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봐야만 알 수 있는 것
내 SNS 계정을 열면, 현재 지인 둘이 열심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10월 초 온 나라가 처음으로 맞이한 황금연휴 즈음 출발했으니, 그들이 순례길을 걸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 명은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떠났고, 한 명은 프리랜서인데 잠깐 자체 휴가를 낸 셈이다. 매일 아침 SNS를 열면 순례길에서 두 사람이 만난 풍경들이 감탄사와 함께 업데이트 된다. 어제는 숙소 창문으로 바라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가 하면, 또 오늘은 길을 걷다 맞닥뜨린 노을 지는 하늘 색에 찬사를 뱉어낸다. ‘이 길로 떠나오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런 풍경이 존재하는지 알기나 했을까’라는 문구가 갑자기 툭 하고 내 뒤통수를 쳤다. 그들이 걸었던 지난 한 달 동안의 나를 돌아보았다. 지방 출장으로 약 2주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돌아와서는 고질병인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변함없는 마감 업무를 치러냈다. 최근 들어 연락 닿는 사람마다 ‘망년회 날짜 잡읍시다’라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올해도 그렇게 끝나가나 보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문득 깨달았다. 아, 올해는 단풍도 제대로 못 보고 한 해를 떠나 보내겠구나.
걷는다는 행위에 무슨 대단한 의미를 두려는 건 아니다. 여행길에서 진정한 자아와 만난다는 카피 문구에 설레는 일도 드물다. 걷기만 하는 동안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향한 무수한 여행자들의 찬사는 판타지쯤으로 치부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그렇게 만만히 봐도 될 일인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배낭을 챙겨 메고 그 길을 나섰고, 거기에는 늘 그렇게 흘러가던 일상의 흐름을 깨는 어떤 결심이 선행되었으리라. 이대로 간 다면 아마 몇 년이, 혹은 몇 십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그리하여 내 지인의 말처럼 ‘떠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무수한 깨달음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자국 내에서 엄청나게 흥행을 기록한 독일영화 <나의 산티아고>는 나처럼 그 떠남을 조금쯤 만만하게 봤던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며, 그의 기적같은 심리 변화를 따라 산티아고 길을 묵묵히 동행하는 이야기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
하페의 산티아고 순례길 모험
그 남자 하페 케르켈링은, 독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 코미디언이다. 영화 속 설정된 유명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독일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의 실화다. 중년의 하페는 바쁜 스케줄을 감당하다 과로로 무대에서 쓰러지는데, 석 달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다. 솔직히 내 주변에도 ‘일을 좀 줄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도 버티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페는 꼼짝없이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런데 집에 있어도 전화가 그를 괴롭힌다. 뭣보다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못하게 되니, 허용된 시간에 뭘 하며 보내야 할지 찾지를 못한다. 그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 것도 이렇게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즈음이었다. 소파에 누워 무료하게 지내던 그는 TV에서 ‘요즘 시대에 신을 찾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듣게 되는데, 마치 계시를 얻은 듯 다음날 바로 순례길로 떠날 채비를 한다. 여정의 감행 동기치고 다소 극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니 이보다 더 극적일 수도 없지 싶다. 총 42일간 펼쳐진 800km의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비판을 통해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인 하페에게, 신을 만나게 된다는 이 여행에 대한 경외감은 사실 거의 없어 보인다. 42일치 여행 짐과 함께 그가 배낭에 챙겨 넣은 건 밑도 끝도 없는 ‘의심들’이다. 이 의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극도의 불평으로 이어진다. ‘나는 신을 믿는가?’ ‘이 길의 끝까지 가면 내 인생이 달라질까?’ ‘나는 기적을 바라고 있는게 아닐까?’ 하페가 1인칭 시점으로 기술하는 질문들 사이로, 여행길의 실질적 불편도 함께 따라온다. 유명인으로 누려왔던 그간의 모든 혜택들은, 이 길 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다. 첫날부터 쏟아진 폭우는 하페를 비롯한 여행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자연의 역경. 최고급 호텔에서 매니저의 수행을 받으며 여행하던 그는 이제 순례자들이 묶는 공동 숙소에서 자리 쟁탈전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평범한 여행자가 된다. 처음에는 ‘행여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귀찮게 하지 않을까’ 몸을 숨기던 그도 현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이 누가 그를 알아보기나 힐까.
하페는 여행 첫 날부터 쏟아지는 폭우를 맞는 등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만나지만, 길 위에서 특별한 인연들을 만나며 길 위에서 진정한 자신을 깨닫는다.
길에서 만난 질문과 깨달음
신기하게도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하페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 듯한 대리체험을 하는 기분이 드는데, 거기에는 아주 즉각적인 하페의 반응도 한몫한다. 고즈넉한 숲, 황토빛 길 같은 멋진 풍경에 금방 혹하다가도, 작은 불편에는 투덜대며 여행을 그만둘 결심도 자주 해댄다. 그런데 여행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이 자꾸 하페의 오기를 발동시킨다. 중년의 여성 스텔라는, 이제 누구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하페가 말벗이라도 하려고 하면 “목표에 도달하려면 혼자 가야 해요”라며 거리를 두는 냉혹한 스타일이다. 잡지기자 레나 역시 이 길에서 자주 얽히게 되는 순례자 중 한 명인데, 다혈질에 수다도 많아 하페에겐 천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게 중단할 듯 말듯 길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신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는 유년기의 아픈 기억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건 자신이 유명 코미디언으로 성장하는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내면의 상처다.
<나의 산티아고>의 원작인 하페의 에세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하페는 순례길을 걸은 특별한 경험, 순례자들과 나누게 된 소통, 그리고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아픔을 알게 되고 극복한 이 42일간의 속마음을 모두 일기로 썼고, 그 경험을 에세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로 출간했다. 영화는 50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이 에세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진솔한 로드무비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하페는 자신의 현재만이 정답이라고 믿고 타인과 벽을 쌓고, 오만하게 자신의 일상을 지켜왔다. 그가 그 ‘뻔한’ 일상을 깨고 솔직하게 자신과 만나는 방법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었다. 길을 걷는 사이 하페는 불필요한 지방이 제거되어 살도 빠지고 건강도 찾게 됐다. 하페처럼 아마도 우리 각자에게 맞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존재할거라고 믿는다. 꼭 그곳이 산티아고가 아니라도, 꼭 그 방법이 걷기가 아니라도 말이다.
[모험]‘현재’라는 정답에서 벗어나 보기
줄리아 폰 하인츠 감독의 <나의 산티아고>
이화정
2017-11-23
모험
떠나봐야만 알 수 있는 것
내 SNS 계정을 열면, 현재 지인 둘이 열심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10월 초 온 나라가 처음으로 맞이한 황금연휴 즈음 출발했으니, 그들이 순례길을 걸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한 명은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떠났고, 한 명은 프리랜서인데 잠깐 자체 휴가를 낸 셈이다. 매일 아침 SNS를 열면 순례길에서 두 사람이 만난 풍경들이 감탄사와 함께 업데이트 된다. 어제는 숙소 창문으로 바라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가 하면, 또 오늘은 길을 걷다 맞닥뜨린 노을 지는 하늘 색에 찬사를 뱉어낸다. ‘이 길로 떠나오지 않았다면 세상에 이런 풍경이 존재하는지 알기나 했을까’라는 문구가 갑자기 툭 하고 내 뒤통수를 쳤다. 그들이 걸었던 지난 한 달 동안의 나를 돌아보았다. 지방 출장으로 약 2주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돌아와서는 고질병인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변함없는 마감 업무를 치러냈다. 최근 들어 연락 닿는 사람마다 ‘망년회 날짜 잡읍시다’라고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올해도 그렇게 끝나가나 보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문득 깨달았다. 아, 올해는 단풍도 제대로 못 보고 한 해를 떠나 보내겠구나.
걷는다는 행위에 무슨 대단한 의미를 두려는 건 아니다. 여행길에서 진정한 자아와 만난다는 카피 문구에 설레는 일도 드물다. 걷기만 하는 동안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향한 무수한 여행자들의 찬사는 판타지쯤으로 치부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그렇게 만만히 봐도 될 일인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배낭을 챙겨 메고 그 길을 나섰고, 거기에는 늘 그렇게 흘러가던 일상의 흐름을 깨는 어떤 결심이 선행되었으리라. 이대로 간 다면 아마 몇 년이, 혹은 몇 십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그리하여 내 지인의 말처럼 ‘떠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무수한 깨달음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자국 내에서 엄청나게 흥행을 기록한 독일영화 <나의 산티아고>는 나처럼 그 떠남을 조금쯤 만만하게 봤던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이며, 그의 기적같은 심리 변화를 따라 산티아고 길을 묵묵히 동행하는 이야기다.
하페의 산티아고 순례길 모험
그 남자 하페 케르켈링은, 독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 코미디언이다. 영화 속 설정된 유명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독일에서 유명한 코미디언의 실화다. 중년의 하페는 바쁜 스케줄을 감당하다 과로로 무대에서 쓰러지는데, 석 달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다. 솔직히 내 주변에도 ‘일을 좀 줄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도 버티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페는 꼼짝없이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그런데 집에 있어도 전화가 그를 괴롭힌다. 뭣보다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못하게 되니, 허용된 시간에 뭘 하며 보내야 할지 찾지를 못한다. 그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된 것도 이렇게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즈음이었다. 소파에 누워 무료하게 지내던 그는 TV에서 ‘요즘 시대에 신을 찾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듣게 되는데, 마치 계시를 얻은 듯 다음날 바로 순례길로 떠날 채비를 한다. 여정의 감행 동기치고 다소 극적이지 않아 보이지만,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니 이보다 더 극적일 수도 없지 싶다. 총 42일간 펼쳐진 800km의 긴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비판을 통해 웃음을 주는 코미디언인 하페에게, 신을 만나게 된다는 이 여행에 대한 경외감은 사실 거의 없어 보인다. 42일치 여행 짐과 함께 그가 배낭에 챙겨 넣은 건 밑도 끝도 없는 ‘의심들’이다. 이 의심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극도의 불평으로 이어진다. ‘나는 신을 믿는가?’ ‘이 길의 끝까지 가면 내 인생이 달라질까?’ ‘나는 기적을 바라고 있는게 아닐까?’ 하페가 1인칭 시점으로 기술하는 질문들 사이로, 여행길의 실질적 불편도 함께 따라온다. 유명인으로 누려왔던 그간의 모든 혜택들은, 이 길 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다. 첫날부터 쏟아진 폭우는 하페를 비롯한 여행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자연의 역경. 최고급 호텔에서 매니저의 수행을 받으며 여행하던 그는 이제 순례자들이 묶는 공동 숙소에서 자리 쟁탈전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평범한 여행자가 된다. 처음에는 ‘행여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귀찮게 하지 않을까’ 몸을 숨기던 그도 현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이 누가 그를 알아보기나 힐까.
하페는 여행 첫 날부터 쏟아지는 폭우를 맞는 등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만나지만, 길 위에서 특별한 인연들을 만나며 길 위에서 진정한 자신을 깨닫는다.
길에서 만난 질문과 깨달음
신기하게도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하페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 듯한 대리체험을 하는 기분이 드는데, 거기에는 아주 즉각적인 하페의 반응도 한몫한다. 고즈넉한 숲, 황토빛 길 같은 멋진 풍경에 금방 혹하다가도, 작은 불편에는 투덜대며 여행을 그만둘 결심도 자주 해댄다. 그런데 여행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이 자꾸 하페의 오기를 발동시킨다. 중년의 여성 스텔라는, 이제 누구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하페가 말벗이라도 하려고 하면 “목표에 도달하려면 혼자 가야 해요”라며 거리를 두는 냉혹한 스타일이다. 잡지기자 레나 역시 이 길에서 자주 얽히게 되는 순례자 중 한 명인데, 다혈질에 수다도 많아 하페에겐 천적과 같은 인물이다. 그렇게 중단할 듯 말듯 길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신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는 유년기의 아픈 기억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건 자신이 유명 코미디언으로 성장하는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내면의 상처다.
하페는 순례길을 걸은 특별한 경험, 순례자들과 나누게 된 소통, 그리고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아픔을 알게 되고 극복한 이 42일간의 속마음을 모두 일기로 썼고, 그 경험을 에세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로 출간했다. 영화는 50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린 이 에세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진솔한 로드무비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하페는 자신의 현재만이 정답이라고 믿고 타인과 벽을 쌓고, 오만하게 자신의 일상을 지켜왔다. 그가 그 ‘뻔한’ 일상을 깨고 솔직하게 자신과 만나는 방법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었다. 길을 걷는 사이 하페는 불필요한 지방이 제거되어 살도 빠지고 건강도 찾게 됐다. 하페처럼 아마도 우리 각자에게 맞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존재할거라고 믿는다. 꼭 그곳이 산티아고가 아니라도, 꼭 그 방법이 걷기가 아니라도 말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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