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마을’이란 어휘와 살아가고 있다. 아주 오래된 단어지만 외세에 밀려 주춤하더니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마을이란 말을 붙이는 게 마치 유행이 됐다. 심하게 말하면 걸핏하면 ‘마을’이다. 영어마을, 한우마을, 마을기업, 체험마을, 한옥마을, 벽화마을, 서래마을, 봉하마을 등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 어떤 이미지 혹은 정체성과 지향을 그 말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강했던 옛날에는 사실 마을이 아닌 ‘타운’이나 ‘빌리지’란 표현이 성행했다.
노래 쪽도 빠질 수 없다. 시인 백창우가 주도한 노래모임으로 1986년 첫 앨범을 낸 ‘노래마을’을 비롯해 ‘섬마을선생님’ ‘내 고향 마을’ ‘시인의 마을’까지. 사실 마을이 어떤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가는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한 곡으로 충분하다.
‘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어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손수건과 탈춤의 장단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빡빡하고 매정한 현대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들이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생계터전인 도시는 결코 이런 향수와 더불어 사는 삶의 감성을 전해주지 못한다. ‘도회지 밖에 비교적 소수의 살림집들을 구성요소로 하여 한 떼를 이루고 있는 지연(地緣)단체’, 바로 마을이라야 가능하다. 노래를 부르는 정태춘의 목소리와 부르는 방식도 ‘마을’ 노래답게 모던한 장식이나 기교 없이 소박하다. 사람 냄새, 땀 냄새가 난다.
마을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공동체’와 동의어다. 모든 게 ‘나’로 원자화해 ‘홀로’ ‘혼밥’ ‘혼술’ ‘모태솔로’와 같은 소외적 개인주의 트렌드 속에서 완전히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함께 하는 삶, 마을 공동체의 삶이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불어 삶’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하고 그리워한다. 마을과 마실이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라면 그 극점은 고향마을일 것이다.
‘산딸기 물에 흘러 떠나가도 두 번 다시/ 타향에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 불며 노래하면서/ 너와 살련다.’(배호의 ‘두메산골’ 중에서)
고향마을은 비단 우리만의 문화가 아니다. 19~20세기의 키워드라고 할 디아스포라(이주, 이민)에 의해 유럽이든 아프리카든 상당수 사람들이 경제적, 종교적, 신분상승 등의 이유로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사회학자 윌리엄 H. 화이트주니어는 저서 『조직 속의 인간』에서 “고향에서 떠난 인간이란 미국 사회에 있어선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미국사회를 푸는 열쇠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학자들은 “현대문명은 고향을 떠나는 데서 시작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니 현대의 기계적이고 비정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마을을 그리거나 돌아가고 싶은 정서는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대중가요는 이런 속성을 담고 포개는 제1의 그릇이다. 고향마을(홈타운) 관련 노래들은 저 옛날부터 지금까지 넘쳐날 만큼 압도적으로 많다. 1988년생으로 이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최고 인기의 여가수 아델(Adele)도, 고향마을과 결부된 이미지의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09년 ‘홈타운 글로리’ 즉 ‘고향마을의 영광’이란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다. ‘고향을 둘러보니/ 기억들이 새롭네/ 고향을 둘러보니/ 오,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그야말로 세상의 경이로움이네.’ 경이로움(Wonders)으로 표현한 살가움, 따스함, 너그러움, 부드러움을 어찌 도회지 생활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 도처에 청산이 있다 하되 고국산천의 그리움이 그칠 줄이 있을까.’
물론 고향이 살갑거나 정겨운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수년이 흘러도 조금도 바뀌지 않는 고향마을은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고향마을이 눈에 어른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적 속도와 변화무쌍을 찬양하는 사람들, 아니 이미 도회적 삶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고향의 답답한 이미지와의 결별을 꾀한다. 1970년에 헤어진 ‘20세기의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이 1975년에 모처럼 재결합해 내놓은 노래 ‘나의 작은 고향(My Little Town)’에서 그려진 고향마을은 단조로움 그 자체다. ‘무지개의 색깔은 온통 검은 색이야/ 거기에 색깔이 없는 게 아니라/ 상상력이 없을 뿐이지/ 내 고향에선 모든 게 그대로라네/ 내 고향에선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뿐이라네.’
고향이다 마을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상상 속 고향의 이미지는 공업화와 개발의 갈등으로 인한 상처로 얼룩져있기도 하다. ‘미국에서 태어나’라는 노래로 전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신애국주의 붐을 일으킨 노동계급의 대변자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이 노래 ‘내 고향마을(My hometown)’을 통해 바라보는 아버지의 땅은 철저히 파괴된, 황폐화의 초상이다. 인종갈등과 극심한 경기침체로 붕괴된 고향을 떠나며 서른다섯 살 노래주인공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 봐두어라. 이게 네 홈타운이란다!” ‘호텔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이글스의 명곡이 ‘뉴 키드 인 타운(New Kid in Town)’, 즉 ‘우리 마을의 새 녀석’이다. 여기서 우리 마을은 사람을 포옹하고 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때가 되면 새로운 사람들로 갈아버리고 배제하는 인생무상의 단면적 공간으로 은유되고 있다. ‘자니가 막 왔어. 우리 마을의 새 녀석/ 네가 없을 때도 그녀가 여전히 너를 사랑해줄까/ 해야 할 말은 너무 많았지만/ 매일 밤 너는 그녀를 안고 다독여야 해/ 어깨 위에는 눈물이 떨어지지.’ 상기한 곡들은 허울 좋은 말로만, 공상(空想)의 속죄로만 존재하는 고향과 마을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꼬집는 메시지로써 부정성을 부각하고 있다. 비록 마을과 사실상 대척점에 있는 도시가 비록 마을의 온기는 없으되 도시의 습기, 그 묘한 매력이 산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면에서는 공허하고 심지어는 산업적 터치로만 가득한 ‘마을’이란 타이틀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환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소한이라도 순수함과 자연미 그리고 공동체 의식을 맛보기 위해 마을을 찾아 기웃거린다. 사실 음악이 매체와 대량복제를 만나 대중화하기 이전의 민요전통은 공동체 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음악은 결국 공동체를 향하고 마을로 가는 것이 운명적 행보가 아닐까.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는 1966년 어린아이들의 꿈을 위한 노래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을 만들었다.‘내가 태어난 마을에/ 한 선원이 살았어요/ 그는 잠수함 속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우리들에게 들려주었어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선원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삶, 잠수함이라는 동화적 상상과 순수 그리고 마을이 있다. 어디까지나 시작은 마을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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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co a poco : 마을 - 순수와 공동체
임진모
2017-06-12
마을 - 순수와 공동체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마을’이란 어휘와 살아가고 있다. 아주 오래된 단어지만 외세에 밀려 주춤하더니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마을이란 말을 붙이는 게 마치 유행이 됐다. 심하게 말하면 걸핏하면 ‘마을’이다. 영어마을, 한우마을, 마을기업, 체험마을, 한옥마을, 벽화마을, 서래마을, 봉하마을 등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에 어떤 이미지 혹은 정체성과 지향을 그 말에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강했던 옛날에는 사실 마을이 아닌 ‘타운’이나 ‘빌리지’란 표현이 성행했다.
노래 쪽도 빠질 수 없다. 시인 백창우가 주도한 노래모임으로 1986년 첫 앨범을 낸 ‘노래마을’을 비롯해 ‘섬마을선생님’ ‘내 고향 마을’ ‘시인의 마을’까지. 사실 마을이 어떤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가는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한 곡으로 충분하다.
‘누가 내게 손수건 한 장 던져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얹어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손수건과 탈춤의 장단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빡빡하고 매정한 현대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들이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생계터전인 도시는 결코 이런 향수와 더불어 사는 삶의 감성을 전해주지 못한다. ‘도회지 밖에 비교적 소수의 살림집들을 구성요소로 하여 한 떼를 이루고 있는 지연(地緣)단체’, 바로 마을이라야 가능하다. 노래를 부르는 정태춘의 목소리와 부르는 방식도 ‘마을’ 노래답게 모던한 장식이나 기교 없이 소박하다. 사람 냄새, 땀 냄새가 난다.
마을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공동체’와 동의어다. 모든 게 ‘나’로 원자화해 ‘홀로’ ‘혼밥’ ‘혼술’ ‘모태솔로’와 같은 소외적 개인주의 트렌드 속에서 완전히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함께 하는 삶, 마을 공동체의 삶이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불어 삶’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하고 그리워한다. 마을과 마실이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라면 그 극점은 고향마을일 것이다.
‘산딸기 물에 흘러 떠나가도 두 번 다시/ 타향에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 불며 노래하면서/ 너와 살련다.’(배호의 ‘두메산골’ 중에서)
고향마을은 비단 우리만의 문화가 아니다. 19~20세기의 키워드라고 할 디아스포라(이주, 이민)에 의해 유럽이든 아프리카든 상당수 사람들이 경제적, 종교적, 신분상승 등의 이유로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사회학자 윌리엄 H. 화이트주니어는 저서 『조직 속의 인간』에서 “고향에서 떠난 인간이란 미국 사회에 있어선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그것은 미국사회를 푸는 열쇠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학자들은 “현대문명은 고향을 떠나는 데서 시작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니 현대의 기계적이고 비정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마을을 그리거나 돌아가고 싶은 정서는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대중가요는 이런 속성을 담고 포개는 제1의 그릇이다. 고향마을(홈타운) 관련 노래들은 저 옛날부터 지금까지 넘쳐날 만큼 압도적으로 많다. 1988년생으로 이 시대를 주름잡고 있는 최고 인기의 여가수 아델(Adele)도, 고향마을과 결부된 이미지의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009년 ‘홈타운 글로리’ 즉 ‘고향마을의 영광’이란 제목의 노래를 발표했다. ‘고향을 둘러보니/ 기억들이 새롭네/ 고향을 둘러보니/ 오, 내가 만난 사람들이란/ 그야말로 세상의 경이로움이네.’ 경이로움(Wonders)으로 표현한 살가움, 따스함, 너그러움, 부드러움을 어찌 도회지 생활에서 구할 수 있겠는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 도처에 청산이 있다 하되 고국산천의 그리움이 그칠 줄이 있을까.’
물론 고향이 살갑거나 정겨운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수년이 흘러도 조금도 바뀌지 않는 고향마을은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고향마을이 눈에 어른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적 속도와 변화무쌍을 찬양하는 사람들, 아니 이미 도회적 삶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고향의 답답한 이미지와의 결별을 꾀한다. 1970년에 헤어진 ‘20세기의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이 1975년에 모처럼 재결합해 내놓은 노래 ‘나의 작은 고향(My Little Town)’에서 그려진 고향마을은 단조로움 그 자체다. ‘무지개의 색깔은 온통 검은 색이야/ 거기에 색깔이 없는 게 아니라/ 상상력이 없을 뿐이지/ 내 고향에선 모든 게 그대로라네/ 내 고향에선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뿐이라네.’
고향이다 마을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상상 속 고향의 이미지는 공업화와 개발의 갈등으로 인한 상처로 얼룩져있기도 하다. ‘미국에서 태어나’라는 노래로 전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신애국주의 붐을 일으킨 노동계급의 대변자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이 노래 ‘내 고향마을(My hometown)’을 통해 바라보는 아버지의 땅은 철저히 파괴된, 황폐화의 초상이다. 인종갈등과 극심한 경기침체로 붕괴된 고향을 떠나며 서른다섯 살 노래주인공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잘 봐두어라. 이게 네 홈타운이란다!” ‘호텔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이글스의 명곡이 ‘뉴 키드 인 타운(New Kid in Town)’, 즉 ‘우리 마을의 새 녀석’이다. 여기서 우리 마을은 사람을 포옹하고 포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때가 되면 새로운 사람들로 갈아버리고 배제하는 인생무상의 단면적 공간으로 은유되고 있다. ‘자니가 막 왔어. 우리 마을의 새 녀석/ 네가 없을 때도 그녀가 여전히 너를 사랑해줄까/ 해야 할 말은 너무 많았지만/ 매일 밤 너는 그녀를 안고 다독여야 해/ 어깨 위에는 눈물이 떨어지지.’ 상기한 곡들은 허울 좋은 말로만, 공상(空想)의 속죄로만 존재하는 고향과 마을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꼬집는 메시지로써 부정성을 부각하고 있다. 비록 마을과 사실상 대척점에 있는 도시가 비록 마을의 온기는 없으되 도시의 습기, 그 묘한 매력이 산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면에서는 공허하고 심지어는 산업적 터치로만 가득한 ‘마을’이란 타이틀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환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소한이라도 순수함과 자연미 그리고 공동체 의식을 맛보기 위해 마을을 찾아 기웃거린다. 사실 음악이 매체와 대량복제를 만나 대중화하기 이전의 민요전통은 공동체 의식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음악은 결국 공동체를 향하고 마을로 가는 것이 운명적 행보가 아닐까.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는 1966년 어린아이들의 꿈을 위한 노래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을 만들었다.‘내가 태어난 마을에/ 한 선원이 살았어요/ 그는 잠수함 속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우리들에게 들려주었어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선원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삶, 잠수함이라는 동화적 상상과 순수 그리고 마을이 있다. 어디까지나 시작은 마을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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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Poco a poco : 마을 - 순수와 공동체'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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