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선의 관계를 맺는 일
“친구가 정말 많으시겠어요.”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주간지 특성상, 매주 취재하고 기사를 쓰다 보니 일하는 동안 만난 사람도, 친분을 쌓은 사람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핸드폰이 고장 난 후배는 수리비가 꽤 되는데도 새 핸드폰을 사는 대신 수리를 맡겼다는 말이 생각난다. “제가 다른 데이터는 다 백업해 놨는데, 연락처 저장을 안 해놨더라고요.” 그보다 연차가 오래된 나는 연락처 백업을 안 해두면 당장 일하는 데 큰일 나겠다 싶어 정신이 번쩍 든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연락처함이 핸드폰 용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친구 많으시겠어요”라는 물음에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 막상 누군가에게 일없이 전화하려고 연락처를 훑어보면, 한 줌도 안 되는 리스트가 남을 것이다.
마음이 맞고 코드가 통하면 금세 친구가 되던 어린 시절과 달리, 나이가 점점 들수록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절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무턱대고 호감만 가지고 누군가를 대하기에는, 상대에게 귀찮은 존재로 오인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모두가 각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커다란 이유일 것이고, 그래서 적정선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길 서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엔 일 끝나면 어떻게든 놀러 가려고 했는데 요즘은 피곤해서 곧장 집으로 간다”고 하는 지인의 말을 들으니, 그건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도 줄고,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나 친밀감도 그만큼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노아 바움백 감독의 <위아영> 만한 영화가 없지 싶다. 요약하자면, 뉴욕에 사는 40대 중년 남자가 20대 청년 친구를 만나 겪는 일종의 난항을 그린 이야기다. 뉴욕에 가면 정말 이들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한 관찰이 주는 코믹함과 통렬함이 꽤 수준급인 데다가,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이들 관계에 자신을 대입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 <위아영>
관계의 불균형
이들의 만남부터 친분을 쌓게 되기까지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조쉬(벤 스틸러)는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아내 코넬리아(나오미 와츠)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코넬리아는 다큐멘터리계의 대부로 알려진 아버지의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다. 무명 다큐멘터리 감독인 20대 청년 제이미(아담 드라이버)는 조쉬의 강의를 듣고, “평소 존경해왔다”라며 관심을 표한다. 그는 여자 친구 다비(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함께 브루클린에 사는 소위 ‘힙스터’다. 대중적인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이들은 행동, 사고, 차림새 어느 하나 경직되지 않아 보인다. 제이미가 먼저 조쉬에게 관심을 표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마음을 뺏긴 건 조쉬다. 겉으로는 분명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조쉬였지만 그도 고민이 많았다.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한 스트레스, 그리고 8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하게 풀리지 않는 신작도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조쉬가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또래들의 고민에 빠져있다. 모여서 함께 친분을 나누는 것 같아 보여도 현실에 안주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그들이 조쉬에게 더는 신선하지가 않다. 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태도로 덤비는 저돌적인 제이미는 분명 달라 보였다. 제이미가 하는 모든 것이 멋지고 신선해 보이기 시작했다. 조쉬는 아예 기존 친구들을 멀리하는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제이미 커플과 함께 보내기로 한다.
영화 <위아영>의 장면. 롤러를 신고 거리를 달리는 조쉬(왼쪽) 힙합 댄스를 배우는 코넬리아(오른쪽)
제이미가 제시하는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는 조쉬는 퍽 들떠 보인다. 먼저 의상부터 완전히 새롭게 바꾼다. 평소 즐겨 입는 고급스러운 옷들은 벗어 던지고, 대신 ‘젊은 커플처럼’ 낡은 빈티지 의상이나 헐렁한 힙합 패션을 소화한다. 평소 다니는 VIP 전용 헬스클럽도 멀리한다. 어디까지나 '그들처럼’ 몸을 쓰길 원하고, 그래서 격렬한 힙합 댄스 강습에 시간을 할애한다. 영적인 체험강좌도 수강한다. ‘그들도 하니’ 의심 없이 따라나서는 거다. 고리타분한 중년 친구들과는 다른 젊은 친구의 사고방식을 한껏 옹호하고, 또 아내에게도 이 관계에 동참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런데 조쉬와 제이미의 우정 쌓기가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관계가 가지는 불균형을 조쉬만 몰랐던 것 같고, 그로 인해 영화는 시종 씁쓸한 코믹의 기류를 형성한다. 문제를 진단하자면 이렇다. 조쉬는 새롭게 알게 된 제이미를 통해서 젊은 사고방식과 취향을 습득하고 싶지만, 그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제이미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 모든 문화가 조쉬에게는 애써 노력해야 하는 어떤 숙제가 된다. 자전거 라이딩 장면은 조쉬와 제이미의 이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이미는 앞으로 쭉쭉 나가는데, 조쉬는 노화로 인한 근육경련으로 결국 라이딩을 멈추고 병원으로 가야만 한다. 단적으로 경제적 차이도 이들의 관계의 불균형을 보충 설명해주는 장치다. 함께 만날 때면 조쉬는 늘 밥값을 계산하는 위치다. 처음엔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만남을 지속할수록 동등한 친구라는 개념으로 볼 때 무언가 손해 보는 기분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제이미와 조쉬
관계 이면에 있는 저마다의 사정
조쉬와 제이미의 관계가 덜그럭거리게 된 데는, 사실 이보다 더한 원인이 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자, 정해진 순서라면 순서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제이미는 사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기회를 얻고자, 조쉬에게 호감을 표하고 그에게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그를 통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다큐멘터리계의 대부인 조쉬의 장인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니 왜 친해질 노력을 하지 않겠는가. 제이미를 만나고 친해지는 과정에서 조쉬에게도 어떤 목적이 있었듯이, 제이미 역시 순수함 너머 어떤 판단이 있었고 부단히 노력했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 우연을 가장한 강의 시간 인사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걸 제이미의 영리한 잇속으로 보아야 할지, 젊은이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해석해야 할지 누구도 판단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누구나 예상하듯 이 관계에서 조쉬가 가지는 박탈감이 상당히 크리라는 것이다. 세대의 간극에서, 나이 든 쪽은 결국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가 가진 것들에 부러움과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고, 결국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조화를 꾀할 것인지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순수하게 친밀감을 드러내고, 친구가 되는 과정은 어린 시절에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쉬는 관계의 진통을 한바탕 치르고 난 후 “제이미는 악마가 아니야. 젊은 것뿐이야”라며, 둘 사이의 불균형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만들어 나간다. 영화를 만든 노아 바움백 감독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40대 중반이다. <위아영>은 뉴욕, 영화계에서 일하는 그의 경험이나 통찰이 다분히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더 흥미진진해지는 지점이다.
[관계]불균형에서 벗어나 친구 만들기
노아 바움백 감독의 <위아영>
이화정
2018-02-13
적정선의 관계를 맺는 일
“친구가 정말 많으시겠어요.”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다. 주간지 특성상, 매주 취재하고 기사를 쓰다 보니 일하는 동안 만난 사람도, 친분을 쌓은 사람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핸드폰이 고장 난 후배는 수리비가 꽤 되는데도 새 핸드폰을 사는 대신 수리를 맡겼다는 말이 생각난다. “제가 다른 데이터는 다 백업해 놨는데, 연락처 저장을 안 해놨더라고요.” 그보다 연차가 오래된 나는 연락처 백업을 안 해두면 당장 일하는 데 큰일 나겠다 싶어 정신이 번쩍 든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연락처함이 핸드폰 용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친구 많으시겠어요”라는 물음에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 막상 누군가에게 일없이 전화하려고 연락처를 훑어보면, 한 줌도 안 되는 리스트가 남을 것이다.
마음이 맞고 코드가 통하면 금세 친구가 되던 어린 시절과 달리, 나이가 점점 들수록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걸 절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무턱대고 호감만 가지고 누군가를 대하기에는, 상대에게 귀찮은 존재로 오인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모두가 각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도 커다란 이유일 것이고, 그래서 적정선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길 서로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엔 일 끝나면 어떻게든 놀러 가려고 했는데 요즘은 피곤해서 곧장 집으로 간다”고 하는 지인의 말을 들으니, 그건 어떤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도 줄고,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나 친밀감도 그만큼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노아 바움백 감독의 <위아영> 만한 영화가 없지 싶다. 요약하자면, 뉴욕에 사는 40대 중년 남자가 20대 청년 친구를 만나 겪는 일종의 난항을 그린 이야기다. 뉴욕에 가면 정말 이들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세밀한 관찰이 주는 코믹함과 통렬함이 꽤 수준급인 데다가,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이들 관계에 자신을 대입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관계의 불균형
이들의 만남부터 친분을 쌓게 되기까지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조쉬(벤 스틸러)는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고 아내 코넬리아(나오미 와츠)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제작자다. 코넬리아는 다큐멘터리계의 대부로 알려진 아버지의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있다. 무명 다큐멘터리 감독인 20대 청년 제이미(아담 드라이버)는 조쉬의 강의를 듣고, “평소 존경해왔다”라며 관심을 표한다. 그는 여자 친구 다비(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함께 브루클린에 사는 소위 ‘힙스터’다. 대중적인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이들은 행동, 사고, 차림새 어느 하나 경직되지 않아 보인다. 제이미가 먼저 조쉬에게 관심을 표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마음을 뺏긴 건 조쉬다. 겉으로는 분명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조쉬였지만 그도 고민이 많았다. 아직 아이를 갖지 못한 스트레스, 그리고 8년 동안이나 지지부진하게 풀리지 않는 신작도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조쉬가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또래들의 고민에 빠져있다. 모여서 함께 친분을 나누는 것 같아 보여도 현실에 안주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그들이 조쉬에게 더는 신선하지가 않다. 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태도로 덤비는 저돌적인 제이미는 분명 달라 보였다. 제이미가 하는 모든 것이 멋지고 신선해 보이기 시작했다. 조쉬는 아예 기존 친구들을 멀리하는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제이미 커플과 함께 보내기로 한다.
영화 <위아영>의 장면. 롤러를 신고 거리를 달리는 조쉬(왼쪽) 힙합 댄스를 배우는 코넬리아(오른쪽)
제이미가 제시하는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는 조쉬는 퍽 들떠 보인다. 먼저 의상부터 완전히 새롭게 바꾼다. 평소 즐겨 입는 고급스러운 옷들은 벗어 던지고, 대신 ‘젊은 커플처럼’ 낡은 빈티지 의상이나 헐렁한 힙합 패션을 소화한다. 평소 다니는 VIP 전용 헬스클럽도 멀리한다. 어디까지나 '그들처럼’ 몸을 쓰길 원하고, 그래서 격렬한 힙합 댄스 강습에 시간을 할애한다. 영적인 체험강좌도 수강한다. ‘그들도 하니’ 의심 없이 따라나서는 거다. 고리타분한 중년 친구들과는 다른 젊은 친구의 사고방식을 한껏 옹호하고, 또 아내에게도 이 관계에 동참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런데 조쉬와 제이미의 우정 쌓기가 그리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관계가 가지는 불균형을 조쉬만 몰랐던 것 같고, 그로 인해 영화는 시종 씁쓸한 코믹의 기류를 형성한다. 문제를 진단하자면 이렇다. 조쉬는 새롭게 알게 된 제이미를 통해서 젊은 사고방식과 취향을 습득하고 싶지만, 그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제이미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 모든 문화가 조쉬에게는 애써 노력해야 하는 어떤 숙제가 된다. 자전거 라이딩 장면은 조쉬와 제이미의 이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이미는 앞으로 쭉쭉 나가는데, 조쉬는 노화로 인한 근육경련으로 결국 라이딩을 멈추고 병원으로 가야만 한다. 단적으로 경제적 차이도 이들의 관계의 불균형을 보충 설명해주는 장치다. 함께 만날 때면 조쉬는 늘 밥값을 계산하는 위치다. 처음엔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만남을 지속할수록 동등한 친구라는 개념으로 볼 때 무언가 손해 보는 기분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관계 이면에 있는 저마다의 사정
조쉬와 제이미의 관계가 덜그럭거리게 된 데는, 사실 이보다 더한 원인이 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자, 정해진 순서라면 순서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영화감독으로서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제이미는 사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기회를 얻고자, 조쉬에게 호감을 표하고 그에게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그를 통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다큐멘터리계의 대부인 조쉬의 장인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니 왜 친해질 노력을 하지 않겠는가. 제이미를 만나고 친해지는 과정에서 조쉬에게도 어떤 목적이 있었듯이, 제이미 역시 순수함 너머 어떤 판단이 있었고 부단히 노력했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 우연을 가장한 강의 시간 인사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걸 제이미의 영리한 잇속으로 보아야 할지, 젊은이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해석해야 할지 누구도 판단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누구나 예상하듯 이 관계에서 조쉬가 가지는 박탈감이 상당히 크리라는 것이다. 세대의 간극에서, 나이 든 쪽은 결국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가 가진 것들에 부러움과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고, 결국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조화를 꾀할 것인지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순수하게 친밀감을 드러내고, 친구가 되는 과정은 어린 시절에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쉬는 관계의 진통을 한바탕 치르고 난 후 “제이미는 악마가 아니야. 젊은 것뿐이야”라며, 둘 사이의 불균형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만들어 나간다. 영화를 만든 노아 바움백 감독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40대 중반이다. <위아영>은 뉴욕, 영화계에서 일하는 그의 경험이나 통찰이 다분히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더 흥미진진해지는 지점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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