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개념이 존재했다. 이 중 가장 먼저 접하는 관례는 ‘성년례’라고도 하는데, 성년이 된 남성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의식을 뜻한다. 여성은 ‘계례’라 하여 쪽을 지고 비녀를 꼽았다. 오늘날로 치면 ‘성년의 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관례를 치렀다고 바로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과거 사회는 인간이 남과 여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불완전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혼례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합쳐져야만 비로소 완전한 상태가 된다고 인식했다. 결혼은 곧 인간의 본질을 채우기 위한 필수요소였고, 당연히 결혼을 하지 않은 인간은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상대적인 차별을 받았다.
▲ 한국의 혼인식, 1899년경
이런 인식이 꼭 동아시아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한 가지 예로 플라톤은 그의 저서 『법률』에서 35세가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은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정작 플라톤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자). 기독교의 성서에도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대 로마에서는 독신세를 걷었고, 제정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는 아예 독신자의 상속권도 박탈해버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처럼 결혼을 자립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은 대부분의 문명에서 공통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인식이 등장했을까? 결혼의 부산물인 가족은 오랜 시간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 역할을 담당했다. 이게 단순히 2세 생산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은 하나의 생산단위였다. 경제를 뜻하는 ‘economy’란 단어가 가족경영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nomia’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농번기가 되면 온 가족이 농사에 달라붙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런 모습은 벼농사를 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더 자주 보인다. 벼는 유럽의 주식이었던 밀에 비해 훨씬 많은 파종량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동아시아의 가족은 유럽의 가족보다 그 중요도가 더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요도가 낮다고 유럽의 가족이 등한시되었다는 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유럽이나 동아시아나 가족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 경제적인 생존을 담보 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농가의 혼례>, 피터 브뤼겔, 1568
동시에 가족 공동체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예절은 물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윗세대로부터 전수받는 것 또한 가정의 역할이었다. 고대국가가 성립된 뒤 등장한 태학이나 국학처럼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사회 구성원 모두를 포용할 만큼 충분했던 건 아니다. 그마저도 농사 및 기술과 같은 일반인이 종사하는 생업에 대한 배움은 가정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경제, 교육뿐 아니라 종교, 제도, 규범 등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기능이 가족에 집중되어 있었다. 과거의 조상들이 결혼, 더 나아가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자립의 근거로 여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석학들과 굴지의 예술가들, 인류를 대표하는 지성들이 결혼생활의 고통스러움과 독신의 자유로움을 설파했음에도 결혼 제도는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 지닌 복합적인 기능은 근대를 마주하며 위기에 봉착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기존의 가족경제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고 나왔다. 공교육의 등장, 학교의 발달은 가정의 교육을 제한적인 의미로 퇴색시켰다. 근대화와 함께 가족의 기능은 차례차례 분리되었고, 국가 혹은 사적으로 만들어진 전문 조직에 흡수되었다. 현대의 가족 공동체는 기초적인 수준의 기능만으로 유지될 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결혼에 대해 “고도의 사회학적 행위”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매우 오랜 시간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기에 쉽게 인정하기 힘들지만, 결혼과 가정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필요에 따라 요구된 산물이지 인류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결혼이 자립의 필수조건이었다면 현대의 결혼은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요소로,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부담을 가중하는 성격이 강해졌다. 요컨대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재 추세를 감안한다면,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라는 인식을 일반론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졌다.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창출이 자립의 필수요소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그저 개인 한 몸만 건사하는 것으로 족한, 아니 그마저도 사력을 다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히스토리쿠스 : 역할의 변화, 위상의 추락 - 결혼과 가정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히스토리쿠스 : 역할의 변화, 위상의 추락 - 결혼과 가정
박문국
2016-09-07
역할의 변화, 위상의 추락 - 결혼과 가정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개념이 존재했다. 이 중 가장 먼저 접하는 관례는 ‘성년례’라고도 하는데, 성년이 된 남성이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의식을 뜻한다. 여성은 ‘계례’라 하여 쪽을 지고 비녀를 꼽았다. 오늘날로 치면 ‘성년의 날’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관례를 치렀다고 바로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과거 사회는 인간이 남과 여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불완전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혼례를 통해 남성과 여성이 합쳐져야만 비로소 완전한 상태가 된다고 인식했다. 결혼은 곧 인간의 본질을 채우기 위한 필수요소였고, 당연히 결혼을 하지 않은 인간은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상대적인 차별을 받았다.
▲ 한국의 혼인식, 1899년경
이런 인식이 꼭 동아시아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한 가지 예로 플라톤은 그의 저서 『법률』에서 35세가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은 시민으로서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정작 플라톤은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자). 기독교의 성서에도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고대 로마에서는 독신세를 걷었고, 제정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는 아예 독신자의 상속권도 박탈해버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처럼 결혼을 자립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기는 인식은 대부분의 문명에서 공통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인식이 등장했을까? 결혼의 부산물인 가족은 오랜 시간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 역할을 담당했다. 이게 단순히 2세 생산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가족은 하나의 생산단위였다. 경제를 뜻하는 ‘economy’란 단어가 가족경영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nomia’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농번기가 되면 온 가족이 농사에 달라붙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런 모습은 벼농사를 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더 자주 보인다. 벼는 유럽의 주식이었던 밀에 비해 훨씬 많은 파종량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동아시아의 가족은 유럽의 가족보다 그 중요도가 더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중요도가 낮다고 유럽의 가족이 등한시되었다는 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유럽이나 동아시아나 가족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이 경제적인 생존을 담보 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농가의 혼례>, 피터 브뤼겔, 1568
동시에 가족 공동체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예절은 물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윗세대로부터 전수받는 것 또한 가정의 역할이었다. 고대국가가 성립된 뒤 등장한 태학이나 국학처럼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사회 구성원 모두를 포용할 만큼 충분했던 건 아니다. 그마저도 농사 및 기술과 같은 일반인이 종사하는 생업에 대한 배움은 가정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경제, 교육뿐 아니라 종교, 제도, 규범 등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기능이 가족에 집중되어 있었다. 과거의 조상들이 결혼, 더 나아가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자립의 근거로 여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석학들과 굴지의 예술가들, 인류를 대표하는 지성들이 결혼생활의 고통스러움과 독신의 자유로움을 설파했음에도 결혼 제도는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 지닌 복합적인 기능은 근대를 마주하며 위기에 봉착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기존의 가족경제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고 나왔다. 공교육의 등장, 학교의 발달은 가정의 교육을 제한적인 의미로 퇴색시켰다. 근대화와 함께 가족의 기능은 차례차례 분리되었고, 국가 혹은 사적으로 만들어진 전문 조직에 흡수되었다. 현대의 가족 공동체는 기초적인 수준의 기능만으로 유지될 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결혼에 대해 “고도의 사회학적 행위”라는 정의를 내린 바 있다. 매우 오랜 시간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기에 쉽게 인정하기 힘들지만, 결혼과 가정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필요에 따라 요구된 산물이지 인류의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결혼이 자립의 필수조건이었다면 현대의 결혼은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요소로,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의 부담을 가중하는 성격이 강해졌다. 요컨대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기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재 추세를 감안한다면, 전통적인 의미의 가정은 그 역할을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소한 ‘결혼은 반드시 해야지’라는 인식을 일반론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졌다.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창출이 자립의 필수요소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그저 개인 한 몸만 건사하는 것으로 족한, 아니 그마저도 사력을 다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히스토리쿠스 : 역할의 변화, 위상의 추락 - 결혼과 가정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ScienTech : 기술로부터 자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영준
Cinephilo : 열심히 지는 법을 배우다 - 타...
이화정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