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에는 ‘여행 온도계’가 하나 있다. 일상에 지칠 때나 일 중독에 빠질 때마다 온도가 올라간다.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더욱 급속도로 올라간다. 체온이 급속도로 올라가면서 심한 감기몸살을 앓는 것처럼, 마음속 여행 온도계의 눈금이 쭉쭉 올라가서 39도쯤이 되면 나는 항복하고 만다. 인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그럴 때를 대비하여 마음속에는 ‘언젠가 꼭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가 준비되어 있으면 매우 요긴하다. 어디든 좋다. 이 끔찍한 일상의 반복적 리듬을 상큼하게 깨뜨려줄 수 있는 곳이라면.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일상의 그 무엇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소심한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곳이라면. 조금은 지루하고 아주 많이 권태로워져 버린 내 삶에 싱그러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러나 변화가 항상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변화 속에는 항상 그 새로움의 설렘만큼이나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행에도 사고나 질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새로운 만남에도 상처와 이별의 위험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 우리가 꿈꾸는 모든 변화 속에는 그 가슴 떨림만큼이나 커다란 위험과 공포가 스며들어 있다. 사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두렵다. 혹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사고나 질병 같은 불운이 닥치면 어떡하나, 무척 걱정스러워서 떠나기 전날에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마음속 여행 온도계는 매번 시끄럽게 알람을 울려댄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인다. 사고가 무서워서, 질병이 두려워서, 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종류의 불운이 두려워서 피하기만 한다면, 도대체 뭘 새로 시작할 수 있겠냐고. 매번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만, 나는 어김없이 짐을 싸고, 용기를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구체적인 계획 없이 훌쩍 떠나기도 한다.
여행에 숨겨진 변화무쌍한 인생의 기쁨을 더욱 눈부시게 누리는 비법은 너무 많은 계획을 짜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행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조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3박 4일 안에 열 군데를 둘러봐야지’라는 식의 무리한 계획은 여행의 기쁨을 심각한 이동의 중노동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여행 초보자 시절 나는 숙소예약이나 기차예약은 물론 그날그날 가야 할 구체적인 장소들까지 거의 철저히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는 비행기와 오는 비행기, 그리고 첫날과 마지막 날 숙소만 잡아 두고 그 가운데는 텅 빈 스케줄로 남겨두는 무한자유여행을 선택한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훌쩍 내리기도 하고, 이곳이 너무 멋져서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숙소예약을 취소하고 한곳에 하루 이틀 더 머무르기도 한다. 내 마음이 더 자유로워지면 왕복티켓이 아니라 편도티켓을 끊어두고 도대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나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로 그런 계획 없고 대책조차 없는 여행이야말로 ‘훌쩍 떠난다’는 변화의 기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행이 아닐까.
새로운 공간에서 나를 성장시키다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변화 중 하나는 ‘이사’다. 공간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동 패턴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 첫 번째 원룸은 이십 대 후반에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비록 창문도 A4용지 한 장 크기로밖에 열리지 않고,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거의 모든 가구와 집기들이 보일 만큼 수납공간도 거의 없었지만, 나의 첫 번째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서는 완벽했다. 그 장소가 어떤 모습이고, 얼마나 넓고, 얼마나 편리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내가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홀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상황이 열악해도, 장소가 아름답지 않아도, 그 장소에 내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곳은 어떤 여행지보다 아름다운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이사를 할 때마다,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은 서서히 변했다. 여행이 일상을 벗어나는 탈주의 모험이라면, 이사는 일상 자체를 새로운 모험으로 만드는 마음의 실험이 될 수 있다. 이제 나는 다섯 번째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사를 떠날 때마다 조금 더 성장하고, 세상 물정을 배우며, 점점 또 다른 나로 변신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집에서 원고를 쓰는 일이 많다 보니 점점 더 일과 휴식의 분리가 되지 않아 휴일에도 밤을 새워 일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휴식의 공간, 집과 노동의 공간, 작업실을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비용도 꽤 드는 일이었지만, 작업실이 생기자 노동의 능률이 엄청나게 올라간 것은 물론 일상 속의 기분 전환도 훨씬 쉬워졌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노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노동의 공간과 휴식의 공간을 확실히 분리하고 나니, 그 엄청난 변화가 내 삶을 더욱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꾸고 있음을 매일 느낄 수 있었다. 몸의 건강도 좋아졌고, 마음의 건강은 더 좋아졌다. 변화는 늘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변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깨달음과 가치는 상상을 뛰어넘곤 한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하면서, 또는 잠깐씩이라도 일상의 규칙적인 장소를 벗어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변화의 싱그러움을, 변화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변화]마음을 뒤흔드는, 변화가 필요한 시간
새로운 자극이 되는 곳으로의 여행
정여울
2018-03-29
내 마음속에는 ‘여행 온도계’가 하나 있다. 일상에 지칠 때나 일 중독에 빠질 때마다 온도가 올라간다.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더욱 급속도로 올라간다. 체온이 급속도로 올라가면서 심한 감기몸살을 앓는 것처럼, 마음속 여행 온도계의 눈금이 쭉쭉 올라가서 39도쯤이 되면 나는 항복하고 만다. 인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그럴 때를 대비하여 마음속에는 ‘언젠가 꼭 가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가 준비되어 있으면 매우 요긴하다. 어디든 좋다. 이 끔찍한 일상의 반복적 리듬을 상큼하게 깨뜨려줄 수 있는 곳이라면.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일상의 그 무엇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소심한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곳이라면. 조금은 지루하고 아주 많이 권태로워져 버린 내 삶에 싱그러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러나 변화가 항상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변화 속에는 항상 그 새로움의 설렘만큼이나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여행에도 사고나 질병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새로운 만남에도 상처와 이별의 위험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 우리가 꿈꾸는 모든 변화 속에는 그 가슴 떨림만큼이나 커다란 위험과 공포가 스며들어 있다. 사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두렵다. 혹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면 어떡하나, 사고나 질병 같은 불운이 닥치면 어떡하나, 무척 걱정스러워서 떠나기 전날에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마음속 여행 온도계는 매번 시끄럽게 알람을 울려댄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인다. 사고가 무서워서, 질병이 두려워서, 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종류의 불운이 두려워서 피하기만 한다면, 도대체 뭘 새로 시작할 수 있겠냐고. 매번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 두렵지만, 나는 어김없이 짐을 싸고, 용기를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구체적인 계획 없이 훌쩍 떠나기도 한다.
여행에 숨겨진 변화무쌍한 인생의 기쁨을 더욱 눈부시게 누리는 비법은 너무 많은 계획을 짜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여행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조사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3박 4일 안에 열 군데를 둘러봐야지’라는 식의 무리한 계획은 여행의 기쁨을 심각한 이동의 중노동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여행 초보자 시절 나는 숙소예약이나 기차예약은 물론 그날그날 가야 할 구체적인 장소들까지 거의 철저히 계획을 세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는 비행기와 오는 비행기, 그리고 첫날과 마지막 날 숙소만 잡아 두고 그 가운데는 텅 빈 스케줄로 남겨두는 무한자유여행을 선택한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훌쩍 내리기도 하고, 이곳이 너무 멋져서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숙소예약을 취소하고 한곳에 하루 이틀 더 머무르기도 한다. 내 마음이 더 자유로워지면 왕복티켓이 아니라 편도티켓을 끊어두고 도대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나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로 그런 계획 없고 대책조차 없는 여행이야말로 ‘훌쩍 떠난다’는 변화의 기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행이 아닐까.
새로운 공간에서 나를 성장시키다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변화 중 하나는 ‘이사’다. 공간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행동 패턴을 변화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내 첫 번째 원룸은 이십 대 후반에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비록 창문도 A4용지 한 장 크기로밖에 열리지 않고,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거의 모든 가구와 집기들이 보일 만큼 수납공간도 거의 없었지만, 나의 첫 번째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서는 완벽했다. 그 장소가 어떤 모습이고, 얼마나 넓고, 얼마나 편리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내가 부모님의 울타리를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홀로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상황이 열악해도, 장소가 아름답지 않아도, 그 장소에 내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곳은 어떤 여행지보다 아름다운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이사를 할 때마다,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은 서서히 변했다. 여행이 일상을 벗어나는 탈주의 모험이라면, 이사는 일상 자체를 새로운 모험으로 만드는 마음의 실험이 될 수 있다. 이제 나는 다섯 번째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사를 떠날 때마다 조금 더 성장하고, 세상 물정을 배우며, 점점 또 다른 나로 변신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집에서 원고를 쓰는 일이 많다 보니 점점 더 일과 휴식의 분리가 되지 않아 휴일에도 밤을 새워 일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휴식의 공간, 집과 노동의 공간, 작업실을 분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비용도 꽤 드는 일이었지만, 작업실이 생기자 노동의 능률이 엄청나게 올라간 것은 물론 일상 속의 기분 전환도 훨씬 쉬워졌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노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노동의 공간과 휴식의 공간을 확실히 분리하고 나니, 그 엄청난 변화가 내 삶을 더욱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꾸고 있음을 매일 느낄 수 있었다. 몸의 건강도 좋아졌고, 마음의 건강은 더 좋아졌다. 변화는 늘 어렵고 힘든 것이지만, 변화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깨달음과 가치는 상상을 뛰어넘곤 한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하면서, 또는 잠깐씩이라도 일상의 규칙적인 장소를 벗어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변화의 싱그러움을, 변화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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