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즐거운 상호작용이다.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동일인일 경우, 아무래도 음식의 맛은 덜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찾은 인생을 손맛이 담긴 요리로 은유한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1994년 영화 <음식남녀>에서 극중 요리사 주사부가 펼치는 요리의 향연은 여전히 경이로운 장면들로 남아있다. 반전이 돋보이는 대사의 마지막 “남이 만든 걸 먹으니까 비로소 음식 맛을 느낀다!”는 주사부의 회한도 기억난다.
그러고 보면 요리란 만든 자와 먹는 자의 숨결과 애정의 교환일 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타인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라 할 음악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당연히 음악은 요리를, 음식을 자꾸자꾸 꼬드겨 불러낸다. 일본 대중문화 수입금지에 따라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공중파 방송을 타지 못하는 저 옛날 일본가수 사카모토 큐의 노래 ‘스키야키Sukiyaki’가 있다.
일본어로 된 이 곡의 원제는 ‘위를 보고 걷자’라는 뜻의 ‘우에 오 무이테 아르코(上を向いて歩こ)로 실연을 당한 남자의 비애를 담은 전형적인 러브송이다. 우연히 일본에 들렀다가 이 곡을 듣고 반한 영국의 레코드사 대표가 구미에 전하면서 급기야 일본어임에도 불구하고 1963년에 영국에서 히트했고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의 정상에도 올랐다. 그런데 곡목이 서구인들에게 너무 까다로운 동양 언어라는 게 문제였다.
레코드사 대표는 그나마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일본어인 요리 ‘스키야키’를 제목으로 붙였다. 음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노랫말이었지만 대중적 전달이란 명분으로 자행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뉴스위크>는 “이건 ‘문 리버’에다 ‘소고기 스튜’란 제목을 단 꼴”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곡은 1981년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라는 디스코 여성듀엣이, 1994년에는 흑인그룹 포피엠(4.P.M.)이 아카펠라로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못지않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억지춘향의 작명에도 불구하고 명곡으로 남았다는 것은 한편으로 너그럽게 보면 음악과 음식이 상호선린(?) 관계에 있음의 증명이 아닐까. 그 가까움은 상기했듯 소통의 채널이라는 점에서다.
우리는 친한 사이거나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 함께 식사를 한다. ‘밥 한번 먹자!’는 가장 흔한 인사 중 하나다. 그 친함의 끝판 커뮤니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이다. 가족은 식구(食口)라는 말이 증명하듯 음식 공동체다. 가족애와 고향 그리고 어머님의 음식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언어다. 가족은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며 소박하고 진실한 소통을 일궈낸다.
일본이 스키야키, 미국이 비프스테이크라면 우리는 된장국 아니면 김치찌개 아닌가. 원조 K팝 걸 그룹인 김시스터즈의 ‘김치 깍두기’는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라면 누구나 공감의 눈시울을 적셨던 노래다. ‘낯설은 타국 땅에 몇몇 해를 살면서 고향 생각 그리워/ 오나가나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프스테이크 맛 좋다고 자랑 쳐도/ 우리나라 된장찌개 고추장만 못 하더라/ 코리아의 천하 진미 뚝배기에 된장찌개/ 자나 깨나 잊지 못할 된장찌개더라’ 지금도 어버이날이면 라디오 전파를 타는 1980년 박양숙의 곡 ‘어부의 노래’도 그렇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는 그 곳/ 아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힙합의 대형(大兄)’으로 불리는 최자와 개코의 팀 ‘다이내믹 듀오’에게도 유사한 곡이 있다. ‘어머니의 된장국’이다. 노래는 생계의 고통에 시달리는 소시민 직장인에게 고향의 어머니가 전하는 구수한 위로이다. ‘집에 못 가고 밤낮으로 일 하네/ 배보다 더 휴식이 고픈 / 삶처럼 밥이 퍽퍽해 물 말아 먹는/ 오늘도 소주 한 병으로/ 저녁을 때우는 지친/ 그에게 필요한 건 바로/ 어어어어어어∼ 어머니의 된장국/ 담백하고 맛있는 그 음식이 그리워’
누구나 저마다 요리에 대한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은 그 가족의 역사와 문화의 축적물이다. 그 어떤 요리도 일품인 모친의 손맛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 아니면 ‘오래된 미래’일지 모른다. 산울림의 김창완은 ‘어머니와 고등어’를 두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 고마움, 미안함, 철없음이 뒤엉킨 너무나 슬픈 노래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보다/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구일 먹을 수 있네/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걸’
우리에게 요리와 음식은 이처럼 가족정서의 발현이지만 서구의 경우는 함께 먹고 즐기는 축제, 즉 카니발 혹은 페스티벌의 정서에 가깝다. ‘소란스런 티보도, 판테노에/ 친척들이 예쁜 이본느를 보러 와서/ 쫙 빼입고 아주 흥겹게 놀지, 나나나나~/ 아싸~ 우린 강 후미에서 신나게 놀자/ 잠발라야와 왕새우 파이와 지느러미 고기 수프가 있고/ 오늘 밤 난 소중한 내 친구를 보러 거기 내려 갈거야/ 기타치고 과일 단지 채우고/ 즐겁게 놀아제끼자’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크레욜 푸드 ‘잠발라야Jambalaya’를 제목으로 내건 이 노래는 컨트리음악 전설 행크 윌리암스의 곡이 오리지널이지만 1970년대 우리에게는 카펜터스(Carpenters)의 버전으로 유명하다. 워낙 즐겁고 경쾌한 템포와 리듬에다 왁자지껄한 가사 때문에 라디오 프로의 첫 곡으로 자주 선곡되곤 했다.
우리도 최근 ‘먹방’의 대중화와 요리가 갖는 사회적 가치의 창발로 갈수록 요리가 정(情)의 가치에서 축제적 요소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음식 관련 노래도 증가 추세이다.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주의사항 팥 조릴 때 설탕은 충분히/ 찰떡 젤리 크림 연유 빠지면 섭섭해/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윤종신’팥빙수’) ‘예전에 김밥 속에 단무지 하나/ 요새 김치에 치즈 참치가’(자두 ‘김밥’) 이 맛이야 대박이 나버렸지/ 신이 난 아줌마들과/ 우리의 오뎅들’(미스터 펑키 ’떡볶이와 오뎅’)
집콕, 혼술, 혼밥의 솔로족도 요리는 이제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다. 매번 사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만의 취향과 방식으로 창의적 먹거리를 꾸려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넌 is 뭔들’의 노래 잘하는 걸 그룹 ‘마마무’는 ‘나만의 레시피’라는 노래로 시의적 위안을 제공한다. ‘오늘 뭐 먹을까/ 햄 계란 참치 밥/ 섞어, 섞어, 섞어/ 오늘 내가 쉐프/ 냉장고를 부탁해/ No more No more Recipe’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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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co a poco : 먹고 만드는 요리, 그 소통의 아름다움
임진모
2017-07-13
먹고 만드는 요리, 그 소통의 아름다움
요리는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의 즐거운 상호작용이다.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동일인일 경우, 아무래도 음식의 맛은 덜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찾은 인생을 손맛이 담긴 요리로 은유한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1994년 영화 <음식남녀>에서 극중 요리사 주사부가 펼치는 요리의 향연은 여전히 경이로운 장면들로 남아있다. 반전이 돋보이는 대사의 마지막 “남이 만든 걸 먹으니까 비로소 음식 맛을 느낀다!”는 주사부의 회한도 기억난다.
그러고 보면 요리란 만든 자와 먹는 자의 숨결과 애정의 교환일 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타인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라 할 음악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당연히 음악은 요리를, 음식을 자꾸자꾸 꼬드겨 불러낸다. 일본 대중문화 수입금지에 따라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공중파 방송을 타지 못하는 저 옛날 일본가수 사카모토 큐의 노래 ‘스키야키Sukiyaki’가 있다.
▲ 스키야키©Dave Nakayama_flickr.com (우)
일본어로 된 이 곡의 원제는 ‘위를 보고 걷자’라는 뜻의 ‘우에 오 무이테 아르코(上を向いて歩こ)로 실연을 당한 남자의 비애를 담은 전형적인 러브송이다. 우연히 일본에 들렀다가 이 곡을 듣고 반한 영국의 레코드사 대표가 구미에 전하면서 급기야 일본어임에도 불구하고 1963년에 영국에서 히트했고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의 정상에도 올랐다. 그런데 곡목이 서구인들에게 너무 까다로운 동양 언어라는 게 문제였다.
레코드사 대표는 그나마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일본어인 요리 ‘스키야키’를 제목으로 붙였다. 음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노랫말이었지만 대중적 전달이란 명분으로 자행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뉴스위크>는 “이건 ‘문 리버’에다 ‘소고기 스튜’란 제목을 단 꼴”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곡은 1981년 ‘어 테이스트 오브 허니’라는 디스코 여성듀엣이, 1994년에는 흑인그룹 포피엠(4.P.M.)이 아카펠라로 리메이크해 오리지널 못지않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억지춘향의 작명에도 불구하고 명곡으로 남았다는 것은 한편으로 너그럽게 보면 음악과 음식이 상호선린(?) 관계에 있음의 증명이 아닐까. 그 가까움은 상기했듯 소통의 채널이라는 점에서다.
우리는 친한 사이거나 친한 사이가 되기 위해 함께 식사를 한다. ‘밥 한번 먹자!’는 가장 흔한 인사 중 하나다. 그 친함의 끝판 커뮤니티는 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이다. 가족은 식구(食口)라는 말이 증명하듯 음식 공동체다. 가족애와 고향 그리고 어머님의 음식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언어다. 가족은 요리를 만들어 함께 먹고 대화를 나누며 소박하고 진실한 소통을 일궈낸다.
일본이 스키야키, 미국이 비프스테이크라면 우리는 된장국 아니면 김치찌개 아닌가. 원조 K팝 걸 그룹인 김시스터즈의 ‘김치 깍두기’는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라면 누구나 공감의 눈시울을 적셨던 노래다. ‘낯설은 타국 땅에 몇몇 해를 살면서 고향 생각 그리워/ 오나가나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프스테이크 맛 좋다고 자랑 쳐도/ 우리나라 된장찌개 고추장만 못 하더라/ 코리아의 천하 진미 뚝배기에 된장찌개/ 자나 깨나 잊지 못할 된장찌개더라’ 지금도 어버이날이면 라디오 전파를 타는 1980년 박양숙의 곡 ‘어부의 노래’도 그렇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푸른 물결 춤추는 그 곳/ 아 저 멀리서 어머님이 나를 부른다’ ‘힙합의 대형(大兄)’으로 불리는 최자와 개코의 팀 ‘다이내믹 듀오’에게도 유사한 곡이 있다. ‘어머니의 된장국’이다. 노래는 생계의 고통에 시달리는 소시민 직장인에게 고향의 어머니가 전하는 구수한 위로이다. ‘집에 못 가고 밤낮으로 일 하네/ 배보다 더 휴식이 고픈 / 삶처럼 밥이 퍽퍽해 물 말아 먹는/ 오늘도 소주 한 병으로/ 저녁을 때우는 지친/ 그에게 필요한 건 바로/ 어어어어어어∼ 어머니의 된장국/ 담백하고 맛있는 그 음식이 그리워’
누구나 저마다 요리에 대한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은 그 가족의 역사와 문화의 축적물이다. 그 어떤 요리도 일품인 모친의 손맛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 아니면 ‘오래된 미래’일지 모른다. 산울림의 김창완은 ‘어머니와 고등어’를 두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 고마움, 미안함, 철없음이 뒤엉킨 너무나 슬픈 노래라고 설명한 바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보다/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구일 먹을 수 있네/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걸’
우리에게 요리와 음식은 이처럼 가족정서의 발현이지만 서구의 경우는 함께 먹고 즐기는 축제, 즉 카니발 혹은 페스티벌의 정서에 가깝다. ‘소란스런 티보도, 판테노에/ 친척들이 예쁜 이본느를 보러 와서/ 쫙 빼입고 아주 흥겹게 놀지, 나나나나~/ 아싸~ 우린 강 후미에서 신나게 놀자/ 잠발라야와 왕새우 파이와 지느러미 고기 수프가 있고/ 오늘 밤 난 소중한 내 친구를 보러 거기 내려 갈거야/ 기타치고 과일 단지 채우고/ 즐겁게 놀아제끼자’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의 크레욜 푸드 ‘잠발라야Jambalaya’를 제목으로 내건 이 노래는 컨트리음악 전설 행크 윌리암스의 곡이 오리지널이지만 1970년대 우리에게는 카펜터스(Carpenters)의 버전으로 유명하다. 워낙 즐겁고 경쾌한 템포와 리듬에다 왁자지껄한 가사 때문에 라디오 프로의 첫 곡으로 자주 선곡되곤 했다.
우리도 최근 ‘먹방’의 대중화와 요리가 갖는 사회적 가치의 창발로 갈수록 요리가 정(情)의 가치에서 축제적 요소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음식 관련 노래도 증가 추세이다.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주의사항 팥 조릴 때 설탕은 충분히/ 찰떡 젤리 크림 연유 빠지면 섭섭해/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윤종신’팥빙수’) ‘예전에 김밥 속에 단무지 하나/ 요새 김치에 치즈 참치가’(자두 ‘김밥’) 이 맛이야 대박이 나버렸지/ 신이 난 아줌마들과/ 우리의 오뎅들’(미스터 펑키 ’떡볶이와 오뎅’)
집콕, 혼술, 혼밥의 솔로족도 요리는 이제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다. 매번 사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만의 취향과 방식으로 창의적 먹거리를 꾸려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넌 is 뭔들’의 노래 잘하는 걸 그룹 ‘마마무’는 ‘나만의 레시피’라는 노래로 시의적 위안을 제공한다. ‘오늘 뭐 먹을까/ 햄 계란 참치 밥/ 섞어, 섞어, 섞어/ 오늘 내가 쉐프/ 냉장고를 부탁해/ No more No more Recipe’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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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Poco a poco : 먹고 만드는 요리, 그 소통의 아름다움'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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