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문화의 시대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대중문화가 문화를 자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험의 상실이다. 진정한 모험이 상실된 가운데 대중문화는 온갖 가짜 모험들을 오락으로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쩌면 거대한 오락실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의미
모험은 본래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왜냐하면 모험을 통해서 이야기가 생겨나고, 이야기는 한낱 본능적인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탁월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결코 추상적인 것일 수 없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인생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의 상상력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서는 소설가의 상상력도 빈약해지기 마련이다.
모험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 큰 의미가 된다.
의미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복수가 지배하는 층이다. 알다시피 복수도 인생에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 있듯 말이다. 이 위에는 또 다른 의미의 층이 있다. 충분한 복수와 복수의 해소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문화의 층.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험이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층. 이렇게 의미에는 1층과 2층이, 아니 그보다는 지하층과 1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문화가 몰락해도 인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 가령 지하 세계의 어두운 의미를 갖고서. 복수의 세계는 온통 필연이 지배하는 세계다. 따라서 “복수는 나의 것”을 외치는 사람에게 자유가 있을 리 없다. 복수의 의지가 강한 만큼 자유가 있는 것도 같지만, 그것은 다만 허상일 뿐이다.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은 “나도 달리 어찌할 수 없다”의 심정이고, 이 심정은 자유라고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전적으로 필연의 심정이다.
모험의 표상들
오늘날 우리가 모험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표상, 즉 “모험” 하면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랜드나 에버랜드 같은 대규모 상업 놀이시설이 제공하는 인공적인 모험이다. 이 ‘어드벤처’는 모험의 실제 요소를 다 빠뜨리고 오로지 모험에서 느낄 수 있는 스릴만을 따로 분리하여 생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이를테면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체험들은 사라진 채, 스릴만 남아 있는 모험. 스릴이 모험의 부수적 효과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릴만이 목적인 모험. 그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며, 그런 만큼 우리는 “모험”이라는 말에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험에 대해 가지는 표상으로는 놀이시설이 제공하는 인공적인 모험과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간접적인 모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영화나 게임 같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표상이다. 이 표상은 모험을 일상과 떨어뜨려 놓는다. 모험은 일상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인다. 거기서 모험은 전쟁이나 우주를 배경으로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의 모험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모험은 일상에서 이야기가 제거된 한낱 스릴로만 남아 있거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
최근에는 일상의 공간에서 모험을 펼치는 오락물이 등장하기는 했다. 가령 <런닝맨>이나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그렇다. 여기서는 전장이 아니라 사무실이나 길거리나 광장 같은 일상적인 공공장소가 모험의 장소가 된다. 그렇게 하면서 사실상 그 프로그램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 공적인 공간이 오락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둘째, 오락이 모험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모험에 대한 오늘날의 이 세 가지 대중문화적 표상을 통해 모험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모험은 스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모험은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셋째, 모험은 오락과 등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험은 삶 그 자체에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락은 삶에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은폐하고 지연시킬 뿐이다.
인간의 모험
무엇이 모험이 아닌지 말하기 위해 모험이 무엇인지 말하는 걸 깜박할 뻔 했다. 하지만 깜박하는 게 나을 뻔도 했다. 사실 오늘날 화면 속으로 들어가 대중문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 말고 무슨 모험이 남아 있겠는가? 일상에서 도대체 어떤 모험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험은 자연의 모험이었다. 가령 1831년 12월 27일 시작된 찰스 다윈의 비글호 모험. 그것은 박물학자의 장장 5년에 걸친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다윈 스스로 말했다. “비글호 항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나의 전 경력을 결정했다.” 말년에 자서전을 쓰면서도 그는 모험을 하면서 목격했던 찬란하고 숭고한 광경들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알다시피 오늘날 지구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모험을 떠나는 것은 예전만 못하다. 여전히 자연의 영역에는 모험의 여지가 남아 있겠지만 말이다.
시어도어 젤딘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모험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제안을 한다. “나의 출발점은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 내게 흥미롭다는 것이다.” 나는 젤딘의 제안을 따라 최근 다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인생이 정말로 흥미롭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인간을 탐구하는 모험에서 우리는 어떤 안경을 써야 할까? 젤딘은 다윈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썼던 ‘갈등’이라는 안경을 버릴 것을 조언한다. 오늘날 인류의 새로운 야망과 모험에 어울리는 관점은 ‘항구적 갈등이라는 관념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우정과 사랑의 안경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이따금 일상을 좀 더 의미 있고 흥미롭고 빛나는 곳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이런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세상을 복수와 갈등의 눈으로 보지 않고 우정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 둘째, 전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생을 추구할 정도로 용기가 있다. 셋째, 인간을 대화와 소통으로 대한다. 넷째, 작은 만남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주변을, 인간과 인간 사이를 밝게 만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혹시 그들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의 모험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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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모험, 그리고 인간
인간의 삶 속에서 모험이 지닌 의미
이성민
2017-11-09
모험
오늘날 우리는 문화의 시대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대중문화가 문화를 자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험의 상실이다. 진정한 모험이 상실된 가운데 대중문화는 온갖 가짜 모험들을 오락으로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쩌면 거대한 오락실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의미
모험은 본래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왜냐하면 모험을 통해서 이야기가 생겨나고, 이야기는 한낱 본능적인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탁월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결코 추상적인 것일 수 없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인생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의 상상력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모험이 사라진 시대에서는 소설가의 상상력도 빈약해지기 마련이다.
의미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복수가 지배하는 층이다. 알다시피 복수도 인생에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 있듯 말이다. 이 위에는 또 다른 의미의 층이 있다. 충분한 복수와 복수의 해소 위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문화의 층.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험이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층. 이렇게 의미에는 1층과 2층이, 아니 그보다는 지하층과 1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문화가 몰락해도 인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 가령 지하 세계의 어두운 의미를 갖고서. 복수의 세계는 온통 필연이 지배하는 세계다. 따라서 “복수는 나의 것”을 외치는 사람에게 자유가 있을 리 없다. 복수의 의지가 강한 만큼 자유가 있는 것도 같지만, 그것은 다만 허상일 뿐이다.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은 “나도 달리 어찌할 수 없다”의 심정이고, 이 심정은 자유라고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전적으로 필연의 심정이다.
모험의 표상들
오늘날 우리가 모험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표상, 즉 “모험” 하면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랜드나 에버랜드 같은 대규모 상업 놀이시설이 제공하는 인공적인 모험이다. 이 ‘어드벤처’는 모험의 실제 요소를 다 빠뜨리고 오로지 모험에서 느낄 수 있는 스릴만을 따로 분리하여 생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이를테면 카페인 없는 커피 같은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체험들은 사라진 채, 스릴만 남아 있는 모험. 스릴이 모험의 부수적 효과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릴만이 목적인 모험. 그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며, 그런 만큼 우리는 “모험”이라는 말에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험에 대해 가지는 표상으로는 놀이시설이 제공하는 인공적인 모험과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간접적인 모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영화나 게임 같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표상이다. 이 표상은 모험을 일상과 떨어뜨려 놓는다. 모험은 일상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인다. 거기서 모험은 전쟁이나 우주를 배경으로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의 모험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다. 모험은 일상에서 이야기가 제거된 한낱 스릴로만 남아 있거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
최근에는 일상의 공간에서 모험을 펼치는 오락물이 등장하기는 했다. 가령 <런닝맨>이나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그렇다. 여기서는 전장이 아니라 사무실이나 길거리나 광장 같은 일상적인 공공장소가 모험의 장소가 된다. 그렇게 하면서 사실상 그 프로그램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 공적인 공간이 오락실이 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둘째, 오락이 모험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모험에 대한 오늘날의 이 세 가지 대중문화적 표상을 통해 모험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모험은 스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모험은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셋째, 모험은 오락과 등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험은 삶 그 자체에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락은 삶에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은폐하고 지연시킬 뿐이다.
인간의 모험
무엇이 모험이 아닌지 말하기 위해 모험이 무엇인지 말하는 걸 깜박할 뻔 했다. 하지만 깜박하는 게 나을 뻔도 했다. 사실 오늘날 화면 속으로 들어가 대중문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 말고 무슨 모험이 남아 있겠는가? 일상에서 도대체 어떤 모험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험은 자연의 모험이었다. 가령 1831년 12월 27일 시작된 찰스 다윈의 비글호 모험. 그것은 박물학자의 장장 5년에 걸친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다윈 스스로 말했다. “비글호 항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나의 전 경력을 결정했다.” 말년에 자서전을 쓰면서도 그는 모험을 하면서 목격했던 찬란하고 숭고한 광경들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알다시피 오늘날 지구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모험을 떠나는 것은 예전만 못하다. 여전히 자연의 영역에는 모험의 여지가 남아 있겠지만 말이다.
시어도어 젤딘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모험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제안을 한다. “나의 출발점은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 내게 흥미롭다는 것이다.” 나는 젤딘의 제안을 따라 최근 다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의 인생이 정말로 흥미롭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인간을 탐구하는 모험에서 우리는 어떤 안경을 써야 할까? 젤딘은 다윈이나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썼던 ‘갈등’이라는 안경을 버릴 것을 조언한다. 오늘날 인류의 새로운 야망과 모험에 어울리는 관점은 ‘항구적 갈등이라는 관념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우정과 사랑의 안경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이따금 일상을 좀 더 의미 있고 흥미롭고 빛나는 곳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이런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세상을 복수와 갈등의 눈으로 보지 않고 우정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 둘째, 전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생을 추구할 정도로 용기가 있다. 셋째, 인간을 대화와 소통으로 대한다. 넷째, 작은 만남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주변을, 인간과 인간 사이를 밝게 만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혹시 그들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의 모험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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