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간 남았다. 뉴욕행 아시아나 항공 222편은 정확하게 8월 1일 오전 10시 반에 이륙할 예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부터 대략 6시간 뒤다. 출장이다. 이번에도 만날 사람과 할 일만 산더미다. 뉴욕은 두 번째다. 첫 뉴욕 여행도 출장이었다. 딱 36시간 동안 머물렀다. 겨우 짬을 내서 들렀던 곳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던 밤>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뉴욕은 <어벤져스>에서 파괴됐던 그대로였다. 그렇게 혼자 뉴욕에서 추억을 약간 쌓았다.
추억이 아니었다. 기억일 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미 뉴욕은 사진으로만 기록돼 있을 뿐이었다. 누구하고도 나눌 수가 없었다. 회사 동료들한테 “뉴욕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 전망대에 올랐었다”고 말했다. 동료들이 대답했다. “난 소호에서 쇼핑을 했었는데.” “그라운드 제로에는 가봤어?” “요즘은 브루클린이 뜬다더라.” “아니지, 미트패킹이지.” 그들도 각자만의 뉴욕을 기억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뉴욕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각자만의 기억일 뿐 정작 서로의 추억이 될 수 없었다. 여행의 정보였지만 누구와도 나누어질 수 없었고, 아무리 얘기해도 추억으로 되살아나지 않았다. 모두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각자만의 기억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여행은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다. 여정 동안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느꼈던 모든 것이 우리 영혼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어떤 여행은 우리 영혼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 고갱의 타히티 여행이 그랬다. 헤밍웨이의 쿠바 여행이 그랬다. 스티브 잡스의 인도 여행이 그랬다. 그렇게 영혼을 바꿔놓는 여행은 단지 기억이 아니다. 추억이다. 여행의 추억은 우리의 핵심 기억이 돼서 영혼을 흔들어놓는다.
기억과 추억의 차이는 사진과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잠시 들러서 둘러봤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의 풍경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풍경이 영화가 되려면 그곳에서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기억은 추억이 된다. 혼자만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기억일 뿐 추억이 아니다. 기억은 혼자만의 단독 정보이고, 추억은 둘 혹은 여럿의 공유 정보다.
▲ ⓒ Sam Valadi
일본 SF 애니메이션의 최고봉 <공각기동대>에도 비슷한 개념이 나온다. 인간의 기억을 아무리 모아놓아도 고스트가 생기지는 않는다. 기억을 공유할 사람이 없으면 기억 속에서 감정이 피어나지 않고 결코 추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뿐인 인생은 외롭고 추억 많은 인생은 행복한 이유다. 추억이 있어야 우리한테도 비로소 영혼이 깃든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그토록 열심히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이유가 어쩌면 이것이다. 기억을 여럿과 공유해서 추억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정작 페북이나 인스타에서 ‘좋아요’나 하트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기억이 추억이 되진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된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제한적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색깔은 공유할 수 있어도 그 순간 맡았던 냄새이나 그 순간 들려왔던 소음은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느꼈던 고독이나 그 순간 떠올랐던 첫사랑의 기억 같은 것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SNS로 유사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진짜 추억이 될 수는 없다.
혼자 하는 여행은 추억이 되기 쉽지 않다. 추억의 본질은 자기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억하는 자신이다. 상대방의 기억 속에 저장된 자신과 자신이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이 만날 때 마침내 주연과 배경이 결합된 영화 한 편이 완성된다. 서로를 기억해주는 여행의 동반자가 있어야 여행은 비로소 살아 있는 추억이 된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우리가 다시 만나 애써 여행의 기억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이유다. 다시 추억의 영화를 재생하고 그 추억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추억이 되려면 여행의 동반자가 필요하고 여행의 추억을 되살리려고 해도 여행의 동반자가 필요하다.
"여행에서 혼자만의 추억이란 없다. 여행은 언제나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하다."
물론 혼자 여행을 떠나더라도 길 위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옆 침대 친구나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낯선 외국인 같은 사람들 말이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일 수도 있고 관광가이드일 수도 있다. 그들이 잠시 길동무가 돼줄 수는 있다. 끝까지 함께할 순 없다. 각자의 길은 겹쳐졌던 나누어지고, 포개졌던 쪼개진다. 엇갈린 길동무와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다. 결국 길동무들의 추억은 재생되지 못하는 영화와 같아진다. 분명 추억을 쌓았지만 상영되지를 못한다. 우린 가끔 여정 속에서 만났던 길동무를 그리워하지만, 그들한테로 돌아가려고 길을 잡진 않는다. 우리의 추억은 쪼개진 채 맞춰지지 않는 조각이다.
여행에서 혼자만의 추억이란 없다. 여행은 언제나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면 그건 그리움 탓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립거나 그때 그 시공간에 속했던 자신이 그립거나, 그리운 누군가로부터 떠나고 싶거나. 결국 이때도 그리움의 대상이 여행의 동반자가 돼주는 셈이다.
첫 번째 뉴욕 여행처럼 이번 뉴욕 여행도 출장이다. 출장엔 길동무들이 있지만, 이번에도 그들과의 기억이 결코 추억이 되지 못할 거란 걸 안다. 뉴욕에서 돌아온 뒤 그들과 나눠 가진 추억의 조각들이 결코 맞춰지지 못할 거란 걸 안다. 앞으로 20시간 후면 뉴욕에 있겠지만 역시나 기억을 계획해도 추억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번 뉴욕 출장길엔 누군가를 그리워해볼 참이다. 그녀와 함께했을 뉴욕 여행을 상상해볼 참이다. 그녀에게 편지를 남겨볼 작정이다. 이번 출장에선 그렇게라도 뉴욕의 추억을 남기고 싶다. 6시간 뒤에 출발이다.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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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소셜클럽 : 추억의 조건
신기주
2016-08-10
추억의 조건
6시간 남았다. 뉴욕행 아시아나 항공 222편은 정확하게 8월 1일 오전 10시 반에 이륙할 예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부터 대략 6시간 뒤다. 출장이다. 이번에도 만날 사람과 할 일만 산더미다. 뉴욕은 두 번째다. 첫 뉴욕 여행도 출장이었다. 딱 36시간 동안 머물렀다. 겨우 짬을 내서 들렀던 곳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던 밤>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뉴욕은 <어벤져스>에서 파괴됐던 그대로였다. 그렇게 혼자 뉴욕에서 추억을 약간 쌓았다.
추억이 아니었다. 기억일 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미 뉴욕은 사진으로만 기록돼 있을 뿐이었다. 누구하고도 나눌 수가 없었다. 회사 동료들한테 “뉴욕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 전망대에 올랐었다”고 말했다. 동료들이 대답했다. “난 소호에서 쇼핑을 했었는데.” “그라운드 제로에는 가봤어?” “요즘은 브루클린이 뜬다더라.” “아니지, 미트패킹이지.” 그들도 각자만의 뉴욕을 기억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뉴욕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늘어놓기 시작했다. 각자만의 기억일 뿐 정작 서로의 추억이 될 수 없었다. 여행의 정보였지만 누구와도 나누어질 수 없었고, 아무리 얘기해도 추억으로 되살아나지 않았다. 모두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각자만의 기억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여행은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의 형태로 저장된다. 여정 동안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느꼈던 모든 것이 우리 영혼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어떤 여행은 우리 영혼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 고갱의 타히티 여행이 그랬다. 헤밍웨이의 쿠바 여행이 그랬다. 스티브 잡스의 인도 여행이 그랬다. 그렇게 영혼을 바꿔놓는 여행은 단지 기억이 아니다. 추억이다. 여행의 추억은 우리의 핵심 기억이 돼서 영혼을 흔들어놓는다.
기억과 추억의 차이는 사진과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잠시 들러서 둘러봤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의 풍경을 사진처럼 기억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풍경이 영화가 되려면 그곳에서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기억은 추억이 된다. 혼자만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기억일 뿐 추억이 아니다. 기억은 혼자만의 단독 정보이고, 추억은 둘 혹은 여럿의 공유 정보다.
▲ ⓒ Sam Valadi
일본 SF 애니메이션의 최고봉 <공각기동대>에도 비슷한 개념이 나온다. 인간의 기억을 아무리 모아놓아도 고스트가 생기지는 않는다. 기억을 공유할 사람이 없으면 기억 속에서 감정이 피어나지 않고 결코 추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뿐인 인생은 외롭고 추억 많은 인생은 행복한 이유다. 추억이 있어야 우리한테도 비로소 영혼이 깃든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그토록 열심히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이유가 어쩌면 이것이다. 기억을 여럿과 공유해서 추억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정작 페북이나 인스타에서 ‘좋아요’나 하트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기억이 추억이 되진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된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제한적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색깔은 공유할 수 있어도 그 순간 맡았던 냄새이나 그 순간 들려왔던 소음은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순간 느꼈던 고독이나 그 순간 떠올랐던 첫사랑의 기억 같은 것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SNS로 유사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진짜 추억이 될 수는 없다.
혼자 하는 여행은 추억이 되기 쉽지 않다. 추억의 본질은 자기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억하는 자신이다. 상대방의 기억 속에 저장된 자신과 자신이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이 만날 때 마침내 주연과 배경이 결합된 영화 한 편이 완성된다. 서로를 기억해주는 여행의 동반자가 있어야 여행은 비로소 살아 있는 추억이 된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우리가 다시 만나 애써 여행의 기억을 나누고 싶어 하는 이유다. 다시 추억의 영화를 재생하고 그 추억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추억이 되려면 여행의 동반자가 필요하고 여행의 추억을 되살리려고 해도 여행의 동반자가 필요하다.
"여행에서 혼자만의 추억이란 없다. 여행은 언제나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하다."
물론 혼자 여행을 떠나더라도 길 위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옆 침대 친구나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낯선 외국인 같은 사람들 말이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일 수도 있고 관광가이드일 수도 있다. 그들이 잠시 길동무가 돼줄 수는 있다. 끝까지 함께할 순 없다. 각자의 길은 겹쳐졌던 나누어지고, 포개졌던 쪼개진다. 엇갈린 길동무와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다. 결국 길동무들의 추억은 재생되지 못하는 영화와 같아진다. 분명 추억을 쌓았지만 상영되지를 못한다. 우린 가끔 여정 속에서 만났던 길동무를 그리워하지만, 그들한테로 돌아가려고 길을 잡진 않는다. 우리의 추억은 쪼개진 채 맞춰지지 않는 조각이다.
여행에서 혼자만의 추억이란 없다. 여행은 언제나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면 그건 그리움 탓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립거나 그때 그 시공간에 속했던 자신이 그립거나, 그리운 누군가로부터 떠나고 싶거나. 결국 이때도 그리움의 대상이 여행의 동반자가 돼주는 셈이다.
첫 번째 뉴욕 여행처럼 이번 뉴욕 여행도 출장이다. 출장엔 길동무들이 있지만, 이번에도 그들과의 기억이 결코 추억이 되지 못할 거란 걸 안다. 뉴욕에서 돌아온 뒤 그들과 나눠 가진 추억의 조각들이 결코 맞춰지지 못할 거란 걸 안다. 앞으로 20시간 후면 뉴욕에 있겠지만 역시나 기억을 계획해도 추억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번 뉴욕 출장길엔 누군가를 그리워해볼 참이다. 그녀와 함께했을 뉴욕 여행을 상상해볼 참이다. 그녀에게 편지를 남겨볼 작정이다. 이번 출장에선 그렇게라도 뉴욕의 추억을 남기고 싶다. 6시간 뒤에 출발이다.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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