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에 첩첩이 둘러싸여 사는 현대의 인간이 기술로부터 자립할 수 있느냐는 얘기는 결말부터 뻔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기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이 기술로부터 자립한다는 것은 기술이란 말조차 존재하지 않던 원시시대에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기술로부터 자립했다고 할 수도 없다. 게다가 당시에는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인간이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은 살아가기 힘겨운 이 세상에서 인간 너머의 어떤 힘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걸 두고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은 “바퀴는 발의 연장이고, 타자기는 손의 연장이며, 티브이는 눈의 연장”이라고 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지 60년이 지난 지금, 기계는 단순히 연장이 아니라 그걸 훨씬 초월해 있다.
오늘날 혼자 존재하는 바퀴는 없다. 데카르트 시대의 바퀴는 기껏해야 마차에 달려 있었을 뿐이지만, 오늘날의 바퀴는 강력한 엔진이나 정교한 모터에 붙어 있다. 그 바퀴의 성능은 인간의 달리는 속도와 지구력을 훨씬 앞선다. 타자기를 써서 글자를 치는 사람은 손으로 쓰는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고 많은 양의 텍스트를 쳐낸다. 오늘날의 기계는 인간의 능력을 앞서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기 싫어한다. 알파고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언젠가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할 것이라며 두려워했지만, 기계가 인간을 압도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증기기관이 나왔을 때 기계의 동력은 인간의 힘을 앞질러버렸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알파고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제껏 기계에 의존해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기계를 사용한다는 말을 솔직히 표현하면 기계에 적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사람이 자동차의 구조가 강제하는 법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조작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차가 앞으로 안 나가든지 멋대로 나가서 사고를 일으킬 뿐이다.
인간은 왜 근본적으로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것은 기술의 근본적 속성 때문이다. 기술은 기계의 자유로운 결합과 해체를 존재의 근간으로 한다. 어떤 기계든지 결합 내지 조립을 통해 만들어진다. 또 자유롭게 해체할 수 있고 재결합할 수도 있다. 기계는 그렇게 설계되고 만들어진다. 기계를 이루는 부속들끼리의 결합과 해체의 끝에는 인간이 있다. 결국 모든 기계는 그 끝에 인간을 결합하게 돼 있다. 사용자라는 이름으로든, 기계의 대상으로든 말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오면서 기계와 기계,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좀 더 유기적이고 정교해졌다. 기계가 인간을 일방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하도록 유도한다. 초창기의 자동차는 바퀴가 나무로 돼 있었다. 둥근 운전대 대신 긴 막대로 방향을 틀었고, 승차감을 좋게 하는 서스펜션과 충격흡수장치 대신 한 장의 판 스프링만 있었다. 이런 차들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자동차가 귀해서 타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즐겁고 신기해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바퀴가 고무 타이어로 바뀌고 둥근 스티어링휠이 달리고 쇽업쇼버가 부드러워지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차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차츰 자동차를 중심으로 여행, 쇼핑, 전쟁, 스포츠 등이 조직화되면서 인간은 자동차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자동차 문화가 인간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동차의 구조에 맞는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성에 맞게 디자인된 오늘날의 자동차는 인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즉 차 안에 앉은 인간은 부드러운 시트와 온갖 디지털 편의 장치를 통해 자동차의 자연스럽게 자동차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다른 기계는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는 ‘인간 중심의 디자인’이라고 하지만, 기계와 인간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인간이 기계에 꼼짝 못 하고 종속되는 것이다.
▲ 철저하게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성에 맞게 디자인된 오늘날의 자동차는 인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이쯤 되면 인간이 기술로부터 자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기계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어차피 기술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세상의 다른 요인들―환경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립할 수 있느냐를 고민해봐야 한다. 온갖 기능을 유기적으로 결합해낼 수 있는 스마트폰은 인간을 자립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은행거래는 물론 택시 부르기, 친구 만나기, 영화감상, 온갖 게임 등 뭐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얼마나 스마트폰에 종속돼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작은 기계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립은커녕 인간의 신체도 점점 기계화되고 있다. 앞서 기계는 자유로운 결합과 해체를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병원 수술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수술실을 방문해서 거기서 쓰이는 기계설비들을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본 인간의 모습은 기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의사들은 인간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자동차를 수리하듯 낡은 부품(신체장기)을 들어내고 새 부품을 넣었다. 차를 고치는 수리공이 무감각하게 부품을 갈아 끼우듯이 말이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몸을 완전히 기계로 만들었다. 수술실의 설비 중에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몇 가지 호스가 있는데, ‘산소’ ‘진공’ ‘산화질소’ ‘공기’라고 쓰인 호스는 카센터를 생각나게 했다. 단지 차이라면 ‘엔진오일’ ‘진공’ 등과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의사가 뇌사자의 장기를 들어내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동차의 엔진룸에서 엔진이며 트랜스미션을 들어내듯이 뇌사자의 몸에서 필요한 장기를 들어냈다. 자동차의 엔진룸이 휑하게 비듯이 장기를 들어낸 뇌사자의 몸도 휑하게 비었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실려 다른 카센터로 운반되는 부품처럼 장기는 구급차에 실려 필요로 하는 병원으로 운반된다. 장기를 받아든 의사는 기계부품을 맞추듯이 장기에 혈관과 신경을 연결해서 작동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이 몇 세대만 지속되어도 인간의 몸은 진화해서 복잡한 수술 없이도 장기 정도는 척척 들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인간의 신체, 그리고 삶은 이미 기계와 분리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을 준비하면 한다. 완전히 인간적인 것도, 완전히 기계적인 것도 더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장착할 때다.
(기술비평가)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인문학의 지평에서 기계를 탐구하고 있는 기계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다. 재봉틀에서 첨단 제트 엔진에 이르기까지, 작동하는 물건에 관심이 많다. 『우주감각: NASA 57년의 이미지들』 『기계산책자』 등을 펴내고,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우주생활’,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사진의 과학’전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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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ech : 기술로부터 자립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영준
2016-09-07
기술에 첩첩이 둘러싸여 사는 현대의 인간이 기술로부터 자립할 수 있느냐는 얘기는 결말부터 뻔하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기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이 기술로부터 자립한다는 것은 기술이란 말조차 존재하지 않던 원시시대에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기술로부터 자립했다고 할 수도 없다. 게다가 당시에는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인간이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은 살아가기 힘겨운 이 세상에서 인간 너머의 어떤 힘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걸 두고 문화비평가 마샬 맥루한은 “바퀴는 발의 연장이고, 타자기는 손의 연장이며, 티브이는 눈의 연장”이라고 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지 60년이 지난 지금, 기계는 단순히 연장이 아니라 그걸 훨씬 초월해 있다.
▲ “바퀴는 발의 연장이고, 타자기는 손의 연장이며, 티브이는 눈의 연장이다.”-마샬 맥루한
오늘날 혼자 존재하는 바퀴는 없다. 데카르트 시대의 바퀴는 기껏해야 마차에 달려 있었을 뿐이지만, 오늘날의 바퀴는 강력한 엔진이나 정교한 모터에 붙어 있다. 그 바퀴의 성능은 인간의 달리는 속도와 지구력을 훨씬 앞선다. 타자기를 써서 글자를 치는 사람은 손으로 쓰는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고 많은 양의 텍스트를 쳐낸다. 오늘날의 기계는 인간의 능력을 앞서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기 싫어한다. 알파고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언젠가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할 것이라며 두려워했지만, 기계가 인간을 압도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증기기관이 나왔을 때 기계의 동력은 인간의 힘을 앞질러버렸다. 그러니 새삼스럽게 알파고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제껏 기계에 의존해서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기계를 사용한다는 말을 솔직히 표현하면 기계에 적응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는 사람이 자동차의 구조가 강제하는 법칙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조작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차가 앞으로 안 나가든지 멋대로 나가서 사고를 일으킬 뿐이다.
인간은 왜 근본적으로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것은 기술의 근본적 속성 때문이다. 기술은 기계의 자유로운 결합과 해체를 존재의 근간으로 한다. 어떤 기계든지 결합 내지 조립을 통해 만들어진다. 또 자유롭게 해체할 수 있고 재결합할 수도 있다. 기계는 그렇게 설계되고 만들어진다. 기계를 이루는 부속들끼리의 결합과 해체의 끝에는 인간이 있다. 결국 모든 기계는 그 끝에 인간을 결합하게 돼 있다. 사용자라는 이름으로든, 기계의 대상으로든 말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넘어오면서 기계와 기계, 기계와 인간의 결합은 좀 더 유기적이고 정교해졌다. 기계가 인간을 일방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하도록 유도한다. 초창기의 자동차는 바퀴가 나무로 돼 있었다. 둥근 운전대 대신 긴 막대로 방향을 틀었고, 승차감을 좋게 하는 서스펜션과 충격흡수장치 대신 한 장의 판 스프링만 있었다. 이런 차들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자동차가 귀해서 타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즐겁고 신기해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바퀴가 고무 타이어로 바뀌고 둥근 스티어링휠이 달리고 쇽업쇼버가 부드러워지면서 비로소 오늘날의 차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차츰 자동차를 중심으로 여행, 쇼핑, 전쟁, 스포츠 등이 조직화되면서 인간은 자동차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자동차 문화가 인간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동차의 구조에 맞는 한 부분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성에 맞게 디자인된 오늘날의 자동차는 인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즉 차 안에 앉은 인간은 부드러운 시트와 온갖 디지털 편의 장치를 통해 자동차의 자연스럽게 자동차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다른 기계는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는 ‘인간 중심의 디자인’이라고 하지만, 기계와 인간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인간이 기계에 꼼짝 못 하고 종속되는 것이다.
▲ 철저하게 인간의 인지능력과 감성에 맞게 디자인된 오늘날의 자동차는 인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이쯤 되면 인간이 기술로부터 자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기계를 통해 이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어차피 기술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세상의 다른 요인들―환경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립할 수 있느냐를 고민해봐야 한다. 온갖 기능을 유기적으로 결합해낼 수 있는 스마트폰은 인간을 자립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은행거래는 물론 택시 부르기, 친구 만나기, 영화감상, 온갖 게임 등 뭐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이 얼마나 스마트폰에 종속돼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작은 기계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립은커녕 인간의 신체도 점점 기계화되고 있다. 앞서 기계는 자유로운 결합과 해체를 특징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병원 수술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수술실을 방문해서 거기서 쓰이는 기계설비들을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본 인간의 모습은 기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의사들은 인간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자동차를 수리하듯 낡은 부품(신체장기)을 들어내고 새 부품을 넣었다. 차를 고치는 수리공이 무감각하게 부품을 갈아 끼우듯이 말이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몸을 완전히 기계로 만들었다. 수술실의 설비 중에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몇 가지 호스가 있는데, ‘산소’ ‘진공’ ‘산화질소’ ‘공기’라고 쓰인 호스는 카센터를 생각나게 했다. 단지 차이라면 ‘엔진오일’ ‘진공’ 등과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의사가 뇌사자의 장기를 들어내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동차의 엔진룸에서 엔진이며 트랜스미션을 들어내듯이 뇌사자의 몸에서 필요한 장기를 들어냈다. 자동차의 엔진룸이 휑하게 비듯이 장기를 들어낸 뇌사자의 몸도 휑하게 비었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실려 다른 카센터로 운반되는 부품처럼 장기는 구급차에 실려 필요로 하는 병원으로 운반된다. 장기를 받아든 의사는 기계부품을 맞추듯이 장기에 혈관과 신경을 연결해서 작동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이 몇 세대만 지속되어도 인간의 몸은 진화해서 복잡한 수술 없이도 장기 정도는 척척 들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인간의 신체, 그리고 삶은 이미 기계와 분리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을 준비하면 한다. 완전히 인간적인 것도, 완전히 기계적인 것도 더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장착할 때다.
(기술비평가)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인문학의 지평에서 기계를 탐구하고 있는 기계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다. 재봉틀에서 첨단 제트 엔진에 이르기까지, 작동하는 물건에 관심이 많다. 『우주감각: NASA 57년의 이미지들』 『기계산책자』 등을 펴내고,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우주생활’,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사진의 과학’전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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