래 해안지대로 내려와 인민재판을 벌였다. 토벌대에 협력하는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은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해야만 했다. 5개월간의 집중적 학살 이후로도 이데올로기 대비에 따른 양방향으로부터의 폭력은 제주도민의 삶을 지배했다.


침묵의 시대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중략)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 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 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중에서


제주 4·3사건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에야 종식된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수만 약 14,000여 명으로 이 중 80%는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조사되지 않은 피해자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 속 화자의 탄식처럼 제주도민들은 진실을 고발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제주 4·19혁명으로 몰락한 뒤 진상규명의 움직임이 있기는 했으나 이듬해 발생한 제주 5·16군사정변은 제주도민들의 목소리를 원천 차단했으며 강력한 반공 정책을 이어간 박정희 또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논의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소설가 현기영만 하더라도 1978년 '순이삼촌'을 발표한 직후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강요배 화백 <젖먹이>현기영 소설 <순이 삼촌>

▲ 제주 4·3사건을 알린 예술작품들. (좌) 강요배 화백 <젖먹이>(출처=4.3미술제 홈페이지), (우)현기영 소설 <순이 삼촌>

 

1987년의 민주화 이후에도 제주 4·3사건은 오랫동안 외면받아왔다. 이미 1980년 개헌 때 연좌제가 금지되었으나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 4·3 유족들에 대한 감시는 암암리에 이루어졌고, 문민정부가 야심차게 시행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 당시에도 4·3사건은 등한시되었다. 4·3사건을 다룬 조성봉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헌트>가 1996년 국가보안법에 의해 이적표현물로 지정된 것은 당대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제주 4·3사건 70주년인 현재, 이전 시대의 침묵에 비한다면 제주 4·3사건에 대한 처우는 분명 나아졌다. 충분하다 볼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 권력이 침묵을 강요하는 권위적 국가의 악습은 상당부분 없어지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변화는 수많은 항쟁과 민주화 운동의 결과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은 분명 제주 4·3사건이었다. 가장 추운 시절 피는 동백꽃처럼, 제주도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해방정국의 부조리에 대해 항의했다. 그들은 잘못된 것에 대해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시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의식이 부재한 야만적인 시대와 위정자들이 제주도민을 매도하고 학살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제주 4·3사건은 제주도만이 기억하는, 혹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해도 되는 성격의 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역사이다. 이것은 시민 사회의 유산을 물려 받은 우리의 의무이다. 이념의 대립 아래 불러온 비극이 재현되지 않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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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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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사진 이미지

우**

2018-05-03

글 잘 읽었습니다. 어디서 뭘하고 지내시나 무척 궁금했습니다. 팟캐스트 잘 들었습니다. 요즘도 가끔 지난 방송 듣곤합니다. 잠깐 쉬었다 오신다더니 소식이 없어 궁금했습니다. 이제 팟캐스트 방송 안하실껀가요? 아무튼 여러사람들에게 많은 역사이야기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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