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화면에 대동여지도를 띄워 놓고 들여다본다. 지도 구석구석을 손끝으로 옮겨 다니다 보면 지도는 온통 고개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고개란 자연 그대로의 산줄기와 사람이 만든 길의 교점일 따름이어서 산줄기, 물줄기, 그리고 길이 제각기 가로질러 만나는 지도 속 19세기 우리 국토는 고개와 나루들로 촘촘하다. 그 어디든 그 시절 민초들이 겪은 무수한 애환이 서려 있음은 아리랑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하며 넘어가는 정선아리랑은 김정호의 지도를 악보 삼아 우리 산천을 어루만지며 떠도는, 시름겨운 노래이리라.
적유현,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
대동여지도 속 작은 점 하나로 표시된 ‘적유현狄踰峴’이란 고개 역시 옛 사람들이 노래로, 걸음으로 굽이굽이 넘어가던 여러 고개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굳이 노래는, 이 고개 위에 멈추어 설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다시 수유고개를 넘고 아무 고개를 넘고 넘어서 어디론가 이동해서 머무르거나 되돌아오면 그만이었다. 먼 옛날 북방의 여진족이 넘나들었다 해서 이름 붙인 적유현, 토박이말로는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던 고개는 이 땅의 여느 고개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살림에 지리적 윤곽을 제시해 주고, 때로는 이편과 저편을 잇고 열어 주던 범상한 노동의 길목이었을 따름이다.
▲ 경조오부도 속 적유도
이 고개가 미아리고개라는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고개 너머 미아리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생기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바뀐 이름 위에 유별난 ‘명성’이 더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6년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발표되고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잔잔히 진행되는 트로트 반주 위에 가수 이해연의 가녀린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격정을 더해 가며 얹혀 흘러가는 노래는 6·25전쟁 동안 미아리고개에서 남편과 이별한 이름 없는 한 여인의 한탄가이다.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과 함께 전쟁 후 널리 애창된 이 노래 때문에 미아리고개는 일약 6·25전쟁이라는 민족 비극의 상징적 장소로 떠올랐다.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그토록 큰 인기를 얻은 비결은 뭐였을까? 박완서의 소설 『그 남자네 집』이 하나의 답변이 될 것 같다. 1950년대 중후반 전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중산층 여인네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당시 그네들이 처했던 상황과 심리를 잘 관찰해서 보여준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
▲ ⓒ세계사
위로받을 사람과 위로할 사람, 이용할 사람과 이용당할 사람들은 쉽게 연줄이 닿았고, 나쁜 건 빨리 잊어버리는 게 살 궁리하는 데 유리하다는 걸 저절로 터득하고 있었다. 마침내 살아남아 돌아왔다는 감격이 마취제처럼 원한을 달래고 상처를 다둑거렸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세계사, 2012.
▲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의 모습 ⓒ백외준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새도 없이, 남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전쟁 통에 겪은 아프고 쓰라린 기억일랑 빨리 잊고 억척같이 살기로 작정한 어머니요 며느리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없이 바삐 살아도 지워지지 않고 발작처럼 도지는 것이 전쟁의 상처였다. 죽은 자들보단 도리어 산 자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한 씻김의 노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때마침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흡사 만신과도 같이, 남편 잃은 아내의 목소리를 빌려 이 땅의 아낙들을 다독거리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조금씩 저마다 속에 감춰두고 있던 슬픔의 파편들을 수거해 가지는 않았을까?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이 마지막 노랫말은 어찌 보면 간절한 기다림의 외침이라기보단 전쟁의 쓰라린 기억들은 이제 그만 미아리고개 밖으로 넘겨버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희망의 역설이었을지 모른다.
현재 미아리고개 고갯마루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건립된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높고 두꺼운 벽 뒤에 가려져 있어 하루가 다가도록 찾아와 보는 이 하나 없다. 본래 노래의 운명이란 딱딱한 비석 위에 머물러 정착할 것이 못되므로 털끝 만큼도 아쉬움은 없다. 다만 새 노래를 생각할 뿐이다. 한번도 듣지 못한, 부르지 못한 노래를. 이 고개를 내려가는 사람의 노래를. 떠밀림 반, 제 걸음 반으로 걸어가는 그가 땅 위에 그릴 새로운 악보를.
[우리동네 인문학] 동네 이름의 인문학ㅣ미아리고개를 넘는 노래
백외준
2016-05-12
미아리고개를 넘는 노래
스마트폰 화면에 대동여지도를 띄워 놓고 들여다본다. 지도 구석구석을 손끝으로 옮겨 다니다 보면 지도는 온통 고개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고개란 자연 그대로의 산줄기와 사람이 만든 길의 교점일 따름이어서 산줄기, 물줄기, 그리고 길이 제각기 가로질러 만나는 지도 속 19세기 우리 국토는 고개와 나루들로 촘촘하다. 그 어디든 그 시절 민초들이 겪은 무수한 애환이 서려 있음은 아리랑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하며 넘어가는 정선아리랑은 김정호의 지도를 악보 삼아 우리 산천을 어루만지며 떠도는, 시름겨운 노래이리라.
적유현,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
대동여지도 속 작은 점 하나로 표시된 ‘적유현狄踰峴’이란 고개 역시 옛 사람들이 노래로, 걸음으로 굽이굽이 넘어가던 여러 고개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굳이 노래는, 이 고개 위에 멈추어 설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다시 수유고개를 넘고 아무 고개를 넘고 넘어서 어디론가 이동해서 머무르거나 되돌아오면 그만이었다. 먼 옛날 북방의 여진족이 넘나들었다 해서 이름 붙인 적유현, 토박이말로는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던 고개는 이 땅의 여느 고개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살림에 지리적 윤곽을 제시해 주고, 때로는 이편과 저편을 잇고 열어 주던 범상한 노동의 길목이었을 따름이다.
▲ 경조오부도 속 적유도
이 고개가 미아리고개라는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고개 너머 미아리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생기면서부터다. 그리고 그 바뀐 이름 위에 유별난 ‘명성’이 더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6년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발표되고 부터라고 할 수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잔잔히 진행되는 트로트 반주 위에 가수 이해연의 가녀린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격정을 더해 가며 얹혀 흘러가는 노래는 6·25전쟁 동안 미아리고개에서 남편과 이별한 이름 없는 한 여인의 한탄가이다.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과 함께 전쟁 후 널리 애창된 이 노래 때문에 미아리고개는 일약 6·25전쟁이라는 민족 비극의 상징적 장소로 떠올랐다.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그토록 큰 인기를 얻은 비결은 뭐였을까? 박완서의 소설 『그 남자네 집』이 하나의 답변이 될 것 같다. 1950년대 중후반 전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중산층 여인네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당시 그네들이 처했던 상황과 심리를 잘 관찰해서 보여준다.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
▲ ⓒ세계사
위로받을 사람과 위로할 사람, 이용할 사람과 이용당할 사람들은 쉽게 연줄이 닿았고, 나쁜 건 빨리 잊어버리는 게 살 궁리하는 데 유리하다는 걸 저절로 터득하고 있었다. 마침내 살아남아 돌아왔다는 감격이 마취제처럼 원한을 달래고 상처를 다둑거렸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세계사, 2012.
▲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의 모습 ⓒ백외준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새도 없이, 남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전쟁 통에 겪은 아프고 쓰라린 기억일랑 빨리 잊고 억척같이 살기로 작정한 어머니요 며느리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없이 바삐 살아도 지워지지 않고 발작처럼 도지는 것이 전쟁의 상처였다. 죽은 자들보단 도리어 산 자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한 씻김의 노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때마침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흡사 만신과도 같이, 남편 잃은 아내의 목소리를 빌려 이 땅의 아낙들을 다독거리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조금씩 저마다 속에 감춰두고 있던 슬픔의 파편들을 수거해 가지는 않았을까?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이 마지막 노랫말은 어찌 보면 간절한 기다림의 외침이라기보단 전쟁의 쓰라린 기억들은 이제 그만 미아리고개 밖으로 넘겨버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는 희망의 역설이었을지 모른다.
현재 미아리고개 고갯마루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건립된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높고 두꺼운 벽 뒤에 가려져 있어 하루가 다가도록 찾아와 보는 이 하나 없다. 본래 노래의 운명이란 딱딱한 비석 위에 머물러 정착할 것이 못되므로 털끝 만큼도 아쉬움은 없다. 다만 새 노래를 생각할 뿐이다. 한번도 듣지 못한, 부르지 못한 노래를. 이 고개를 내려가는 사람의 노래를. 떠밀림 반, 제 걸음 반으로 걸어가는 그가 땅 위에 그릴 새로운 악보를.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살고 있다. 2013년부터 성북문화원 향토사 연구팀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미아리고개』, 『성북동- 만남의 역사와 꿈의 공간』등 성북구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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