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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축복이 아닌 저주일지라, 불멸의 매혹

홀로 변하지 않는 삶의 이면

박병성

2018-03-09

 

대중예술은 근본적으로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 모험으로 가득 찬 어드벤처물이나, 왕실의 암투와 음모가 벌어지는 사극, 강력한 힘을 지닌 영웅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히어로물이 인기 있는 대중예술인 이유기도 하다. 꼭 대중예술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더불어 소설이나 영화, 연극에서도 종종 만나는 인물이 ‘불멸의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에 종종 절망한다. 때문에 불로초를 구하려 애썼던 진시황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느 정도는 불멸을 소망한다.

불멸을 저주라 말하는 인물들
그러나 수많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불멸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불멸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받아들인다. 영화 <맨 프롬 어스>에서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10년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존 올드맨, 신을 원망한 대가로 영원의 시간을 받은 드라큘라, 시몬 드 보부아르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 세상을 정의롭게 이끌고 싶었던 군주 레몽 포스카, 그리고 연극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서 영생의 약을 마시고 오랫동안 여러 나라에서 서로 다른 이름의 유명 오페라 가수로 살아갔던 에밀리아 마르티까지 모두 그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인 ‘불멸’을 저주였다고 고백한다.

 
  • 축복이 아닌 저주일지라, 불멸의 매혹(오른쪽)©Justin Slee

이들이 불멸을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다. ‘불멸인’들은 자신이 아끼는 이들과 이별하는 고통을 평생 겪어야 한다.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마음을 나눈 친구들을 10년마다 떠났던 존 올드맨의 자발적인 이별이 아니더라도, 불멸인은 죽음을 곁에 둔 보통의 사람들을 결국 먼저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불멸을 저주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한 고통은 보통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다. 보통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떠나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새롭게 얻게 되는 사람의 기쁨으로 고통을 상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멸을 저주라고 하는 이유는 영생의 삶이 아이러니하게도 ‘무(無)’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불멸이 주는 허무
불멸의 인간들이 보이는 공통의 특징이 있다면 냉소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욕망에 무감각하고, 어떤 일에도 크게 놀라거나 절망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는 불멸하는 레몽 포스카의 냉소적인 특징이 더욱 도드라질 수 있도록 그와 상반된 인물 레진을 등장시킨다. 매력과 열정이 과도한 레진과 얼음처럼 욕망이 굳어버린 포스카는 완전히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레진은 재능 있고 열정적이며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배우이다. 그녀는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에 괴로워하며 불멸을 꿈꾼다. 그러나 정작 불멸하는 포스카는 그녀와 너무 달랐다. 레진이 처음 포스카를 발견했을 당시 그는 호텔 앞 의자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만 잤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의 에밀리아 마르티 역시 시니컬한 회의주의자다. 세상의 위대함 혹은 가치를 비웃고 “역사에 어차피 위대한 것 따위는 없다”라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불멸하는 자들은 세계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세상에 별다른 흥미를 갖지 못한다.

 
  • 고독하게 창밖을 보는 여인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사라지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곧 져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삶이 영원하다면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존재는 소멸을 통해 의미를 얻게 된다. 반면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인간들은 축복처럼 얻은 불멸로 인해 삶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원한 시간은 ‘무’와 다르지 않다. 불멸인들의 시니컬함은 그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포기하지 못하는 영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을 포기하지 못한다. 수많은 작품에서 불멸이 저주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로또 당첨자 중 대다수가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는 가십 정도로만 여긴다. 이는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경험하지 못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의 에밀리아 마르티는 불멸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얼마나 강렬한지 보여준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는 희곡 『R.U.R』에서 ‘로봇(Robot)’이라는 말을 처음 쓴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1922년에 쓴 희곡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서 불멸하는 여인 에밀리아 마르티를 창조해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엘리나 마크로풀로스. 영생을 살고 싶던 루돌프 황제는 한 연금술사에게 영생의 약을 만들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독살이 두려웠던 황제는 그 약을 연금술사의 딸에게 먼저 먹도록 했다. 딸은 곧 심한 열에 시달렸고 황제는 연금술사를 탑에 가두었다. 며칠을 앓던 딸은 곧 회복해서 영생의 약의 비법을 담은 서류를 가지고 도망쳤다. 이 딸이 바로 엘리나 마크로풀로스이다. 엘리나는 이후 이름을 바꿔가며 신분을 숨긴 채 여러 명의 오페라 가수로 살아간다.

 
  • 해골 그리고 약병

안타깝게도 영생의 약은 유효기간이 300년이었다. 엘리나는 영생의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작품은 100년간 계속되는 두 집안의 법정 다툼에 유명 오페라 가수 에밀리아 마르티가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문서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에밀리아, 즉 엘리나 마크로풀로스는 과거 연인에게 맡긴 서류를 되찾기 위해 그들의 후손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다른 불멸의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엘리나 역시 권태와 회의에 빠져 있다. “몰라. 모든 게 너무 멍청해. 공허하고, 무의미해. 당신들은 정말로 존재하는 건가? 어쩌면 실제가 아닐지도 몰라. / 뭐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마찬가지야. / 삶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인데도 예술적 기술은 그 의미를 보존하고 있어. 그저 일단 터득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지.”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점을 추궁하자 자신의 존재를 밝히며 공허한 불멸의 삶을 말하는 엘리나의 대사 부분이다. 그녀는 불멸의 삶은 공허하며 죽음을 지닌 보통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축복이라고 말한다. “우리 늙은이들이 너무 많이 안다고 했지.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훨씬 더 많이 알아. 이 바보들아. 훨씬,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사랑도, 위대함도, 목표 의식도 알잖아. 모든 걸 갖고 있잖아. 이 이상 바랄 나위가 없잖아. 여전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잖아.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감각하고, 얼어붙은 채로 계속,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해.”
엘리나 마크로풀로스의 이야기는 불멸을 다룬 다른 작품들처럼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불멸의 허망함을 깨달은 엘리나는 다시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또 다른 영원의 삶을 얻기 위해 비밀문서를 되찾으려 한다. 이 작품의 위대함은 바로 불멸의 허망함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인간은 영원을 얻으면 유한한 삶을 부러워할 줄 알면서도 신이 되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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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병성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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