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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philo : 운명이라는 창문을 넘어선 백세 노인의 모험극 - 플렉스 할그렌 감독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화정

2016-12-20

운명이라는 창문을 넘어선 백세 노인의 모험극

플렉스 할그렌 감독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지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앞으로 남은 수명을 대비해 학업은 그만두려고 한다. 공부를 하는 대신 사업을 꾸리는 게 비용 대비, 더 수익이 많다.” 그는 공부를 할 경우와 아닌 경우의 비용을 꽤 정확하게 수치화해, 미래의 계획을 충실하게 세워두었다. 웃어 넘겼지만 한편으로 인생 사업이 그렇게 의지대로, 정확하게 투자 대비 수익이 산출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주어진 운명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점점 스릴 있는 모험극처럼 느껴진다. 어려우면서도 자꾸 도전하게 된다는 일종의 규칙을 가지고 있달까. 인생은 정해진 문양 없이, 언제든 나의 의지와 운명의 힘이 팽팽하게 맞서거나 때로 상호 연관하여 패턴이 달라져버린다. 그 교직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테고, 작은 변수 하나에도 예측불가의 형태로 구현될 것이다. 나카지마 요시미치의 저서 『니체의 인간학』을 보면 “운명이란 나를 덮친 일과 내가 일으킨 일 사이의 간극이 몹시 작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나를 덮친(듯이 보이는) 일이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관련되어 있고, 내가 일으킨(듯이 보이는) 일이라도 그 밖의 무수한 요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니체가 정의하는 약하고, 안전을 추구하고, 동정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강한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운명에 자신을 맡긴 채 책임회피나 다른 곳에 의지하지 않는 강한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일 테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무려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노인 알란 칼슨(로베르트 구스타프손)의 모험을 통해 한 인간에게 닥친 운명과 의지의 문제를 잘 짚어본 영화다. 영화는 양로원 직원들이 100개나 되는 초를 꽂고 100세 생일을 기념하는 파티를 마련하는 동안, 알란이 방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가며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창문을 뛰어넘는 모습

 

눈도 침침하고, 귀도 멀고, 걸음도 느린 할아버지가 창문을 뛰어넘는 ‘액션’으로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는 포문을 연다. 미루어 짐작컨대 100세이라면 지난 삶을 정리하고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태도를 보일만 한데, 알란의 100세 생일은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는 날이 된다. 양로원을 나온 할아버지는 우연히도, 버스터미널에서 범죄조직의 검은 돈가방을 떠맡게 된다. 알란은 돈가방을 ‘탈취’할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범죄조직원인 청년과 알란 사이의 불통 결과, 알란이 돈가방을 탈취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기막힌 운명이자 해프닝이다. 덕분에 알란은 불량 청년들과 베테랑 형사들의 추격전에 휘말리게 된다. 이후 100살 노인이 맞닥뜨리는 모험이 대단하다. 100세 노인인 알란의 보폭은 노인의 느린 걸음 그대로인데, 하늘이 돕는 건지 예상외로 이 할아버지는 뒤따라오는 조직을 너무 잘 피해 나가 추격전은 한층 흥미진진해 진다. 알란은 돈에 대한 욕심도 없지만, 그렇다고 또 굳이 돈가방을 돌려줄 의지도 딱히 없어 보인다. 말 그대로 해외토픽에 나올 만한 기막힌 모험극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포스터

 

알란이 겪는 현재의 모험 사이로 이 영화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 넣는다. 바로 알란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지난 삶, 파란만장했던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믿기 힘들지만 이 노인의 지난 역사는 20세기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과 밀접하게 엮여 있다. 마치 스웨덴판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과도 비슷한 경험담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폭죽과 폭약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인데, 어릴 때 불행하게 부모님을 모두 잃고 고아로 자라는 힘든 운명에 처한다. 그러던 중 일개 병사로 전쟁에 참전해 핵무기 제조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연구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커피 시중을 들다가 폭탄의 구조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에 사용되는 원자폭탄의 발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또 한 번은 자신 대신 술값을 지불한 낯선 남자를 따라가는데,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요구를 거절해 그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이번에는 아인슈타인 박사의 동생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다. 이후에는 CIA 요원이 되어 미국 대통령 레이건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한다. 우연히 휩쓸려간 알란의 여정. 그는 우리가 세계사 책에서나 보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결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알란은 역사책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이 아니다. 또한 대단히 강한 신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도 아니다. 그저 그는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가 해준 말 “생각을 많이 해봐야 답도 없고, 닥칠 일은 닥치고, 인생은 살아가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사소한 행동이 우리가 거대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세계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은 사뭇 흥미롭다.

 

추격전 끝, 알란이 들고 튄 돈가방은 결국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간 자신이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그는, 100세가 되던 어느 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따뜻하고 편안하지만 양로원이라는 ‘구속’을 제 스스로 박차고 나아간 결단과 의지. 마지막 인생을 받아들이는 데서 벗어난 100세 노인의 모험은, 그래서 느리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운명은 100%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예측 불가의 무엇이지만, 결국 이렇게 미세하고도 사소해 보이는 의지와 결정들이 이루어 그 덩어리를 굴러가게 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작은 행동에, 하루하루의 시간에 더 심혈을 기울이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 있다.

 

필름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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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화정
이화정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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