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관계의 결합
나의 사고 형식이나 신념에 가장 가까운 철학은 아마 구조주의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철학적 사조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조나 시스템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조나 시스템은 관계의 결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공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 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구조주의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시스템에 임금의 역할과 신하의 역할이 있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가족 역시 아버지의 역할과 아들의 역할이 있고 그것을 행해야 한다. 공자의 국가와 가족을 역할 관계로 파악하는 관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구조주의자다.
반면, 그러한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소속된 구성원의 관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 다른 구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오히려 후기구조주의와 비슷하게 여겨질 것이다. 단순하게 후기구조주의를 구성 요소의 관계로 따지면 관계의 자유로운 재설정, 혹은 고정된 관계의 부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기구조주의에서 ‘해체’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기존 과정의 해체 없이 새로운 관계의 재설정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후기구조주의와 해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기존 드라마 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연극을 시도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역시 이러한 관계 안에 놓인다.
새로운 구조로 결합한 연극
1999년 한스 티스 레만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는 책을 내면서 이전 드라마 중심의 전통 연극과 구별되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들이 주목받았다. 이전에도 이러한 연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때를 중심으로 2000년대 들어오면서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고 형식을 파괴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실험이 더욱 활발한 듯했다. 해외 연극 시장을 꾸준히 관찰한 입장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국제연극제에 소개되는 해외 초청작 중 상당수가 이러한 계열의 작품이었다. 2000년대 초반 국제공연예술제의 주제 역시 포스트드라마 연극들을 다루는 ‘해체’ ‘혼종’ 등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한스 티스 레만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스펙트럼을 굉장히 광범위하게 잡고 있다. 그래서 일부 비평가들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범위의 연극을 아우르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실체가 모호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객을 극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결합한 리미니 프로토콜의 뉴다큐멘터리 연극이나, 무용에 연극적 요소를 깊이 가미한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를 대표적인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 포함시킨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 중 <100% 광주>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은 2009년 베를린에서 <100% 베를린>으로 시작해 도쿄, 멜버른 등 세계 다양한 도시를 주제로 그 도시에 사는 시민을 통계학적으로 구성하여 그 도시의 참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테면 광주에는 외국인이 1% 살고 있다고 하면, 이를 반영해 <100% 광주>에는 100명의 시민 중 한 명을 외국인으로 구성하는 식이다. 남녀의 비율, 사는 지역의 비율, 연령대까지 종합적인 기준으로 작품에 참여할 시민들을 선발하고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광주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대별 일상을 보여준다거나, 평범하고 때로는 민감한, 때로는 광주와 밀접한 질문을 던지고 O와 X로 나뉘는 시민들의 반응을 통해 광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특별한 형식만 있을 뿐 짜인 대본도 없다. 이 작품은 드라마가 없었고, 기존의 배우와 관객의 관계도 파괴했다. 모든 면에서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었다. <100% 광주>는 광주의 현재의 모습을 그곳의 주인인 광주 시민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명확한 콘셉트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놀로그, 게임,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양식을 결합해 뚜렷한 행보를 보였다. 그 행보는 기존 연극의 구성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나 목적지를 향해 나름의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100% 광주>는 포스트드라마, 즉 드라마 연극을 넘어선 새로운 구조의 연극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는 기존 무용에 연극적 요소들 더 깊숙이 받아들인 경우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들이 기존 무용보다 캐릭터가 있고 보다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들뿐 완전히 새로운 구조는 아니다. 기존의 무용이 춤을 중심으로 다른 요소들을 위계적으로 결합하였다면,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는 인물, 춤, 음악, 드라마 등이 기존 위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계로 결합한다.
새로운 관계 구성을 위한 해체
전통 연극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현대연극의 중요한 흐름이다. 해체를 기반으로 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중에는 종종 해체 그 자체로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반응은 내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작품과 관객의 만남의 형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재민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개괄하는 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포스트드라마와 관객이 만나는 형태를 ‘현존’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관객들이 모든 사건을 즉각적으로 수용할 수 없더라도 감각의 차원에서 매우 강렬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감각적으로 수용할 자세를 보이는 순간, 연극은 새로운 차원으로 관객에게 다가설 수 있다.”(『공연과 이론』 2013년 겨울호)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작품과 관객이 새로운 관계를 통해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관계를 넘어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이해의 단계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종종 모호하고 때로는 공허한 관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런 공허함은 새롭기는 하지만 기존 연극의 해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강해진다. 기존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와 보여주는 방식을 해체하고, 소통 방식을 거부하고, 위계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런 반응 자체가 기존 구조주의적인 사고의 한계이자, 나의 한계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새로운 형성이 부재한 작품과 만날 때의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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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해체보다는 구조의 재구성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나아갈 방향
박병성
2018-02-01
구조주의, 관계의 결합
나의 사고 형식이나 신념에 가장 가까운 철학은 아마 구조주의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철학적 사조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조나 시스템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조나 시스템은 관계의 결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공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 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이 구조주의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시스템에 임금의 역할과 신하의 역할이 있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가족 역시 아버지의 역할과 아들의 역할이 있고 그것을 행해야 한다. 공자의 국가와 가족을 역할 관계로 파악하는 관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구조주의자다.
반면, 그러한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소속된 구성원의 관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 다른 구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오히려 후기구조주의와 비슷하게 여겨질 것이다. 단순하게 후기구조주의를 구성 요소의 관계로 따지면 관계의 자유로운 재설정, 혹은 고정된 관계의 부재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기구조주의에서 ‘해체’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기존 과정의 해체 없이 새로운 관계의 재설정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후기구조주의와 해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기존 드라마 구조를 넘어서 새로운 연극을 시도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역시 이러한 관계 안에 놓인다.
새로운 구조로 결합한 연극
1999년 한스 티스 레만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라는 책을 내면서 이전 드라마 중심의 전통 연극과 구별되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들이 주목받았다. 이전에도 이러한 연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때를 중심으로 2000년대 들어오면서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고 형식을 파괴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실험이 더욱 활발한 듯했다. 해외 연극 시장을 꾸준히 관찰한 입장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국제연극제에 소개되는 해외 초청작 중 상당수가 이러한 계열의 작품이었다. 2000년대 초반 국제공연예술제의 주제 역시 포스트드라마 연극들을 다루는 ‘해체’ ‘혼종’ 등을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한스 티스 레만도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스펙트럼을 굉장히 광범위하게 잡고 있다. 그래서 일부 비평가들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범위의 연극을 아우르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실체가 모호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관객을 극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다큐멘터리적인 요소를 결합한 리미니 프로토콜의 뉴다큐멘터리 연극이나, 무용에 연극적 요소를 깊이 가미한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를 대표적인 포스트드라마 연극으로 포함시킨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뉴다큐멘터리 연극 <100% 광주> 공연 모습 ©Ahn Gab Joo
리미니 프로토콜의 작품 중 <100% 광주>라는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은 2009년 베를린에서 <100% 베를린>으로 시작해 도쿄, 멜버른 등 세계 다양한 도시를 주제로 그 도시에 사는 시민을 통계학적으로 구성하여 그 도시의 참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테면 광주에는 외국인이 1% 살고 있다고 하면, 이를 반영해 <100% 광주>에는 100명의 시민 중 한 명을 외국인으로 구성하는 식이다. 남녀의 비율, 사는 지역의 비율, 연령대까지 종합적인 기준으로 작품에 참여할 시민들을 선발하고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광주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대별 일상을 보여준다거나, 평범하고 때로는 민감한, 때로는 광주와 밀접한 질문을 던지고 O와 X로 나뉘는 시민들의 반응을 통해 광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특별한 형식만 있을 뿐 짜인 대본도 없다. 이 작품은 드라마가 없었고, 기존의 배우와 관객의 관계도 파괴했다. 모든 면에서 새로운 형식의 연극이었다. <100% 광주>는 광주의 현재의 모습을 그곳의 주인인 광주 시민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명확한 콘셉트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모놀로그, 게임,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양식을 결합해 뚜렷한 행보를 보였다. 그 행보는 기존 연극의 구성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나 목적지를 향해 나름의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100% 광주>는 포스트드라마, 즉 드라마 연극을 넘어선 새로운 구조의 연극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는 기존 무용에 연극적 요소들 더 깊숙이 받아들인 경우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들이 기존 무용보다 캐릭터가 있고 보다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들뿐 완전히 새로운 구조는 아니다. 기존의 무용이 춤을 중심으로 다른 요소들을 위계적으로 결합하였다면,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는 인물, 춤, 음악, 드라마 등이 기존 위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관계로 결합한다.
Wiesenland 공연에서 피나 바우쉬(가운데)와 댄서들의 모습 ©Leafar_cc by 3.0 / 피나 바우쉬의 탄츠 테아터 공연 모습 ©clau damaso
새로운 관계 구성을 위한 해체
전통 연극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현대연극의 중요한 흐름이다. 해체를 기반으로 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중에는 종종 해체 그 자체로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반응은 내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작품과 관객의 만남의 형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재민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을 개괄하는 글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포스트드라마와 관객이 만나는 형태를 ‘현존’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관객들이 모든 사건을 즉각적으로 수용할 수 없더라도 감각의 차원에서 매우 강렬한 느낌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감각적으로 수용할 자세를 보이는 순간, 연극은 새로운 차원으로 관객에게 다가설 수 있다.”(『공연과 이론』 2013년 겨울호)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작품과 관객이 새로운 관계를 통해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관계를 넘어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이해의 단계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종종 모호하고 때로는 공허한 관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그런 공허함은 새롭기는 하지만 기존 연극의 해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강해진다. 기존 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와 보여주는 방식을 해체하고, 소통 방식을 거부하고, 위계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런 반응 자체가 기존 구조주의적인 사고의 한계이자, 나의 한계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새로운 형성이 부재한 작품과 만날 때의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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