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뜬대?”
요리사로 살다 보니 식당 동네는 안 돌아다닌 데가 드물다. 청담동, 가로수길, 논현동, 홍대, 이태원, 광화문…. 음식을 즐기러 다닌 게 아니라 일하는 가게를 옮겼다는 말이다. 서울은 마치 부정형의 생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부동산(不動産)’, 가치가 진짜라고 하여 ‘Real estate’라는 부동산이지만 서울에서는 다르다. 식당을 하는 친구들끼리 얘기하는 주 화제 중 하나는 “다음은 어디가 뜬대?”이다. 서울은 쉬지 않고 도심과 부도심을 가리지 않고 재개발 중이다. 과거에는 도시 재생이나 신도심 개발 같은 토목적 의도가 많았다면, 지금은 심리 문제다. 손님들이 어디를 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는 곳이 개발된다. 그 수요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싶어 하는 게 부동산 개발업자이고, 요리사나 식당업자들은 숨을 죽이고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지켜본다. 말하자면, 식당도 생태계가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생태계에 적응해야 하고, 마치 뒷다리와 앞다리가 막 생긴 개구리가 뭍에 올라오는 것 같은 긴장된 첫 경험을 요구한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제일 잘 나가는 곳은 종로와 명동이었다. 앞사람 등만 보고 떠밀리듯 걸어야 했다. 두 곳이 힘을 잃을 줄 누가 알았으랴. 또 명동이 외국인(특히 중국인)으로 인해 부활할 줄 또 누가 예측할 수 있었으랴. 명동이 쇠락할 때, 그곳에 있는 중화민국(타이완) 대사관을 접수한 건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우리가 ‘중공(中共)’이라 부르던 나라가 새로운 ’중국‘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중국인 중심 관광 생태계가 될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일본인이나 오는 곳이었고, 돌이켜보면 그것조차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명동은 황금정, 본정통으로 연결되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최대 번화가였으니까(그 시절, 명동에서 일본인들이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없었을 테고).
ⓒJay wennington
쉼 없는 이주로 새 목초지를 찾는 유랑 목자처럼
내가 요리사가 된 2천년대 초, 식당의 생태계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고급 음식을 만들어서 강남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게 목적이 되었다. 닷컴 바람과 부동산 투기 열풍, 벤처, 카드 대란과 펀드 대박 같은 바깥 요인들이 청담동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은 것이었지만, 요리사들은 그 바뀐 생태계에 적응했다. 와인 이름을 외워야 했고, 외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팔았다. 청담동은 20여 년 전, 지금보다 더 비싼 음식을 팔았다. 물가 상승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품이었고 그것은 청담이 ‘소돔성’라는 오명을 쓰는 데 일조했다. 그 소돔성에서 나도 밥을 먹었다. 손님들이 벗어주는 밍크 재킷을 받아 걸어주면서.
그야말로 ‘청정한’ 생태계였던 가로수길이 나의 다음 행선지였다. 그곳이 막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사진작가들의 스튜디오가 있었던, 문자 그대로 가로수가 주인공이었던 신사동 기다란 골목에 유흥의 향유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청담동에서, 압구정동에서(오렌지들이 득실거리던) 사람들이 가로수길이라는 멋없는 골목으로 몰려왔다. 그냥 가로수가 있는 길이었을 뿐인데도. 개발된 유흥지가 아니었고 아주 우연한 심리적 이동만 있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가로수가 주는 이미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상의 이국적 풍경을 받아들였다. 가로수가 즐비한 길거리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와 맥주잔을 기울이는, 어쩌면 프랑스나 서구의 카페문화가 강남 어딘가에 있다는 것으로 위안받으려 했다. 물론 득달같이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들이닥쳤고(“이 가게 권리금을 올려드릴게”), 대기업의 시범 가게들이 이곳을 노리면서 월세가 껑충 올랐다. 수수히 케이크를 굽고 커피를 내리던, 말하자면 서구적인 소박함을 보여주려면 사람들이 다 쫓겨나서 다른 생태계를 찾아야 했다.
ⓒPiotr chorobot
“어디 가서 장사하지?”
가로수길을 나는 떠났다. 유랑하듯 이태원으로 갔다가 다시 홍대로 왔다. 아아, 이 청춘의 소돔성이여. 불금의 막장이여. 나는 이곳에서 국수를 말았다. 요리사들은 진정한 떠돌이다. 이력서가 앞뒤로 꽉 차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유일한 직종이다. 홍대는 본디 예술가들이 고단한 작업 후에 소주를 마시던 동네였다. 이곳의 열광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왔다. 돈이 삶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먼 곳으로 떠났다. 그곳으로 다시 자본이 몰려왔다. 망원동과 연남동이었다.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계를 잇던 이곳에서 이제 돈 냄새가 난다. 다들 눈에 핏발을 세운다. 권리금과 바닥 권리금과 명도소송과 강제집행이란 말이 길거리에 굴러다녔다.
다시 요리사들과 식당업자들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언제나 똑같다.
“이제 어디 가서 장사하지?” 마치 태국에서 새우 양식장이 황폐해지면 폐쇄하고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며 새우를 길러 먹고사는 떠돌이 업자처럼. 우리에게 재생 가능한, 스스로 정화기능을 가진 생태계는 없는 것일까.
글 쓰는 요리사. 어린 시절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인기 있는 식당을 열었다.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세세한 원산지를 표기하는 메뉴 역시 그의 고안이다. 요리하고 쓰는 일이 일과다. 결국 죽기 위해 먹어야 하는 생명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먹고 마시며,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다시 쓴다. 저서로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이 있다. 현재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라는 술집을 하고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생태계]식당에도 생태계가 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생태계]식당에도 생태계가 있다
어디가서 장사하지?
박찬일
2018-01-29
“어디가 뜬대?”
요리사로 살다 보니 식당 동네는 안 돌아다닌 데가 드물다. 청담동, 가로수길, 논현동, 홍대, 이태원, 광화문…. 음식을 즐기러 다닌 게 아니라 일하는 가게를 옮겼다는 말이다. 서울은 마치 부정형의 생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부동산(不動産)’, 가치가 진짜라고 하여 ‘Real estate’라는 부동산이지만 서울에서는 다르다. 식당을 하는 친구들끼리 얘기하는 주 화제 중 하나는 “다음은 어디가 뜬대?”이다. 서울은 쉬지 않고 도심과 부도심을 가리지 않고 재개발 중이다. 과거에는 도시 재생이나 신도심 개발 같은 토목적 의도가 많았다면, 지금은 심리 문제다. 손님들이 어디를 가고 싶다는 의지를 보이는 곳이 개발된다. 그 수요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싶어 하는 게 부동산 개발업자이고, 요리사나 식당업자들은 숨을 죽이고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지켜본다. 말하자면, 식당도 생태계가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생태계에 적응해야 하고, 마치 뒷다리와 앞다리가 막 생긴 개구리가 뭍에 올라오는 것 같은 긴장된 첫 경험을 요구한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제일 잘 나가는 곳은 종로와 명동이었다. 앞사람 등만 보고 떠밀리듯 걸어야 했다. 두 곳이 힘을 잃을 줄 누가 알았으랴. 또 명동이 외국인(특히 중국인)으로 인해 부활할 줄 또 누가 예측할 수 있었으랴. 명동이 쇠락할 때, 그곳에 있는 중화민국(타이완) 대사관을 접수한 건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우리가 ‘중공(中共)’이라 부르던 나라가 새로운 ’중국‘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중국인 중심 관광 생태계가 될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일본인이나 오는 곳이었고, 돌이켜보면 그것조차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명동은 황금정, 본정통으로 연결되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최대 번화가였으니까(그 시절, 명동에서 일본인들이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없었을 테고).
쉼 없는 이주로 새 목초지를 찾는 유랑 목자처럼
내가 요리사가 된 2천년대 초, 식당의 생태계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고급 음식을 만들어서 강남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게 목적이 되었다. 닷컴 바람과 부동산 투기 열풍, 벤처, 카드 대란과 펀드 대박 같은 바깥 요인들이 청담동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 같은 것이었지만, 요리사들은 그 바뀐 생태계에 적응했다. 와인 이름을 외워야 했고, 외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팔았다. 청담동은 20여 년 전, 지금보다 더 비싼 음식을 팔았다. 물가 상승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품이었고 그것은 청담이 ‘소돔성’라는 오명을 쓰는 데 일조했다. 그 소돔성에서 나도 밥을 먹었다. 손님들이 벗어주는 밍크 재킷을 받아 걸어주면서.
그야말로 ‘청정한’ 생태계였던 가로수길이 나의 다음 행선지였다. 그곳이 막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사진작가들의 스튜디오가 있었던, 문자 그대로 가로수가 주인공이었던 신사동 기다란 골목에 유흥의 향유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청담동에서, 압구정동에서(오렌지들이 득실거리던) 사람들이 가로수길이라는 멋없는 골목으로 몰려왔다. 그냥 가로수가 있는 길이었을 뿐인데도. 개발된 유흥지가 아니었고 아주 우연한 심리적 이동만 있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가로수가 주는 이미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상의 이국적 풍경을 받아들였다. 가로수가 즐비한 길거리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와 맥주잔을 기울이는, 어쩌면 프랑스나 서구의 카페문화가 강남 어딘가에 있다는 것으로 위안받으려 했다. 물론 득달같이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들이닥쳤고(“이 가게 권리금을 올려드릴게”), 대기업의 시범 가게들이 이곳을 노리면서 월세가 껑충 올랐다. 수수히 케이크를 굽고 커피를 내리던, 말하자면 서구적인 소박함을 보여주려면 사람들이 다 쫓겨나서 다른 생태계를 찾아야 했다.
“어디 가서 장사하지?”
가로수길을 나는 떠났다. 유랑하듯 이태원으로 갔다가 다시 홍대로 왔다. 아아, 이 청춘의 소돔성이여. 불금의 막장이여. 나는 이곳에서 국수를 말았다. 요리사들은 진정한 떠돌이다. 이력서가 앞뒤로 꽉 차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유일한 직종이다. 홍대는 본디 예술가들이 고단한 작업 후에 소주를 마시던 동네였다. 이곳의 열광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왔다. 돈이 삶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먼 곳으로 떠났다. 그곳으로 다시 자본이 몰려왔다. 망원동과 연남동이었다. 사람들이 편안하게 생계를 잇던 이곳에서 이제 돈 냄새가 난다. 다들 눈에 핏발을 세운다. 권리금과 바닥 권리금과 명도소송과 강제집행이란 말이 길거리에 굴러다녔다.
다시 요리사들과 식당업자들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언제나 똑같다.
“이제 어디 가서 장사하지?”
마치 태국에서 새우 양식장이 황폐해지면 폐쇄하고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며 새우를 길러 먹고사는 떠돌이 업자처럼. 우리에게 재생 가능한, 스스로 정화기능을 가진 생태계는 없는 것일까.
글 쓰는 요리사. 어린 시절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인기 있는 식당을 열었다.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세세한 원산지를 표기하는 메뉴 역시 그의 고안이다. 요리하고 쓰는 일이 일과다. 결국 죽기 위해 먹어야 하는 생명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먹고 마시며,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다시 쓴다. 저서로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이 있다. 현재 서교동에서 <로칸다 몽로>라는 술집을 하고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생태계]식당에도 생태계가 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생태계]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화정
[생태계]생태계와 공존하는 여행의 길
정여울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