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우리는 생각한다. 올해 나는 얼마나 많은 우연과 필연을 마주했을까? 지금 입고 있는 옷부터 어제 걸려온 전화,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한 친구까지. 내 삶을 구성하는 이 모든 순간은 많은 선택과 결정으로 이뤄지는데, 과연 이는 우연의 산물일까, 아니면 필연의 그것일까?
▲ 『오 헨리 단편선』 오 헨리 지음 | 문예출판사
크리스마스가 되면 다시금 떠오르는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아이러니한 상황을 담아낸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젊은 부부 짐과 델라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머리카락과 시계를 팔아 선물을 샀으나, 정작 그 선물은 잘린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값비싼 머리 장식과 팔아버린 시계에 맞춤한 백금 시곗줄이었다는, 어린이 명작 동화로도 읽힐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다. 줄거리만 떠올린다면 따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을 확률이 높으나,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그의 단편엔 아름답지만 우울하고도 냉소적인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아름답지만 우울한 그늘이 드리워진 미인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단편의 도입부는 델라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모아놓은 돈을 세 번이나 다시 세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1달러 87센트. 그게 다였다. 그중에서도 60센트는 1센트짜리 동전이었다. 이 동전들은 식료품점과 채소 가게, 정육점에서 가게 주인들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매번 한두 푼씩 아껴 모은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토록 빡빡하게 흥정하는 그녀의 인색함을 말없이 비난하는 눈초리에 두 뺨이 벌개지곤 했다. 델라는 세 번이나 세어 보았다. 1달러 87센트. 그리고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가난한 젊은 여인이 그악스럽게 물건값을 흥정하여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모은 돈은 기껏해야 1달러 87센트(최근 고시환율에 따르면 기껏해야 2천 원!). 부부는 어렵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었기에, 자신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팔았지만 결국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부부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고도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음을.
오 헨리의 단편들은 오해와 우연의 일치가 겹치고 겹쳐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특징으로 삼았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그 점을 지적하며 그의 작품에 박한 평가를 했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넛지 Nudge』 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지음 | 리더스북
오 헨리의 여러 단편에서 보듯, 우연이나 필연의 결과를 갖고 오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선택은 휴리스틱(Heuristics, 고정 관념에 기초한 추론적 판단)과 편향,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방향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탈러와 선스타인의 『넛지』는 인간의 선택을 올바르고도 똑똑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힘, ‘넛지(nudge)’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넛지는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뜻으로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개입 혹은 간섭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히폴 공항의 남자 화장실이다. 이 화장실의 모든 남자용 소변기 중앙엔 검정 파리가 그려져 있는데,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내고 적용한 이들은 이 파리 그림이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을 80%나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선거 관리자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도록 독려하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명백한 방법은 이익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투표소에 가는 일을 보다 수월하게 만듦으로써 그에 따르는 비용과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선거일 바로 전날에 투표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을 경우, 투표율을 무려 25%나 끌어올릴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14쪽
책의 도입부엔 급식 메뉴의 변화 없이 음식의 진열이나 배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이 특정 음식을 더 먹게 하거나 덜 먹게 하도록 한 급식 관리 총책임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센티브를 제시하거나 금지 혹은 강요를 하지 않고도 타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유도할 수 있다는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많은 정책 결정자들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책의 저자인 선스타인은 오바마 정부에서 규제개혁위원장으로 일했으며, 탈러는 영국 정부의 ‘넛지 팀’에서 자문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지음 | 김영사
에세이의 제목 같지만, 2011년에 집필된 이 책 『생각에 관한 생각』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최초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대중 교양서다. 그는 1979년 ‘불확실한 상황에서 행하는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설명한 연구 ‘전망 이론(prospective theory)’을 처음 발표했는데, 이 이론을 통해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며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다.
책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을 지배하는 ‘생각’에 대해 2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직관을 뜻하는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가 바로 그것이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2+2의 정답, 프랑스의 수도를 떠올리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은 ‘빠르게 생각하기’다. 반면 전문가의 해결책이나 354x687의 정답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을 심사숙고하여 노력하는 사고방식은 ‘느리게 생각하기’다.
우리는 살면서 계속 선택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소재를 결정하는 것은 ‘느리게 생각하기’, 즉 이성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 분명한 믿음과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직관적으로 ‘빠르게 생각하기’의 작용이라는 것. 대개 ‘빠르게 생각하기’는 옳은 결정을 유도하지만, 이는 휴리스틱과 편향 덕에 특정 상황에서 자주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당신은 지금 오랫동안 공들여 더없이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결정을 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우연과 비이성의 산물일 수도 있다.
대니얼 카너먼의 이러한 연구는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사고에 기초한 전통 경제학의 근간을 뒤흔들었으며, 이로 인해 경제학은 심리학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
▲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 열린책들
웨인 왕의 영화 <스모크>의 원작이기도 한 이 단편소설은, 시가 가게의 주인인 오기 렌이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겪은 잊지 못할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우연의 미학을 주제로 한 매혹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해왔던 폴 오스터는 이 짧은 단편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을 발휘한다.
크리스마스 아침 『뉴욕 타임스』에 실릴 단편을 청탁받은 ‘나’는 점심을 사면 최고의 크리스마스 얘기를 들려주겠다는 오기의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12년간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앵글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게에 물건을 훔치러 왔다 달아난 좀도둑 소년이 흘리고 간 지갑을 보관하고 있던 오기는 크리스마스 날, 좋은 일을 하자는 생각에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신분증의 주소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노파가 있었고, 그녀는 오기를 자신의 손자로 착각하고 반갑게 포옹하며 맞이한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 손자와 할머니인 듯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크리스마스 만찬과 와인을 즐긴다. 그리고 오기는 할머니가 잠든 사이 소년이 훔쳐 장물 삼아 보관해둔 거로 보이는 카메라를 하나 훔쳐 그 집을 빠져나온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오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 가득 심술궂은 미소가 퍼져 나갔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아주 알쏭달쏭하고 얼굴은 내적인 환희로 가득 차 보였다. 그래서 갑자기 그가 이 모든 이야기를 꾸며 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 놀리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절대 그렇다고 할 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의 잔꾀에 넘어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리 없다. ─24쪽
우연히 떨어뜨린 지갑으로 쓸쓸할 뻔했던 두 사람의 크리스마스는 소박하고도 따스한 추억으로 변모한다. 즉흥적이고도 충동적이었던 오기의 선택은 이후 12년 동안 매일 사진을 찍는 행위로 이어지는데, 이는 아마도 그때의 크리스마스를 추억하려는 그만의 의식은 아니었을까. 우연은 이처럼 필연과 아이러니를 동반하는 것.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예스24 도서팀장. 서강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며, 2년 가량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책에 파묻혀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고 싶어 2001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초 바람과는 달리 책에 깔려 지낸다고 하소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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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의 서가 : 우연과 필연,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조선영
2016-12-13
우연과 필연,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며 우리는 생각한다. 올해 나는 얼마나 많은 우연과 필연을 마주했을까? 지금 입고 있는 옷부터 어제 걸려온 전화,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한 친구까지. 내 삶을 구성하는 이 모든 순간은 많은 선택과 결정으로 이뤄지는데, 과연 이는 우연의 산물일까, 아니면 필연의 그것일까?
▲ 『오 헨리 단편선』 오 헨리 지음 | 문예출판사
크리스마스가 되면 다시금 떠오르는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아이러니한 상황을 담아낸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젊은 부부 짐과 델라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머리카락과 시계를 팔아 선물을 샀으나, 정작 그 선물은 잘린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값비싼 머리 장식과 팔아버린 시계에 맞춤한 백금 시곗줄이었다는, 어린이 명작 동화로도 읽힐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다. 줄거리만 떠올린다면 따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을 확률이 높으나,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그의 단편엔 아름답지만 우울하고도 냉소적인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아름답지만 우울한 그늘이 드리워진 미인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단편의 도입부는 델라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모아놓은 돈을 세 번이나 다시 세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1달러 87센트. 그게 다였다. 그중에서도 60센트는 1센트짜리 동전이었다. 이 동전들은 식료품점과 채소 가게, 정육점에서 가게 주인들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매번 한두 푼씩 아껴 모은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토록 빡빡하게 흥정하는 그녀의 인색함을 말없이 비난하는 눈초리에 두 뺨이 벌개지곤 했다. 델라는 세 번이나 세어 보았다. 1달러 87센트. 그리고 내일은 크리스마스였다.
가난한 젊은 여인이 그악스럽게 물건값을 흥정하여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모은 돈은 기껏해야 1달러 87센트(최근 고시환율에 따르면 기껏해야 2천 원!). 부부는 어렵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었기에, 자신의 가장 귀중한 보물을 팔았지만 결국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부부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고도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음을.
오 헨리의 단편들은 오해와 우연의 일치가 겹치고 겹쳐 일어나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특징으로 삼았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그 점을 지적하며 그의 작품에 박한 평가를 했으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넛지 Nudge』 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지음 | 리더스북
오 헨리의 여러 단편에서 보듯, 우연이나 필연의 결과를 갖고 오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선택은 휴리스틱(Heuristics, 고정 관념에 기초한 추론적 판단)과 편향,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방향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탈러와 선스타인의 『넛지』는 인간의 선택을 올바르고도 똑똑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힘, ‘넛지(nudge)’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넛지는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뜻으로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개입 혹은 간섭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로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스히폴 공항의 남자 화장실이다. 이 화장실의 모든 남자용 소변기 중앙엔 검정 파리가 그려져 있는데,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내고 적용한 이들은 이 파리 그림이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을 80%나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선거 관리자들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도록 독려하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명백한 방법은 이익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이 투표소에 가는 일을 보다 수월하게 만듦으로써 그에 따르는 비용과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선거일 바로 전날에 투표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을 경우, 투표율을 무려 25%나 끌어올릴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114쪽
책의 도입부엔 급식 메뉴의 변화 없이 음식의 진열이나 배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이 특정 음식을 더 먹게 하거나 덜 먹게 하도록 한 급식 관리 총책임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센티브를 제시하거나 금지 혹은 강요를 하지 않고도 타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유도할 수 있다는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많은 정책 결정자들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책의 저자인 선스타인은 오바마 정부에서 규제개혁위원장으로 일했으며, 탈러는 영국 정부의 ‘넛지 팀’에서 자문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지음 | 김영사
에세이의 제목 같지만, 2011년에 집필된 이 책 『생각에 관한 생각』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최초의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대중 교양서다. 그는 1979년 ‘불확실한 상황에서 행하는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설명한 연구 ‘전망 이론(prospective theory)’을 처음 발표했는데, 이 이론을 통해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며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다. 책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을 지배하는 ‘생각’에 대해 2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직관을 뜻하는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가 바로 그것이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2+2의 정답, 프랑스의 수도를 떠올리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은 ‘빠르게 생각하기’다. 반면 전문가의 해결책이나 354x687의 정답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을 심사숙고하여 노력하는 사고방식은 ‘느리게 생각하기’다. 우리는 살면서 계속 선택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소재를 결정하는 것은 ‘느리게 생각하기’, 즉 이성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 분명한 믿음과 선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직관적으로 ‘빠르게 생각하기’의 작용이라는 것. 대개 ‘빠르게 생각하기’는 옳은 결정을 유도하지만, 이는 휴리스틱과 편향 덕에 특정 상황에서 자주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당신은 지금 오랫동안 공들여 더없이 합리적이고도 현명한 결정을 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우연과 비이성의 산물일 수도 있다. 대니얼 카너먼의 이러한 연구는 인간은 합리적 행동과 논리적 사고를 하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사고에 기초한 전통 경제학의 근간을 뒤흔들었으며, 이로 인해 경제학은 심리학이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게 되었다.
▲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 열린책들
웨인 왕의 영화 <스모크>의 원작이기도 한 이 단편소설은, 시가 가게의 주인인 오기 렌이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겪은 잊지 못할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우연의 미학을 주제로 한 매혹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해왔던 폴 오스터는 이 짧은 단편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을 발휘한다. 크리스마스 아침 『뉴욕 타임스』에 실릴 단편을 청탁받은 ‘나’는 점심을 사면 최고의 크리스마스 얘기를 들려주겠다는 오기의 제안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12년간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앵글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게에 물건을 훔치러 왔다 달아난 좀도둑 소년이 흘리고 간 지갑을 보관하고 있던 오기는 크리스마스 날, 좋은 일을 하자는 생각에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신분증의 주소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노파가 있었고, 그녀는 오기를 자신의 손자로 착각하고 반갑게 포옹하며 맞이한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 손자와 할머니인 듯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크리스마스 만찬과 와인을 즐긴다. 그리고 오기는 할머니가 잠든 사이 소년이 훔쳐 장물 삼아 보관해둔 거로 보이는 카메라를 하나 훔쳐 그 집을 빠져나온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오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 가득 심술궂은 미소가 퍼져 나갔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아주 알쏭달쏭하고 얼굴은 내적인 환희로 가득 차 보였다. 그래서 갑자기 그가 이 모든 이야기를 꾸며 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 놀리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절대 그렇다고 할 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의 잔꾀에 넘어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리 없다. ─24쪽
우연히 떨어뜨린 지갑으로 쓸쓸할 뻔했던 두 사람의 크리스마스는 소박하고도 따스한 추억으로 변모한다. 즉흥적이고도 충동적이었던 오기의 선택은 이후 12년 동안 매일 사진을 찍는 행위로 이어지는데, 이는 아마도 그때의 크리스마스를 추억하려는 그만의 의식은 아니었을까. 우연은 이처럼 필연과 아이러니를 동반하는 것.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도 메리 크리스마스.
예스24 도서팀장. 서강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며, 2년 가량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책에 파묻혀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이루고 싶어 2001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초 바람과는 달리 책에 깔려 지낸다고 하소연하곤 한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엠디의 서가 : 우연과 필연,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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