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질문해보자. 여행은 무엇과 무엇의 중간일까? 고대 그리스의 이 철학자는 용기를 두려움과 자신감의 중용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두려움 반대편에 용기를 놓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과 자신감의 중간에 용기를 놓는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무모해지고 두려움이 지나치면 겁쟁이가 된다. 용기가 있는 사람은 무모하지도 않고 겁쟁이도 아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엇과 무엇의 중간일까?
영화 <반지의 제왕> 제3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제 긴 모험의 여정이 끝났다. 그리고 호빗족 사총사인 프로도, 샘, 피핀, 메리는 고향 샤이어로 돌아왔다. 처음에 그들은 고향의 일상적 삶이 좀 어색했지만, 곧 적응하며 일상의 활기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프로도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은 마법사 간달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모험을 떠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용기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듯, 여행은 분명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행이 무엇과 무엇의 중간이라고 했을 때, 그 첫 무엇은 '일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일상과 무엇의 중간일까?
프로도의 모험이 알려주듯, 모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여행에도 위험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모험에 뒤따르는 위험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모험이란 정의상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여행자를 위해 국가는 위험이 발생한 지역을 정확히 '여행자제지역’으로 분류하여 알려준다.
이제 우리는 여행이 무엇과 무엇의 중간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여행은 일상과 모험의 중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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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stevenalan via Foter.com / CC BY-ND
사람들은 용기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두려움이 지나치면 비겁해진다고 말한다. 비겁한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있는 것을 말한다. 자신감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두려움을 모르고 무모해진다. 그리고 무모한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용기는 자신감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있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용기란 두려움과 자신감이 적당하게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행도 그런 것일까? 여행이 일상과 모험의 중간이라고 했을 때, 일상과 모험이 적당히 있는 것이 여행일까?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여행은 일상도 아니며 모험도 아니다. 여행은 그 둘을 배제하는 한에서 둘의 중간에 있다. 용기는 두려움과 자신감의 합이지만, 여행은 일상과 모험을 빼고 남는 것이다. 여행이란 단조롭거나 고달픈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험을 할 정도로 벗어나지는 않는다.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일상과 모험의 중간에 있다.
현대인의 삶은 모험이 없는 삶이다. 일하는 시간은 고달프고 쉬는 시간은 지루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여행에 앞서 들뜨고, 여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어쩌면 여행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삶이 고달프고 지루하기에 여행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삶은 더욱더 고달프고 지루해질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일상의 삶이 새롭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영 아쉽기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를 A라고 부르고 후자를 B라고 불러보자. 그럴 때 A야말로 여행을 잘 다녀온 사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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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에게도 할 말이 있다. B 역시 할 말이 있겠듯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날 일상의 삶은 그처럼 지루하고 고달픈 것이 사실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의 웅변에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에게 할 말은 이렇다. “여행은 일상이 아니지만 모험도 아니다. 용기가 두려움과 자신감의 합인 것처럼 여행도 일상과 모험의 합이 아니다. 여행이 일상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모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두려움과 자신감의 합이 용기라면, 그 용기가 있는 사람들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 내 생각에 그들의 삶은 일상 속에 모험이 있는 삶, 일상과 모험의 합으로서의 삶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기에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두려움이 있기에 일상을 파괴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상 속에 모험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때가 되면 여행을 떠난다. 만약 일상 속에 모험이 있다면, 여행을 떠날 이유는 줄어들 것이다. 혹은, 여행을 떠나더라도 여행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고로 여행은 일상+모험의 연장, 즉 삶의 연장이 될 것이다.
용기가 있어도 일상 속에 모험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일상의 삶에 모험을 도입할 수 있을까?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모험 말고, 일상을 파괴하는 모험 말고, 경쟁하고 협동하는 모험, 즐기면서 탐구하는 모험. B라면 이 중요한 물음을 다음번 여행의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A라면 다음 여행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난번 여행만큼이면 충분하겠지만 말이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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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일상, 여행, 모험
이성민
2016-08-03
일상, 여행,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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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질문해보자. 여행은 무엇과 무엇의 중간일까? 고대 그리스의 이 철학자는 용기를 두려움과 자신감의 중용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두려움 반대편에 용기를 놓는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과 자신감의 중간에 용기를 놓는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무모해지고 두려움이 지나치면 겁쟁이가 된다. 용기가 있는 사람은 무모하지도 않고 겁쟁이도 아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엇과 무엇의 중간일까? 영화 <반지의 제왕> 제3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제 긴 모험의 여정이 끝났다. 그리고 호빗족 사총사인 프로도, 샘, 피핀, 메리는 고향 샤이어로 돌아왔다. 처음에 그들은 고향의 일상적 삶이 좀 어색했지만, 곧 적응하며 일상의 활기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프로도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결국은 마법사 간달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모험을 떠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용기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듯, 여행은 분명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행이 무엇과 무엇의 중간이라고 했을 때, 그 첫 무엇은 '일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일상과 무엇의 중간일까? 프로도의 모험이 알려주듯, 모험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여행에도 위험이 있을 수 있겠지만, 모험에 뒤따르는 위험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모험이란 정의상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여행자를 위해 국가는 위험이 발생한 지역을 정확히 '여행자제지역’으로 분류하여 알려준다. 이제 우리는 여행이 무엇과 무엇의 중간인지를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여행은 일상과 모험의 중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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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stevenalan via Foter.com / CC BY-ND
사람들은 용기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두려움이 지나치면 비겁해진다고 말한다. 비겁한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있는 것을 말한다. 자신감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두려움을 모르고 무모해진다. 그리고 무모한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용기는 자신감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있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용기란 두려움과 자신감이 적당하게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여행도 그런 것일까? 여행이 일상과 모험의 중간이라고 했을 때, 일상과 모험이 적당히 있는 것이 여행일까?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여행은 일상도 아니며 모험도 아니다. 여행은 그 둘을 배제하는 한에서 둘의 중간에 있다. 용기는 두려움과 자신감의 합이지만, 여행은 일상과 모험을 빼고 남는 것이다. 여행이란 단조롭거나 고달픈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험을 할 정도로 벗어나지는 않는다. 정확히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일상과 모험의 중간에 있다. 현대인의 삶은 모험이 없는 삶이다. 일하는 시간은 고달프고 쉬는 시간은 지루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여행에 앞서 들뜨고, 여행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어쩌면 여행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삶이 고달프고 지루하기에 여행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삶은 더욱더 고달프고 지루해질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 일상의 삶이 새롭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게 영 아쉽기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자를 A라고 부르고 후자를 B라고 불러보자. 그럴 때 A야말로 여행을 잘 다녀온 사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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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에게도 할 말이 있다. B 역시 할 말이 있겠듯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날 일상의 삶은 그처럼 지루하고 고달픈 것이 사실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의 웅변에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B에게 할 말은 이렇다. “여행은 일상이 아니지만 모험도 아니다. 용기가 두려움과 자신감의 합인 것처럼 여행도 일상과 모험의 합이 아니다. 여행이 일상을 대체할 수는 있어도 모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두려움과 자신감의 합이 용기라면, 그 용기가 있는 사람들의 삶이란 어떤 삶일까? 내 생각에 그들의 삶은 일상 속에 모험이 있는 삶, 일상과 모험의 합으로서의 삶이다.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기에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두려움이 있기에 일상을 파괴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일상 속에 모험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때가 되면 여행을 떠난다. 만약 일상 속에 모험이 있다면, 여행을 떠날 이유는 줄어들 것이다. 혹은, 여행을 떠나더라도 여행의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고로 여행은 일상+모험의 연장, 즉 삶의 연장이 될 것이다. 용기가 있어도 일상 속에 모험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일상의 삶에 모험을 도입할 수 있을까?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모험 말고, 일상을 파괴하는 모험 말고, 경쟁하고 협동하는 모험, 즐기면서 탐구하는 모험. B라면 이 중요한 물음을 다음번 여행의 연구 주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A라면 다음 여행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난번 여행만큼이면 충분하겠지만 말이다.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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