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1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두 발의 총탄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을 필두로 하는 동맹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지구상 유일한 문명 세계를 자처하던 유럽은 그 야만성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당대 유행하던 민족주의 및 애국심 열풍은 전쟁의 비극을 키웠다.
패전국인 독일은 전쟁 내내 ‘순무의 겨울’이라 불리는 비참한 상황을 이어가야만 했다. 영국의 해상 봉쇄 및 외교 단절로 인해 매년 겨울 식량이 떨어져 동물 사료로 쓰던 순무로 연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 국민들은 자국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전후 독일인의 기억 속에 독일이 열세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패배의 기억
전쟁의 초반 양상은 분명 독일이 유리했다. 양면전선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프랑스를 굴복시킨 뒤 러시아로 진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이 파리 앞 50여 킬로미터까지 진군하면서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부전선 또한 러시아를 상대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여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이 참전하며 서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동부전선에서의 우위는 이어갔으나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해야 했던 탓에 가시적인 이득을 볼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니 고립된 독일의 생산력만으로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서부전선의 최종방어선으로 설정된 힌데부르크 선이 붕괴된 후 동맹국이 차례로 항복하니 전황을 뒤집을 수 없음은 명백했다. 그러나 독일군 수뇌부는 여전히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고 킬 군항의 해군에게 출항을 명령한다. 연합군 해군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킬 군항의 해군은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반란을 일으키고, 이 반란에서 시작된 독일혁명으로 인해 황제인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된다.
이런 상황임에도 독일 국민들이 패전을 인정하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종전 직전까지 알자스-로렌 정도를 제외한 독일 영토는 전장이 아니었다. 전쟁 초기 확장한 전선을 참호전을 통해 끝까지 유지한 덕이었다. 게다가 군부는 전황이 유리하다는 왜곡된 정보만을 국민들에게 전했기에 혼란은 가중되었다. 물자 부족으로 고생이기는 하나 아직 버틸 만하다 믿었던 독일인들은 조국이 전쟁에서 패한 게 아니라 내부의 배신으로 전쟁을 포기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목한 배신자는 바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선택된 기억
유럽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그 역사가 깊다. 늦어도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모습은 당대 유럽 사회가 바라보는 유대인의 고정관념이라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중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던 십자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일도 왕왕 존재했다.
▲ 사회주의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와 레프 트로츠키 /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어느 정도 수그러드는 것 같았으나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서유럽 내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 역시 어느 정도 반유대주의에서 기인한 바가 있는데 카를 마르크스와 레프 트로츠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새롭게 집권한 사회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이 점을 노렸다. 망명 중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병역을 기피하고 간첩질을 해 독일이 패배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인터뷰 내용을 재확인하던 기자는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Stab in the back)는 뜻입니까?”라 물었고 루덴도르프는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 답하며 음모론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이른바 ‘배후 중상설’의 시작이다.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에 반발한 독일인들은 배후 중상설의 기억을 선택했다. 킬 군항의 반란이 없었어도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란 점, 독일군으로 입대한 유대인의 비율이 일반 독일인을 웃돌았다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순무만 먹으며 치른 전쟁의 고난은 애국심의 증거로 미화되었고, 패전의 진짜 책임자인 전범들은 영웅처럼 숭배되었다.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은 이렇게 조작되었다.
▲ 1919년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엽서. 독일 군인의 등 뒤에 칼을 꽂는 유대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억의 대가
전후 왜곡된 독일인들의 기억은 기묘한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그들의 유대인 증오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과도한 배상금에 대공황이 겹친 경제난으로 더욱 가중되었고, 이 분노는 나치즘이라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앞세운 히틀러가 집권하는 토양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이 사실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는 착각은 전쟁에 대한 헛된 희망을 남기게 되었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기억이 조작되는 데는 그리 대단한 증거가 필요치 않다. 약간의 개연성과 목적의식, 감성에 대한 호소면 충분하다. 불과 몇 달 전의 기억도 이렇게 조작되는데, 수백 수천 년의 기억을 다루는 역사는 어떨 것인가. 사료적 근거가 불충분해도 그것이 대중의 감성에 합치하면 진실로 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것 자체로 정당성을 표방한다. 그러나 왜곡된 기억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나치 치하의 독일 국민이 잿더미가 된 국토 위에서 후회하였듯 말이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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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의 기억 - 등 뒤의 칼
1919년 11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두 발의 총탄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상 최초의
박문국
2017-10-17
배신자의 기억 - 등 뒤의 칼
1919년 11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두 발의 총탄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을 필두로 하는 동맹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지구상 유일한 문명 세계를 자처하던 유럽은 그 야만성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당대 유행하던 민족주의 및 애국심 열풍은 전쟁의 비극을 키웠다.
패전국인 독일은 전쟁 내내 ‘순무의 겨울’이라 불리는 비참한 상황을 이어가야만 했다. 영국의 해상 봉쇄 및 외교 단절로 인해 매년 겨울 식량이 떨어져 동물 사료로 쓰던 순무로 연명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 국민들은 자국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전후 독일인의 기억 속에 독일이 열세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패배의 기억
전쟁의 초반 양상은 분명 독일이 유리했다. 양면전선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프랑스를 굴복시킨 뒤 러시아로 진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슐리펜 계획은 독일군이 파리 앞 50여 킬로미터까지 진군하면서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부전선 또한 러시아를 상대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여 우위를 점했다.
▲ 슐리펜 계획을 세운 독일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 / 서부전선의 가장 치열한 참호전 중 하나인 솜(Somme) 전투 ©Ivor Castle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이 참전하며 서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동부전선에서의 우위는 이어갔으나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해야 했던 탓에 가시적인 이득을 볼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니 고립된 독일의 생산력만으로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서부전선의 최종방어선으로 설정된 힌데부르크 선이 붕괴된 후 동맹국이 차례로 항복하니 전황을 뒤집을 수 없음은 명백했다. 그러나 독일군 수뇌부는 여전히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고 킬 군항의 해군에게 출항을 명령한다. 연합군 해군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킬 군항의 해군은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반란을 일으키고, 이 반란에서 시작된 독일혁명으로 인해 황제인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된다. 이런 상황임에도 독일 국민들이 패전을 인정하지 못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종전 직전까지 알자스-로렌 정도를 제외한 독일 영토는 전장이 아니었다. 전쟁 초기 확장한 전선을 참호전을 통해 끝까지 유지한 덕이었다. 게다가 군부는 전황이 유리하다는 왜곡된 정보만을 국민들에게 전했기에 혼란은 가중되었다. 물자 부족으로 고생이기는 하나 아직 버틸 만하다 믿었던 독일인들은 조국이 전쟁에서 패한 게 아니라 내부의 배신으로 전쟁을 포기한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지목한 배신자는 바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선택된 기억
유럽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그 역사가 깊다. 늦어도 로마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의 모습은 당대 유럽 사회가 바라보는 유대인의 고정관념이라 볼 수 있다. 십자군 전쟁 중에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던 십자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일도 왕왕 존재했다.
▲ 사회주의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와 레프 트로츠키 /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는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어느 정도 수그러드는 것 같았으나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서유럽 내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회주의에 대한 반감 역시 어느 정도 반유대주의에서 기인한 바가 있는데 카를 마르크스와 레프 트로츠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새롭게 집권한 사회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이 점을 노렸다. 망명 중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병역을 기피하고 간첩질을 해 독일이 패배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인터뷰 내용을 재확인하던 기자는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Stab in the back)는 뜻입니까?”라 물었고 루덴도르프는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 답하며 음모론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이른바 ‘배후 중상설’의 시작이다.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에 반발한 독일인들은 배후 중상설의 기억을 선택했다. 킬 군항의 반란이 없었어도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란 점, 독일군으로 입대한 유대인의 비율이 일반 독일인을 웃돌았다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순무만 먹으며 치른 전쟁의 고난은 애국심의 증거로 미화되었고, 패전의 진짜 책임자인 전범들은 영웅처럼 숭배되었다. 불과 몇 달 전의 기억은 이렇게 조작되었다.
▲ 1919년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엽서. 독일 군인의 등 뒤에 칼을 꽂는 유대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억의 대가
전후 왜곡된 독일인들의 기억은 기묘한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그들의 유대인 증오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과도한 배상금에 대공황이 겹친 경제난으로 더욱 가중되었고, 이 분노는 나치즘이라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앞세운 히틀러가 집권하는 토양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이 사실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는 착각은 전쟁에 대한 헛된 희망을 남기게 되었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기억이 조작되는 데는 그리 대단한 증거가 필요치 않다. 약간의 개연성과 목적의식, 감성에 대한 호소면 충분하다. 불과 몇 달 전의 기억도 이렇게 조작되는데, 수백 수천 년의 기억을 다루는 역사는 어떨 것인가. 사료적 근거가 불충분해도 그것이 대중의 감성에 합치하면 진실로 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것 자체로 정당성을 표방한다. 그러나 왜곡된 기억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는 법이다. 나치 치하의 독일 국민이 잿더미가 된 국토 위에서 후회하였듯 말이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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