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해외 출장이 잡혔다. 보름 정도의 기간이었고 아테네를 경유해 크레타, 미코노스, 산토리니 3개의 섬을 도는 여정이었다. 다분히 설레지 않았다. 출장은 알다시피 일이고, 좀 별난 건 출장 앞에 붙은 ‘해외’라는 말인데, 그건 좀 거창하게 비행기를 타고 타국에서 일하는 것인지라 여행의 느낌은 별로 나지 않았다. 들뜸이 없달까. 여행의 반은 가기 전 출몰하는 기대와 계획, 전망과 긍정 사이에서 춤추는 들뜸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해외 출장은 그러한 들뜸을 침잠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출장가기 전 새롭게 탄생되는 일들이 그런 기분을 더 부추겼다. 출장 전 제출해야만 되는 근미래(!) 보고서들을 작성했고 출장에서 써야 될 여비 예정 정산서를 미리 출력해 보고했다(더불어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는 일이 이렇게나 기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나는 바빴다. 마음도 바빴고 머리도 바빠졌다. 또 10시간의 비행에서 읽어야 할, 그 지루한 가수면 상태에서의 소음 섞인 시간을 버텨줄 제물이 될 책을 고르는 일, 그 일이 퍽 고민스러웠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여유로움과 몰입은 이번 출장에서 그나마 나를 일에서 달래줄 것이기 때문. 책장을 몇 차례 훑다가 얼마 전 출간된 패티 스미스의 『M 트레인』(마음산책, 2016)을 백팩에 던져 넣었다.
그녀, 패티 스미스도 책 속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맥락 없어 보였던 여행의 목적지는 그녀의 내면에서 끝까지 기억된 사람, 작가들, 그 작가들과 연관된 장소들이었다. 좀 더 밝혀두자면, 그녀에게 강렬하게 읽혀 존재했던 책에서 나온 공간, 기억하고픈 저자들을 찾아다니는 게(좀 짓궂지만 죽은 자들의 묘지 순례기라 할 정도다) 여행의 목적이었다. 나는 좀 대책 없이 그녀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나갔다. 동네순찰자랄까. 낯선 곳에 여행 온 그녀는 작품에 등장했거나 동일한 이미지가 돌출되는 카페에 가서 그곳에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을 스케치한다. 내면에서 흘러가버린 사람들을 복원해내고 낯선 이방인과 정주자(定住) 사이에서 오고가는 삶에 대한 시적인 대화와 사색들이 넘쳐난다. 그녀에게 여행이란, 마음에 가라앉은 과거에서 읽었던 책의 내밀한 것들을 다시 현재로 소환하는 것에 바쳐진다. 기록이되 재구성된 픽션일기처럼 읽혔던 그 문장들은 여행기이면서 여행기가 아닌 것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 패티 스미스가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고 책에서 다시 책을 읽게 되는, 좀 복잡하게 얽힌 액자소설 속에 붙잡힌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10시간의 비행의 지루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나는 그녀, 패티 스미스의 마음의 기록들을 전부 다 읽어내지는 못했다. 아니, 그건 읽어낼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어찌 어느 한 사람의 몇십 년의 마음의 기록이 단 10시간으로 파악된단 말인가. 신이라면 모를까.
크레타의 이름 모를 비치의 선베드에 누워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었다. 크레타의 어느 해변에서 사진 작업을 하는 중이었고, 일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우연히 잡게 된 매력적인 이탈된 시간이, 내게 왔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챙겨 온 수영복으로 갈아입었고 바다에 잠시 들어간 뒤 줄곧 선베드에 누워 있었다. 어느 유럽인들의 막막하면서도 막연한 휴가를 흉내 내고 싶은 욕망이 일었고, 나는 작렬하는 지중해의 볕을 등지고 그 책을 펼쳤다. 중반쯤에서 페이지가 접혀 있었다. ‘『태엽 감는 새』를 읽다’라는 소제목이었다. 그녀, 패티 스미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책에서 꽤 깊은 호기심과 강렬한 예술적인 감정을 얻는다. 그 하루키의 소설은 그녀에게 현실과 비현실에서 자꾸만 교란되었던 본인의 내적인 질문의 답을 얻게 되었다고 밝힌다. 삶은 현실로만 구축되어 있는가. 혹시 삶은 현실에서의 틈, 비현실과의 잦은 마찰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들. 그런데 소설의 모호한 결말에 대해서 무척이나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소설에 빨려들다 못해 자기 눈으로 그 소설 속 무대를 보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말았으나 결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술회한다. “깔끔하게 매듭짓지 않고 헐렁하게 풀어둔 끄트머리들은 다 싫었다. 쓰다 만 문장들, 뜯지 않은 소포, 태풍이 닥쳐오는데 걷지도 않고 그냥 빨랫줄에 널어둔 외로운 빨래……” 그런 와중에 멕시코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프리다 칼로의 저택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 그녀는 주저 없이 여행을 준비한다. 그녀는 무심코 그때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책을 백팩에 던져 넣는다. 『태엽 감는 새』였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발견한 것이지만, 내가 선베드에 누워 읽었던 패티 스미스의 책의 소제목은 ‘『태엽 감은 새』를 잃다’였다. 내내 ‘읽다’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잃다’였다. 회사로 복귀한 나는 책상에 올려진 책봉투들을 뜯기 시작했고, 누군가 보내온 것 중에 이 책이 있었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책을 넘겨보다 어디쯤 읽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그 소제목 단락 부분을 읽다가 제목을 오독했음을 발견했다. 미세한 차이였으나 다가오는 건 천지차이였고 무게가 달랐다. 왜냐하면 이건 좀 묘한 일이지만 나는 여행 중에 그녀, 패티 스미스를 다 읽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 책은 ‘가미카쿠시(神隠し)’*되었달까. 아마도 그 선베드 옆 작은 협탁에 놓고 온 듯했다. 아니면 그리스 어딘가를 나도 모르게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 수가 없었다. 그 책이 내 손을 떠난 게 언제인지. 나는 다시 내게 새롭게 온 그녀, 패티 스미스를 읽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 단락을 마저 읽게 되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여행 어디쯤, 환승하는 공항 화장실에서 그 책 『태엽 감는 새』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모호했다. 읽다와 잃다 사이에서 행방불명된 것들이 어쩌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게 어쩌면 다 그런 것이겠지만 말이다.
*가미카쿠시(神隠し): 일본어로 “행방불명”. 구어적으로 ‘신에 의해 숨겨짐’이란 의미로 널리 쓰임.
격월간 문학잡지『Axt』 편집장. 평상시에는 잡지 일을 한다. 그 일이 하기 싫을 때에는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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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문文紋 : ‘읽다’와 ‘잃다’ 사이에서 행방불명된 것들
백다흠
2016-08-17
‘읽다’와 ‘잃다’ 사이에서 행방불명된 것들
뜻하지 않게 해외 출장이 잡혔다. 보름 정도의 기간이었고 아테네를 경유해 크레타, 미코노스, 산토리니 3개의 섬을 도는 여정이었다. 다분히 설레지 않았다. 출장은 알다시피 일이고, 좀 별난 건 출장 앞에 붙은 ‘해외’라는 말인데, 그건 좀 거창하게 비행기를 타고 타국에서 일하는 것인지라 여행의 느낌은 별로 나지 않았다. 들뜸이 없달까. 여행의 반은 가기 전 출몰하는 기대와 계획, 전망과 긍정 사이에서 춤추는 들뜸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해외 출장은 그러한 들뜸을 침잠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출장가기 전 새롭게 탄생되는 일들이 그런 기분을 더 부추겼다. 출장 전 제출해야만 되는 근미래(!) 보고서들을 작성했고 출장에서 써야 될 여비 예정 정산서를 미리 출력해 보고했다(더불어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는 일이 이렇게나 기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나는 바빴다. 마음도 바빴고 머리도 바빠졌다. 또 10시간의 비행에서 읽어야 할, 그 지루한 가수면 상태에서의 소음 섞인 시간을 버텨줄 제물이 될 책을 고르는 일, 그 일이 퍽 고민스러웠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여유로움과 몰입은 이번 출장에서 그나마 나를 일에서 달래줄 것이기 때문. 책장을 몇 차례 훑다가 얼마 전 출간된 패티 스미스의 『M 트레인』(마음산책, 2016)을 백팩에 던져 넣었다.
그녀, 패티 스미스도 책 속에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맥락 없어 보였던 여행의 목적지는 그녀의 내면에서 끝까지 기억된 사람, 작가들, 그 작가들과 연관된 장소들이었다. 좀 더 밝혀두자면, 그녀에게 강렬하게 읽혀 존재했던 책에서 나온 공간, 기억하고픈 저자들을 찾아다니는 게(좀 짓궂지만 죽은 자들의 묘지 순례기라 할 정도다) 여행의 목적이었다. 나는 좀 대책 없이 그녀의 문장들을 따라 읽어나갔다. 동네순찰자랄까. 낯선 곳에 여행 온 그녀는 작품에 등장했거나 동일한 이미지가 돌출되는 카페에 가서 그곳에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을 스케치한다. 내면에서 흘러가버린 사람들을 복원해내고 낯선 이방인과 정주자(定住) 사이에서 오고가는 삶에 대한 시적인 대화와 사색들이 넘쳐난다. 그녀에게 여행이란, 마음에 가라앉은 과거에서 읽었던 책의 내밀한 것들을 다시 현재로 소환하는 것에 바쳐진다. 기록이되 재구성된 픽션일기처럼 읽혔던 그 문장들은 여행기이면서 여행기가 아닌 것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 패티 스미스가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고 책에서 다시 책을 읽게 되는, 좀 복잡하게 얽힌 액자소설 속에 붙잡힌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10시간의 비행의 지루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나는 그녀, 패티 스미스의 마음의 기록들을 전부 다 읽어내지는 못했다. 아니, 그건 읽어낼 수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어찌 어느 한 사람의 몇십 년의 마음의 기록이 단 10시간으로 파악된단 말인가. 신이라면 모를까.
크레타의 이름 모를 비치의 선베드에 누워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었다. 크레타의 어느 해변에서 사진 작업을 하는 중이었고, 일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우연히 잡게 된 매력적인 이탈된 시간이, 내게 왔다.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챙겨 온 수영복으로 갈아입었고 바다에 잠시 들어간 뒤 줄곧 선베드에 누워 있었다. 어느 유럽인들의 막막하면서도 막연한 휴가를 흉내 내고 싶은 욕망이 일었고, 나는 작렬하는 지중해의 볕을 등지고 그 책을 펼쳤다. 중반쯤에서 페이지가 접혀 있었다. ‘『태엽 감는 새』를 읽다’라는 소제목이었다. 그녀, 패티 스미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책에서 꽤 깊은 호기심과 강렬한 예술적인 감정을 얻는다. 그 하루키의 소설은 그녀에게 현실과 비현실에서 자꾸만 교란되었던 본인의 내적인 질문의 답을 얻게 되었다고 밝힌다. 삶은 현실로만 구축되어 있는가. 혹시 삶은 현실에서의 틈, 비현실과의 잦은 마찰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들. 그런데 소설의 모호한 결말에 대해서 무척이나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소설에 빨려들다 못해 자기 눈으로 그 소설 속 무대를 보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말았으나 결말에 대해서는 이렇게 술회한다. “깔끔하게 매듭짓지 않고 헐렁하게 풀어둔 끄트머리들은 다 싫었다. 쓰다 만 문장들, 뜯지 않은 소포, 태풍이 닥쳐오는데 걷지도 않고 그냥 빨랫줄에 널어둔 외로운 빨래……” 그런 와중에 멕시코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프리다 칼로의 저택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 그녀는 주저 없이 여행을 준비한다. 그녀는 무심코 그때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책을 백팩에 던져 넣는다. 『태엽 감는 새』였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발견한 것이지만, 내가 선베드에 누워 읽었던 패티 스미스의 책의 소제목은 ‘『태엽 감은 새』를 잃다’였다. 내내 ‘읽다’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찾아보니 ‘잃다’였다. 회사로 복귀한 나는 책상에 올려진 책봉투들을 뜯기 시작했고, 누군가 보내온 것 중에 이 책이 있었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책을 넘겨보다 어디쯤 읽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그 소제목 단락 부분을 읽다가 제목을 오독했음을 발견했다. 미세한 차이였으나 다가오는 건 천지차이였고 무게가 달랐다. 왜냐하면 이건 좀 묘한 일이지만 나는 여행 중에 그녀, 패티 스미스를 다 읽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 책은 ‘가미카쿠시(神隠し)’*되었달까. 아마도 그 선베드 옆 작은 협탁에 놓고 온 듯했다. 아니면 그리스 어딘가를 나도 모르게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 수가 없었다. 그 책이 내 손을 떠난 게 언제인지. 나는 다시 내게 새롭게 온 그녀, 패티 스미스를 읽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 단락을 마저 읽게 되었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여행 어디쯤, 환승하는 공항 화장실에서 그 책 『태엽 감는 새』를 잃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모호했다. 읽다와 잃다 사이에서 행방불명된 것들이 어쩌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게 어쩌면 다 그런 것이겠지만 말이다.
*가미카쿠시(神隠し): 일본어로 “행방불명”. 구어적으로 ‘신에 의해 숨겨짐’이란 의미로 널리 쓰임.
격월간 문학잡지『Axt』 편집장. 평상시에는 잡지 일을 한다. 그 일이 하기 싫을 때에는 종종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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