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야기지만 과거의 여행은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일이었다. 도로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이동수단 역시 마땅치 않았다. 여행이란 것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흔치 않은 개념이었고, 혹여나 먼 길을 떠나게 되면 며칠이고 이동해야만 했다. 물론 인류탄생 이래 가장 전통적인 여행수단인 두 다리만으로.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여행자가 풍찬노숙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따라서 각 문화권에는 고유의 숙박업이 발달하기 마련이었다. 이때 한국 전통의 숙박시설이라 하면 역시 ‘주막(酒幕)’을 빼놓을 수 없다.
▲ 김홍도, <주막>부분≪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소장)
고려 때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주막이 처음부터 잠자리를 제공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초창기의 주막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어디까지나 주점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런 특징은 조선 초까지도 그리 다르지 않아 술값을 받은 주모가 탁주(濁酒)에 무료 안주 몇 점을 제공하는 게 전부였다. (한국 음식점의 특징인 무료 반찬은 이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14년간 조선에 억류되었던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도 조선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거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그네들이 고단한 몸을 쉬어갈 휴식처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랬던 사회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동법의 확대와 함께 이뤄진 화폐경제의 발달, 이로 인한 상인 계층의 확대가 숙박 시설의 필요성을 증대시킨 것이다. 과거시험 보러 가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본인이 태어난 고을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던 조선 전기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처한 건 오랜 시간 길거리에서 손님을 맞이해온 주막이었다. 이후 주막은 술과 식사, 그리고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복합공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 주막이 훌륭한 숙박시설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주막 건물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몰려든 여행자가 각방을 쓰기에도 어려웠다. 그래서 주막에서 잠을 청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혼숙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한 방에서 같은 베개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 것이다. 더군다나 한양에서 큰 과거시험이라도 열리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각 유력가문의 자제들이 좋은 잠자리를 차지하려고 승강이를 벌였다. 물론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직접 싸움판을 벌일 수는 없으니 보통 하인들끼리 말다툼이 벌어졌다. 심하게는 육박전까지 벌어졌다고 하는데, 주막을 운영하는 주모는 뒤처리에 대한 걱정으로 울고 싶은 지경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조선의 숙박시설은 다른 문명권에 비해 등장도 늦었고 시설도 낙후된 편이었다. 동아시아 내로 한정하더라도 중국에는 ‘판디엔(饭店)’, 일본에는 ‘료칸(旅館)’이라는 나름 구색을 갖춘 숙박시설이 있었으나, 조선은 주막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개항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여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발전이 더뎠던 것일까? 단순히 상업을 천시하고 주민들의 통제를 위해 숙박업을 억압해서 그랬을까?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역사에서 나타나는 어떤 상황이 온전히 한두 가지 원인만으로 결정되는 일은 드물다. 이런 통념적 측면 외에도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 유난히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 등 따져볼 것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요인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양반의 존재다. 물론 양반들이 따로 숙박사업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양반가에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란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봉제사란 제사를 지내는 것, 접빈객은 손님을 맞이하는 것, 즉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제사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때 손님이라 하면 평소 친분이 있던 사람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지나가던 나그네가 대상이었다. 전래동화나 야사 등에서 자주 나오는 것처럼 나그네가 “이리 오너라!”나 “지나가는 과객이온데…”라 말하며 양반가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안 가장이 놀부마냥 피곤한 성격이 아니라면 방도 내어주고, 술상도 차려줄뿐더러 인심이 후하면 노잣돈까지 챙겨준다. 양반 입장에서는 본인의 관대함을 광고해 인심을 얻을 수 있고, 통신이 원활치 못하던 시절 다른 지방의 소식도 빠르게 들을 수 있으므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다. 이런 양반가가 고을마다 거의 하나씩은 있었던 만큼 본격적인 숙박업이 발달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경쟁상대가 너무 강력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주막은 나루터나 고갯길 입구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나름의 숙박문화를 유지해왔다. 조선 후기에는 명승지 유람 붐이 일면서 전국 어떤 산간벽지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막이 늘어났다. 나그네들은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고 잠자리를 함께하며 나름의 ‘이야기’와 ‘흔적’을 만들어갔다.
▲ 신윤복, <주사거배> 부분,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
나는 낡은 국수분들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백석, [산숙]중에서
이랬던 주막은 근대를 마주하며 점차 쇠퇴해갔다. 근대화의 성격 중 일부인 분업과 전문화는 주막도 예외가 아니었다. 복합공간이었던 주막은 독자적인 주점으로, 음식점으로, 여관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주막은 명맥을 이어갔지만, 예전의 기세와 정체성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행자들의 잠자리는 훨씬 편리하고 청결해졌으나 주막 본연의 맛은 사라졌다.
2006년, 최후의 주막인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전통적 의미의 주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주막의 일면은 김홍도, 신윤복 등이 남긴 풍속화나 조상들이 남긴 짧은 기록 속에서나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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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쿠스 : 나그네들의 쉼터, 주막
박문국
2016-08-03
나그네들의 쉼터, 주막
뻔한 이야기지만 과거의 여행은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된 일이었다. 도로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이동수단 역시 마땅치 않았다. 여행이란 것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흔치 않은 개념이었고, 혹여나 먼 길을 떠나게 되면 며칠이고 이동해야만 했다. 물론 인류탄생 이래 가장 전통적인 여행수단인 두 다리만으로.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여행자가 풍찬노숙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따라서 각 문화권에는 고유의 숙박업이 발달하기 마련이었다. 이때 한국 전통의 숙박시설이라 하면 역시 ‘주막(酒幕)’을 빼놓을 수 없다.
▲ 김홍도, <주막>부분≪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소장)
고려 때 최초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주막이 처음부터 잠자리를 제공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초창기의 주막은 이름에서 나타나듯 어디까지나 주점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런 특징은 조선 초까지도 그리 다르지 않아 술값을 받은 주모가 탁주(濁酒)에 무료 안주 몇 점을 제공하는 게 전부였다. (한국 음식점의 특징인 무료 반찬은 이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도 모르겠다). 14년간 조선에 억류되었던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도 조선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이 거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나그네들이 고단한 몸을 쉬어갈 휴식처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랬던 사회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동법의 확대와 함께 이뤄진 화폐경제의 발달, 이로 인한 상인 계층의 확대가 숙박 시설의 필요성을 증대시킨 것이다. 과거시험 보러 가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본인이 태어난 고을을 벗어날 일이 거의 없던 조선 전기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처한 건 오랜 시간 길거리에서 손님을 맞이해온 주막이었다. 이후 주막은 술과 식사, 그리고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복합공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 주막이 훌륭한 숙박시설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주막 건물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몰려든 여행자가 각방을 쓰기에도 어려웠다. 그래서 주막에서 잠을 청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혼숙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한 방에서 같은 베개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 것이다. 더군다나 한양에서 큰 과거시험이라도 열리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각 유력가문의 자제들이 좋은 잠자리를 차지하려고 승강이를 벌였다. 물론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직접 싸움판을 벌일 수는 없으니 보통 하인들끼리 말다툼이 벌어졌다. 심하게는 육박전까지 벌어졌다고 하는데, 주막을 운영하는 주모는 뒤처리에 대한 걱정으로 울고 싶은 지경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조선의 숙박시설은 다른 문명권에 비해 등장도 늦었고 시설도 낙후된 편이었다. 동아시아 내로 한정하더라도 중국에는 ‘판디엔(饭店)’, 일본에는 ‘료칸(旅館)’이라는 나름 구색을 갖춘 숙박시설이 있었으나, 조선은 주막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개항기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여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발전이 더뎠던 것일까? 단순히 상업을 천시하고 주민들의 통제를 위해 숙박업을 억압해서 그랬을까?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역사에서 나타나는 어떤 상황이 온전히 한두 가지 원인만으로 결정되는 일은 드물다. 이런 통념적 측면 외에도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 유난히 산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 등 따져볼 것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요인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양반의 존재다. 물론 양반들이 따로 숙박사업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양반가에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란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봉제사란 제사를 지내는 것, 접빈객은 손님을 맞이하는 것, 즉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제사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때 손님이라 하면 평소 친분이 있던 사람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지나가던 나그네가 대상이었다. 전래동화나 야사 등에서 자주 나오는 것처럼 나그네가 “이리 오너라!”나 “지나가는 과객이온데…”라 말하며 양반가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때 그 집안 가장이 놀부마냥 피곤한 성격이 아니라면 방도 내어주고, 술상도 차려줄뿐더러 인심이 후하면 노잣돈까지 챙겨준다. 양반 입장에서는 본인의 관대함을 광고해 인심을 얻을 수 있고, 통신이 원활치 못하던 시절 다른 지방의 소식도 빠르게 들을 수 있으므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다. 이런 양반가가 고을마다 거의 하나씩은 있었던 만큼 본격적인 숙박업이 발달하기에는 좀 어려움이 있었을지 모른다. 경쟁상대가 너무 강력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주막은 나루터나 고갯길 입구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나름의 숙박문화를 유지해왔다. 조선 후기에는 명승지 유람 붐이 일면서 전국 어떤 산간벽지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막이 늘어났다. 나그네들은 이곳에서 술잔을 나누고 잠자리를 함께하며 나름의 ‘이야기’와 ‘흔적’을 만들어갔다.
▲ 신윤복, <주사거배> 부분,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
나는 낡은 국수분들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백석, [산숙]중에서
이랬던 주막은 근대를 마주하며 점차 쇠퇴해갔다. 근대화의 성격 중 일부인 분업과 전문화는 주막도 예외가 아니었다. 복합공간이었던 주막은 독자적인 주점으로, 음식점으로, 여관으로 점차 분화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주막은 명맥을 이어갔지만, 예전의 기세와 정체성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여행자들의 잠자리는 훨씬 편리하고 청결해졌으나 주막 본연의 맛은 사라졌다. 2006년, 최후의 주막인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전통적 의미의 주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주막의 일면은 김홍도, 신윤복 등이 남긴 풍속화나 조상들이 남긴 짧은 기록 속에서나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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