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육수는 노을 빛처럼 비치고
옥색의 가루가 눈꽃처럼 흩어진다.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입 속에서 살아나고
옷을 더 입어야 할 정도로 그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
나그네 시름으로 부터 해소 되리니
고향의 꿈 다시는 괴롭히지 않으리라.
-장유, ‘자장냉면(紫漿冷麪: 자줏빛 냉면)’ 중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장유의 문집 『계곡집』에 수록된 이 시는 냉면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냉면 육수의 색이 자줏빛인 것은 오미자즙을 넣었기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고향에 대한 생각까지 잊게 만들 정도니 그 맛이 정말 대단했던 듯하다.
이후로도 냉면에 대한 기록은 여럿 나온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유득공은 평양을 여행하면서 『서경잡절』이란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평양에 냉면이 크게 유행하고 있으며 냉면 때문에 돼지 수육의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정약용 또한 곡산부사로 재임할 때 ‘관서(평안도)에서는 눈이 쌓이면 노루고기를 구워 냉면과 함께 먹는다’는 내용의 시를 썼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평양의 냉면이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의 시에서는 지금 시각으로 보기에는 의아한 대목도 나타난다. 바로 눈이 쌓였을 때 먹는다는 점이다. 원래 냉면은 겨울에 먹는 음식으로, 조선의 세시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는 냉면을 11월에 먹는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온도를 조절하기 힘든 과거 온돌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인데, 바닥이 너무 뜨거워지면 그 열을 식히기 위해 먹던 음식이 냉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함흥냉면, 흔히 비빔냉면이라 불리는 형태는 원래 냉면이라 일컬어지지 않았다. 함흥냉면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정착한 함흥 출신의 실향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회국수를 변형해 발전시킨 음식이기 때문이다. 냉면이라면 어디까지나 시원한 육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대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찌되었든 빠르게 대중화 된 냉면은 평안남도의 주막 어디서나 맛볼 수 있었고 조선 후기 상품경제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유행을 타게 된다. 심지어 배달까지 된 것으로 보이는데, 황윤석의 <이재일기>에는 1768년 과거 시험을 보는 도중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8세기 즈음부터는 배달음식으로써의 위상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한철이 그린 이유원 초상
흥미로운 것은 일반인 뿐 아니라 무려 임금까지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점이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순조가 달구경을 하던 중 시장기를 느껴 냉면을 포장해오라 한 일이 있다. 이때 한 신하가 약간의 돼지고기를 가져왔는데 순조가 “그건 무엇하러 가져왔냐”고 물으니 그 신하는 “냉면에 넣어 먹기 위해 고기를 가져왔다”고 답한다. 문제는 그 양이 본인 혼자 먹을 양이었다는 것. 당시 막 10살을 넘긴 순조는 이 눈치 없는 신하가 얄미웠는지 그 신하만 빼놓고 냉면을 골고루 나눠줬다고 한다. 문제의 신하에게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굳이 나눠줄 필요가 없다며 핀잔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일화는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당대 냉면의 문화적 특징을 추측케 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임금이 밖에서 무엇을 사다 먹는 일은 흔치 않다. 밖에서 가져온 음식에 어떤 위험한 것이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라간에 음식을 만들게 지시하는 게 보통인데,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냉면의 제조법이 궁중에까지 전파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냉면은 원래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고, 이런 서민 문화가 아래에서 위로 전파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전근대 시대에 하위계층의 문화가 상류계층으로 전파되는 예는 그리 많지 않지만 냉면은 그러한 예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원함과 맛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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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차가운 면의 문화 – 냉면
박문국
2017-07-11
차가운 면의 문화 – 냉면
자줏빛 육수는 노을 빛처럼 비치고
옥색의 가루가 눈꽃처럼 흩어진다.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그 맛이 입 속에서 살아나고
옷을 더 입어야 할 정도로 그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뚫는다.
나그네 시름으로 부터 해소 되리니
고향의 꿈 다시는 괴롭히지 않으리라.
-장유, ‘자장냉면(紫漿冷麪: 자줏빛 냉면)’ 중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장유의 문집 『계곡집』에 수록된 이 시는 냉면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냉면 육수의 색이 자줏빛인 것은 오미자즙을 넣었기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고향에 대한 생각까지 잊게 만들 정도니 그 맛이 정말 대단했던 듯하다. 이후로도 냉면에 대한 기록은 여럿 나온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유득공은 평양을 여행하면서 『서경잡절』이란 기록을 남겼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평양에 냉면이 크게 유행하고 있으며 냉면 때문에 돼지 수육의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정약용 또한 곡산부사로 재임할 때 ‘관서(평안도)에서는 눈이 쌓이면 노루고기를 구워 냉면과 함께 먹는다’는 내용의 시를 썼는데, 지금과 마찬가지로 평양의 냉면이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의 시에서는 지금 시각으로 보기에는 의아한 대목도 나타난다. 바로 눈이 쌓였을 때 먹는다는 점이다. 원래 냉면은 겨울에 먹는 음식으로, 조선의 세시 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는 냉면을 11월에 먹는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온도를 조절하기 힘든 과거 온돌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인데, 바닥이 너무 뜨거워지면 그 열을 식히기 위해 먹던 음식이 냉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함흥냉면, 흔히 비빔냉면이라 불리는 형태는 원래 냉면이라 일컬어지지 않았다. 함흥냉면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정착한 함흥 출신의 실향민들이 고향에서 먹던 회국수를 변형해 발전시킨 음식이기 때문이다. 냉면이라면 어디까지나 시원한 육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대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찌되었든 빠르게 대중화 된 냉면은 평안남도의 주막 어디서나 맛볼 수 있었고 조선 후기 상품경제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유행을 타게 된다. 심지어 배달까지 된 것으로 보이는데, 황윤석의 <이재일기>에는 1768년 과거 시험을 보는 도중 냉면을 시켜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8세기 즈음부터는 배달음식으로써의 위상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한철이 그린 이유원 초상
흥미로운 것은 일반인 뿐 아니라 무려 임금까지 냉면을 시켜먹었다는 점이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따르면 순조가 달구경을 하던 중 시장기를 느껴 냉면을 포장해오라 한 일이 있다. 이때 한 신하가 약간의 돼지고기를 가져왔는데 순조가 “그건 무엇하러 가져왔냐”고 물으니 그 신하는 “냉면에 넣어 먹기 위해 고기를 가져왔다”고 답한다. 문제는 그 양이 본인 혼자 먹을 양이었다는 것. 당시 막 10살을 넘긴 순조는 이 눈치 없는 신하가 얄미웠는지 그 신하만 빼놓고 냉면을 골고루 나눠줬다고 한다. 문제의 신하에게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굳이 나눠줄 필요가 없다며 핀잔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일화는 이야기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당대 냉면의 문화적 특징을 추측케 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임금이 밖에서 무엇을 사다 먹는 일은 흔치 않다. 밖에서 가져온 음식에 어떤 위험한 것이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라간에 음식을 만들게 지시하는 게 보통인데,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냉면의 제조법이 궁중에까지 전파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냉면은 원래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고, 이런 서민 문화가 아래에서 위로 전파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전근대 시대에 하위계층의 문화가 상류계층으로 전파되는 예는 그리 많지 않지만 냉면은 그러한 예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시원함과 맛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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