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두고 ‘자립’을 묻는 것은 이상하다. ‘자립’이 사전적 의미처럼 ‘스스로 선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면 건축은 자립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에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는가는 건축이 성립하기 위한 최초의 질문에 가깝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나가는 과정은 건축의 역사이면서 공학의 역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문을 건물이 아닌, 그러니까 결과물로서의 건축이 아닌 넓은 의미로서의 건축, 과정으로서의 건축으로 돌리면 답은 다소 복잡해진다.
건축을 위한 최초의 조건을 생각해보자. 이 과정에서 설치 작업에 가까워 예술 담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는 건축은 일단 괄호를 쳐놓도록 한다. 보통 건축은 서비스업이다. 따라서 뚜렷한 목적이 있다. 건축주라고 불리는 이가 예산을 갖고 일을 의뢰하며, 건축가는 이에 대응한 설계안을 내놓는다. 결국 건축을 생산하기 위한 두 주체가 있어야 성립되는 일이다. 호출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 사이의 지난한 과정 끝에 건축(건물)은 탄생한다. 이 둘의 합은 다른 어떤 조건보다 건축의 질을 좌우한다. 역사적으로 좋은 건축주는 위대한 후원자임을 자처하며 도시 전체의 융성을 이끌었다. 좋은 건축가는 몇백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영속의 아름다움을 도시에 남겼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건축을 둘러싼 이 두 가지 힘이 깨지는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오히려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약 힘의 균형 잡기에 성공했다면, 그 도시는 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건축으로 채워진 이상적인 도시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남는다. 건축주 없는 건축은 불가능할까? 혹은 그 반대는? 건축가와 건축주라는 두 주체가 사라진 건축은 존재할 수 없을까? 그 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건축만이 진정 ‘자립’할 수 있는 건축은 아닐까 등등.
2
1964년 11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건축사에 기록될 중요한 전시가 개막했다.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당시 건축을 둘러싼 모던 담론과 모더니스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는 건축가가 ‘마스터 아키텍트(Master Architect)’로서 건축이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새로운 이상 세계를 위해 기능하리라 믿었던 시대였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건축가이자 건축사가인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는 전시와 함께 동명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기존의 건축 계보에 포함되지 않은 생소한 세계를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편협한 건축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와 책에 소개된 주류의 역사에 선택되지 않은 건축, 자발적으로 완성된 건축 사례들은 자생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무명의 건축 집단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짐작한 바대로 건축가들의 유토피아적 기획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고, 오늘날 건축가들은 마스터 지위를 내려놓았다. 이 전시가 가져다준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건축은 잘 훈련받은 건축가로부터 탄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 곳곳에 놓인 자생적으로 출현한 작자미상의 건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류 현대 건축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 여러 성찰은 버내큘러 건축, 건축의 지역주의와 같은 이론들, 시대적 감수성과 어울려 여러 화두를 만들고 있다. 건축과 관련된 최고의 국제행사로 인정받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경우도 최근 몇 년 동안 건축가의 명성이나 건축의 작품성보다는 지금 우리가 처한 건축의 현실적 조건과 공동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토속건축’을 의미하는 버내큘러 건축은 거주환경과 문화에 관한 참고문헌 역할을 한다.
로마 건축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의 ‘Masia’는 버내큘러 건축의 한 예다.
Masia는 농업, 축산업에 종사하는 지역민들의 주거와 노동의 장이었다.
3
반대로 ‘건축주 없는 건축’은 가능할까? 오늘날 건축계에 봉착한 건축 산업의 지형과 한계를 생각해보면 그 답을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건축가 없는 건축’이 세계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며 건축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에 대한 대안이었다면, ‘건축주 없는 건축’은 지금 건축계에 던지는 대안적 태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의 한국은 국가가 가장 중요한 건축주였다. 건축가들은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들에 참여했고, 동시에 확장하는 도시와 비례하여 누구나 쉽게 건축주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도래한 오늘날,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누구도 쉽게 건축주가 되기 어렵고, 건축가로 생존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젊은 건축가들의 몇몇 활동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지점을 시사한다. 자신을 ‘초식 건축가’라 칭한 와이즈건축(Wise Architecture)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설계했던 ‘육식 건축가’와 달리 초식 건축가는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작은 건물로 빈 공간을 채우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이들은 “발주-수주 방식의 생존 논리”에 따라가지 않고 “건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을 앉아 기다리는 것”을 지양한다.
건축주의 의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들을 제안하는 적극적인 방식은 기획자의 태도에 가깝다. 아티스트와 협업하거나, 건축설계가 아닌 제품/가구 디자인으로 건축가의 작업영역을 확장하거나, 전시나 포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식이다. 즉 지금의 현상은 건축가들 스스로 기획자가 되어 판의 흐름을 바꾸는 모습이다. 공간의 쓰임을 기획하는 것은 건축가의 직무지만, 그 이상 사회를 매개로 건축을 기획하는 일이 인상적이다. 예컨대 셰어하우스를 기획하고 분양하며,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상점을 열기도 하며, 집을 중개하는 등 건축가의 역할이 다양하게 표출된다. 이러한 일련의 젊은 건축가들의 선택 속에는 결국 건축이 어떻게 다시 사회와 소통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특정 건축주가 아닌 다수와의 접점을 찾고 싶다는 건축가들의 열망도 숨어 있다.
4
오랫동안 건축은 건축주와 건축가가 양쪽에서 팽팽히 당기고 있는 줄 위에서 힘겹게 중심을 잡아왔다.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고,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땅을 디디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 줄을 잡고 있는 힘이 사라지는 순간 건축은 어떻게 될까? 물론 그 두 가지만으로 건축을 말하기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건축의 생산 조건을 둘러싸고 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가정으로 사라질 정도로 건축이 유약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 힘을 아예 소거해버린, 팽팽한 끈을 놓는 순간 역설적으로 이 시대의 새로운 건축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건축이 진정 삶을 반영하기 위해서, 자립의 건축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최근 동일본 대지진 등 재난 지역의 참사에 대응하는 건축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받은 건축가 반 시게루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특권층이 아닌 재해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구호 건축이야말로 건축주 없는 건축, 건축가 없는 건축을 지시하며 자립하는 건축이 아닐까? 건축주의 의뢰나 준비된 예산 없이 건축가가 자발적으로 진행했고, 궁극적으로는 건축가 없이도 지역 주민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기 때문이다. 건축주와 건축가, 그 둘이 만드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이 결국 사회와 정의, 그리고 삶이라는 아직은 믿고 싶은 가치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건축기획자)건축과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월간 「공간」에서 건축전문기자로 일했다. 2011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며 건축 부문 전시기획과 연구를 맡고 있다. <아트폴리 큐브릭>,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아키토피아의 실험>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공저로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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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널 : 건축가 없는 건축, 건축주 없는 건축
정다영
2016-09-15
건축가 없는 건축, 건축주 없는 건축
1
건축을 두고 ‘자립’을 묻는 것은 이상하다. ‘자립’이 사전적 의미처럼 ‘스스로 선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면 건축은 자립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에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는가는 건축이 성립하기 위한 최초의 질문에 가깝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나가는 과정은 건축의 역사이면서 공학의 역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문을 건물이 아닌, 그러니까 결과물로서의 건축이 아닌 넓은 의미로서의 건축, 과정으로서의 건축으로 돌리면 답은 다소 복잡해진다. 건축을 위한 최초의 조건을 생각해보자. 이 과정에서 설치 작업에 가까워 예술 담론의 장에서 주로 논의되는 건축은 일단 괄호를 쳐놓도록 한다. 보통 건축은 서비스업이다. 따라서 뚜렷한 목적이 있다. 건축주라고 불리는 이가 예산을 갖고 일을 의뢰하며, 건축가는 이에 대응한 설계안을 내놓는다. 결국 건축을 생산하기 위한 두 주체가 있어야 성립되는 일이다. 호출하는 자와 실행하는 자 사이의 지난한 과정 끝에 건축(건물)은 탄생한다. 이 둘의 합은 다른 어떤 조건보다 건축의 질을 좌우한다. 역사적으로 좋은 건축주는 위대한 후원자임을 자처하며 도시 전체의 융성을 이끌었다. 좋은 건축가는 몇백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영속의 아름다움을 도시에 남겼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건축을 둘러싼 이 두 가지 힘이 깨지는 경우를 자주 접하면서 오히려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약 힘의 균형 잡기에 성공했다면, 그 도시는 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건축으로 채워진 이상적인 도시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남는다. 건축주 없는 건축은 불가능할까? 혹은 그 반대는? 건축가와 건축주라는 두 주체가 사라진 건축은 존재할 수 없을까? 그 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건축만이 진정 ‘자립’할 수 있는 건축은 아닐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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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건축사에 기록될 중요한 전시가 개막했다.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s)>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당시 건축을 둘러싼 모던 담론과 모더니스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는 건축가가 ‘마스터 아키텍트(Master Architect)’로서 건축이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새로운 이상 세계를 위해 기능하리라 믿었던 시대였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건축가이자 건축사가인 버나드 루도프스키(Bernard Rudofsky)는 전시와 함께 동명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에서 “기존의 건축 계보에 포함되지 않은 생소한 세계를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편협한 건축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와 책에 소개된 주류의 역사에 선택되지 않은 건축, 자발적으로 완성된 건축 사례들은 자생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무명의 건축 집단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짐작한 바대로 건축가들의 유토피아적 기획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고, 오늘날 건축가들은 마스터 지위를 내려놓았다. 이 전시가 가져다준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건축은 잘 훈련받은 건축가로부터 탄생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 곳곳에 놓인 자생적으로 출현한 작자미상의 건축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류 현대 건축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 여러 성찰은 버내큘러 건축, 건축의 지역주의와 같은 이론들, 시대적 감수성과 어울려 여러 화두를 만들고 있다. 건축과 관련된 최고의 국제행사로 인정받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경우도 최근 몇 년 동안 건축가의 명성이나 건축의 작품성보다는 지금 우리가 처한 건축의 현실적 조건과 공동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토속건축’을 의미하는 버내큘러 건축은 거주환경과 문화에 관한 참고문헌 역할을 한다.
로마 건축의 영향을 받은 스페인의 ‘Masia’는 버내큘러 건축의 한 예다.
Masia는 농업, 축산업에 종사하는 지역민들의 주거와 노동의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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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건축주 없는 건축’은 가능할까? 오늘날 건축계에 봉착한 건축 산업의 지형과 한계를 생각해보면 그 답을 도출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건축가 없는 건축’이 세계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며 건축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에 대한 대안이었다면, ‘건축주 없는 건축’은 지금 건축계에 던지는 대안적 태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의 한국은 국가가 가장 중요한 건축주였다. 건축가들은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들에 참여했고, 동시에 확장하는 도시와 비례하여 누구나 쉽게 건축주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도래한 오늘날,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누구도 쉽게 건축주가 되기 어렵고, 건축가로 생존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젊은 건축가들의 몇몇 활동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지점을 시사한다. 자신을 ‘초식 건축가’라 칭한 와이즈건축(Wise Architecture)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설계했던 ‘육식 건축가’와 달리 초식 건축가는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작은 건물로 빈 공간을 채우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이들은 “발주-수주 방식의 생존 논리”에 따라가지 않고 “건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을 앉아 기다리는 것”을 지양한다. 건축주의 의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들을 제안하는 적극적인 방식은 기획자의 태도에 가깝다. 아티스트와 협업하거나, 건축설계가 아닌 제품/가구 디자인으로 건축가의 작업영역을 확장하거나, 전시나 포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식이다. 즉 지금의 현상은 건축가들 스스로 기획자가 되어 판의 흐름을 바꾸는 모습이다. 공간의 쓰임을 기획하는 것은 건축가의 직무지만, 그 이상 사회를 매개로 건축을 기획하는 일이 인상적이다. 예컨대 셰어하우스를 기획하고 분양하며,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상점을 열기도 하며, 집을 중개하는 등 건축가의 역할이 다양하게 표출된다. 이러한 일련의 젊은 건축가들의 선택 속에는 결국 건축이 어떻게 다시 사회와 소통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특정 건축주가 아닌 다수와의 접점을 찾고 싶다는 건축가들의 열망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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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건축은 건축주와 건축가가 양쪽에서 팽팽히 당기고 있는 줄 위에서 힘겹게 중심을 잡아왔다. 넘어지지 않고 서 있으려고, 그 자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땅을 디디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 줄을 잡고 있는 힘이 사라지는 순간 건축은 어떻게 될까? 물론 그 두 가지만으로 건축을 말하기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건축의 생산 조건을 둘러싸고 있다. 그렇기에 위와 같은 가정으로 사라질 정도로 건축이 유약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 힘을 아예 소거해버린, 팽팽한 끈을 놓는 순간 역설적으로 이 시대의 새로운 건축이 시작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건축이 진정 삶을 반영하기 위해서, 자립의 건축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최근 동일본 대지진 등 재난 지역의 참사에 대응하는 건축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받은 건축가 반 시게루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특권층이 아닌 재해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구호 건축이야말로 건축주 없는 건축, 건축가 없는 건축을 지시하며 자립하는 건축이 아닐까? 건축주의 의뢰나 준비된 예산 없이 건축가가 자발적으로 진행했고, 궁극적으로는 건축가 없이도 지역 주민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기 때문이다. 건축주와 건축가, 그 둘이 만드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이 결국 사회와 정의, 그리고 삶이라는 아직은 믿고 싶은 가치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도 되지 않을까?
▲ 반 시게루가 디자인한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종이 칸막이 보호소, 2011
(건축기획자)건축과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월간 「공간」에서 건축전문기자로 일했다. 2011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며 건축 부문 전시기획과 연구를 맡고 있다. <아트폴리 큐브릭>,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 <아키토피아의 실험>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공저로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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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 디딤널 : 건축가 없는 건축, 건축주 없는 건축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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