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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반동과 변화의 이중성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을 통해 현재를 보다

박문국

2018-03-19

 

2016년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류와 기계의 관계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미 1997년 IBM에서 개발한 딥 블루가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에게 승리하며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입증한 바 있으나, 바둑은 체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변화무쌍한 게임이란 점에서 알파고의 승리가 갖는 상징성은 남다르다. 분명한 건 이제 인간만의 영역이라 확신할 수 있는 분야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계가 인간을 노동시장에서 몰아낼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더는 근거 없는 우려로 치부할 수 없다.
사실 인류는 수백 년 전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다. 이른바 산업혁명이라 지칭되는 근대의 변곡점에서 기계는 인간의 노동력을 압도하고 점차 그 자리를 잠식해갔다. 181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러다이트 운동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불안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러다이트 운동의 성격을 통해 현재의 변화, 그리고 그 대응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 공업에서 시작되었다. 존 케이의 ‘나는 북(Flying shuttle)’을 시작으로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등이 발명되었고, 에드먼드 카트라이트가 방직기를 증기기관에 연결하며 면직물 공업의 자동화가 본격화된다. 이로써 기존의 공장제 수공업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고 공장주들은 이전보다 훨씬 적은 인건비만으로도 충분한 이윤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 면직물 공장의 모습
  • 면직물 공장의 모습
  • (왼쪽)면직물 공장의 모습 ©Lewis Wickes Hine

노팅엄셔는 이러한 면직 산업의 자동화를 통해 발전한 도시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밤마다 공장의 기계를 파괴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일터를 잃은 숙련공인 이들은 기계를 인질 삼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제시했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더 많은 기계를 파괴하겠다고 협박했다.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런 일을 하냐는 질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의 지도자는 네드 러드 장군(혹은 대왕)이다.” 이후 기계파괴자들은 러드의 이름을 따 ‘러다이트’라 불리게 된다.
그렇다면 네드 러드는 누구인가? 사실 이 인물이 러다이트 운동을 이끌었다는 증거는 없다. 실존조차 불분명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1770년대에 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네드 러드라는 청년이 게으르다는 잔소리를 들은 뒤 홧김에 방직기 두 대를 파괴했고 후에 기계파괴자들이 이 일화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 되었든 노팅엄셔에서 시작된 러다이트 운동은 비슷하게 방직 산업이 발달한 요크셔, 랭커셔 등지로 확산되며 큰 호응을 얻게 된다. 그러나 기계를 이용한 산업의 자동화와 이에 따른 일자리 축소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고, 의회가 군대 개입까지 의결하여 탄압하면서 러다이트 운동은 결국 1816년을 끝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 러다이트 운동의 주모자로 알려진 네드 러드 판화(1812) / 러다이트 운동(1844)러다이트 운동의 주모자로 알려진 네드 러드 판화(1812) / 러다이트 운동(1844)

혁신의 희생자
러다이트 운동은 혁신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시대로 회귀하려는 자들의 폭동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축은 기계의 등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린 숙련공들이었고, 누리던 특권을 보상받으려는 과거의 옹호자였다. 무엇보다 그 방식이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당대 영국의 정치경제적 맥락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은 미국 독립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불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산업혁명 초기부터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게 19세기는 고통의 시기였다.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경제 악화에 따른 타격은 분명 존재했으나 생존을 위협받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여차하면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거나 해고를 통해 원가 절감을 꾀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숙련공이 하던 직무는 기계가 대신 하기에 인건비가 저렴한 미숙련공만으로도 공장을 운영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한 노동 조건을 개선할 정치적 창구가 노동자들에게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명예혁명으로 입헌군주제의 틀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당시 영국 의회는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참정권도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내는 부유한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다. 당연히 의회에서는 부유층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만이 입안되었고 노동자, 빈민들의 입장은 무시되었다. 1799년 통과된 ‘단결금지법’으로 노동조합 결성, 집단교섭, 집단행동이 완전히 금지된 건 당시 의회의 입장이 어떠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불법 폭력 행위뿐이었다. 불세출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바이런은 직접 러다이트 운동을 접한 뒤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러다이트 운동의 근본 원인이 노동자에게 있지 않음을 역설한다.

“이와 같은 절망과 그로 인한 동요에는 더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단결하여 자신들의 안락함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생계 수단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안락함과 당신들의 안락함과 모든 사람의 안락함을 파괴한 것은 바로 지난 18년 동안의 파괴적인 전쟁, 즉 참담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잊을 수 있습니까? (중략)이 사람들은 기계가 무용지물이, 아니 무용지물보다 더 나쁜 물건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기계를 결코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바이런, <기계 파괴 방지 법안에 반대하는 상원 연설> 중

 
  • 조셉 고든 바이런 조셉 고든 바이런 ©Richard Westall

그들 또한 변화의 중심이었다
바이런의 견해를 따른다면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한 기계파괴운동으로 치부될 수 없다. 오히려 기계를 소유한 자들과 그들이 구축한 구조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즉 인권으로 향하기에 그들의 저항은 근대성을 지닌다.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로 끝났음에도 이후 영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남긴다.
우선 노동자들을 폭력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몰아넣은 단결금지법이 폐지되어 노동조합이 합법으로 인정받았다. 현대 헌법에서도 인정하는 결사의 자유와 노동삼권은 러다이트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대응에서 탈피해 자신들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도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보통선거와 의회민주주의를 위한 점진적 변화의 투쟁인 차티스트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차티스트 운동 또한 뉴포트 봉기와 같이 폭력성을 보이는 사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집회 및 서명 운동이라는 평화적인 저항을 근간으로 하였다. 물론 이 역시 당대의 기득권층에게는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져 탄압받았고 끝내 무산되기는 했다. 그러나 러다이트 운동과 마찬가지로 차티스트 운동도 변화의 유산을 남겼고, 영국은 수차례의 선거법 개정 끝에 보통선거를 실현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참정의 권리는 이처럼 점진적인 변화 끝에 이뤄진 결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의 시발점인 러다이트 운동은 혁신에 대한 반동이 아닌 변화의 시작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 영국 켄싱턴 공원에서 열린 차티스트 집회(1848)영국 켄싱턴 공원에서 열린 차티스트 집회(1848)

현대의 기술 변화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과거의 기계가 인간의 육체를 대체하는 것이라면 현대의 기계는 정신을 대체한다는 점 또한 큰 차이다. 그런 의미에서 러다이트 운동의 양상을 현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래도 과거의 역사를 통해 변화에 대처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혁신에 따른 변화의 흐름은 결코 막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인류가 도구를 사용한 이래 새로운 흐름을 거부한 집단은 필연적으로 도태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기가 석기를 대체하고 기계제공업이 공장제 수공업을 대체했던 것처럼 현재의 인공지능이 기존의 산업을 대체하는 것을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변화의 과정이 일방적이어서는 곤란하다. 혁신에 따른 효율성만을 따지며 변화 과정에서 희생되는 집단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대화와 타협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절차 또한 복잡하겠으나 이것이 바로 과거의 수많은 사회운동이 남긴 유산이다. 인간을 노동시장의 도구가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한다면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러다이트 운동 중 바이런이 남긴 연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들은 이 사람들을 폭도라 부릅니다. 극단적이고 위험하며 무식하다는 거지요. 당신들은 ‘머리가 여럿 달린 이 괴물’을 조용히 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머리들을 몇 개 잘라버리는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중략)우리는 폭도들에게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습니까? 당신들의 논밭에서 노동하고, 당신들의 집안일을 보살피며, 당신들이 전 세계를 석권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이 폭도들입니다.”  
-바이런, <기계 파괴 방지 법안에 반대하는 상원 연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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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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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사진 이미지

김**

2018-03-19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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