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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 우리 집]‘참을 수 없는’ 같이 사는 즐거움ㅣ 멋있게 다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일훈

2016-04-28

‘참을 수 없는’ 같이 사는 즐거움 멋있게 다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의식주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것의 대책이 부족·절실하면 생존이고, 느긋하면 생활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었다 해도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선택하는 일상이어야 비로소 문화적인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는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 문화적으로 살면서도, 옷(衣)과 밥(食)은 중요하고 민감하게 여기지만 사는 집(住)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감각하다. 왜 그럴까. 옷과 밥은 몸에 붙어 있지만 집(건축·공간)은 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숨 쉬는 동안 마시는 공기를 담고 있는 장치(집·건축·공간) 만큼 몸에 밀접한 것이 어디 있을까. 다만, 집(건축·공간)은 사람보다 크고 넓어, 몸에서 떨어진 듯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패스트 푸드, 패스트 하우징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소행주의 외관. ‘소행주’란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의 줄임말로, 진정한 공동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주거 형태를 보여준다.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소행주의 외관. ‘소행주’란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의 줄임말로,

 진정한 공동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주거 형태를 보여준다. ⓒ조윤주

 

자본시장에서 의식주의 생산과 소비 구조는 유사하다. 패스트 푸드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할 수없이 패스트 푸드를 먹는 이유는 여러 가지, 바쁘고 시간 없고 여유가 없을 때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패스트 푸드는 바쁜 손님(소비자)을 위한 음식으로 여겨지지만 실상 패스트 푸드는 장사(판매자·생산자)를 위해 만들어 놓은 상품이다. 미리 만들어 놓아야 같은 시간에 많이 팔 수 있으니까. 사서 입는 기성복이 아무리 비싸고 디자인이 여러 종류라 해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은 모두 패스트 클로즈(Fast clothes), 음식으로 치면 패스트 푸드인 셈이다.

 

집(건축)도 마찬가지, 미리 만든 상품으로서의 집을 팔고 산다. 아파트가 대표적인 패스트하우징 상품이다. 반복·복제된 방의 탑, 아파트는 미리 만들어 놓은 공간 제품(평면의 형식과 구조, 공간의 연결, 각 방의 형태와 넓이… 등의 동일함)이라서 어느 가정에나 맞는 듯 보이지만 살펴 볼수록 어느 가정에도 맞지 않는다. 가정이란 식구수가 같아도 구성이 다르고 구성이 같아도 사람이 다 다르다. 그러니 살고 싶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방에 맞추어 사는 꼴이다. (여기서 잠깐, 맞추어 살 방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무주택자들에게 건축가의 무력함을 고백한다. 무주택자를 줄이는 노력은 건축 이전에 정치·사회적 정책의 문제이다.)

 

보통 내 집을 마련하려면 집값을 준비하여 적당한 집을 구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살고 싶은 대로 원하는 집을 짓는 것이다. 누군들 그런 바람이 없겠는가. 오죽하면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 년”살고 싶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자 하는 열망이 대중가요로 불리겠는가.


소행주-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하지만 혼자서 원하는 곳에 원하는 집을 짓기란 만만치 않다. 특히 땅값이 금값인 도시에서는 쉽지 않아 많은 이들이 공동주택(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주택)을 구입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대로 미리 지어놓은 상품으로서의 집은 각 가정의 고유한 살림살이 방식이 반영되지 않은 탓에 나름대로 살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런데 요즘 공동주택을 지으면서도 각 세대(가정)의 희망사항을 반영하여 집을 짓고 살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름 하여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이다. (필자는 ‘소행주’ 초기 건축 총괄 코디네이터, 지금은 자문위원장으로서 의견을 나누는 인연을 맺고 있다.)

 

 

부천시에 위치한 한 소행주의 모습

▲ 부천시에 위치한 한 소행주의 모습 ⓒ이일훈

 

“소통이 있어 행복”하다는 말은 그간의 ‘불통’의 집에 살기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 누가 살지도 모르고 지어 놓은 집(특히 공동주택)에 살게 되면 집을 고치고 싶어도 한계가 있고, 새로 짓는 경우라도 입주자(구매자)의 의견이나 희망사항이 반영되지 않으니 여전히 ‘불통’의 집인 것이다.

 

‘소행주’는 입주 예정자를 모집하여 의견을 모은다. 서로를 알기 위한 대화와 수련 모임, 집을 주제로 한 공동 연수, 주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발표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는다. 각 세대(보통 6~10세대)의 경제적 형편대로 원하는 면적을 배분하고 층별 위치를 정한다. 그 다음엔 건축물의 구조 방식에 무리가 없는 한 각 세대별 희망대로 평면을 구성한다. 각 가정은 자기 살림살이 방식을 원하는 대로 표현한다. 이 과정은 단순히 집을 매매하는 경우에서는 절대 누릴 수 없는 ‘소행주’만의 고유한 특질이다. 자기가 생활할 집의 방의 위치와 크기, 각 기능의 생활 공간을 원하는 대로 배치하는 고민과 즐거움을 누린다. 대부분 공간의 면적을 치수로 표현하는 일에 어려워하지만 의외로 전문가도 감탄하는 아이디어를 내기도한다.

 

그렇게 그려지는 각 세대는 어느 집은 거실 중심이고, 어느 집은 식당 중심이며, 어느 집은 복층이고, 어느 집은 침실이 작고, 어느 집은 침실과 거실을 구분하지 않는다. 같은 식구 수라 하더라도 침실·욕실·화장실의 개수와 넓이가 제각각이다. 왜냐하면 각 가정마다 살고 싶은 집의 희망과 구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세대 중에 모양이 같은 집은 하나도 없다. 모든 세대가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맞춘 고유한 살림의 기하학을 그리고 구축하는 것이다. (붕어빵 찍듯이 같은 구조를 반복, 시공하는 아파트와 달리 공사기간이 길고 힘듦을 짐작하자.)

 

공동주택이지만 각 세대의 평면 배치·공간 구성·면적 배분은 각각의 개별성이 유지된다. (내부 공간의 각기 다른 특성을 입면 디자인에도 연결시킨다. 세대별 입면은 패턴·색상·재료 등을 차이를 두어 각기 다르게 보인다. 모든 세대가 동일한 입면을 갖는 다른 공동주택과 개념을 달리한다.) 여기서 끝나면 일반적인 주문주택과 다를 게 별로 없다.


‘소행주’ 속 커뮤니티 룸의 가능성


‘소행주’의 핵심은 공동성의 가치를 품고 있는 ‘커뮤니티 룸’에 있다. ‘커뮤니티 룸’은 각 세대가 1/n로 소유하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다목적 공동방(사랑방)이다. 한집에서 3.3평방미터(1평)를 부담하여 10집이면 33평방미터(10평)가 된다. 각 세대의 거실보다 넓어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다. 아이들 놀이방이면서 공부방이고, 토론·회의도 하고, 영화도 같이 보고 술자리도 같이 한다. 이 집 저 집에서 반찬 한 가지씩 가져오면 식사가 잔치다. 강습회가 열리기도 하고 인근 주민들에게 빌려 주기도 한다. 입주자들은 처음에 ‘커뮤니티 룸’을 만드는 비용을 각 세대가 분담해야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만 살면서 더 크게 만들지 못함을 아쉬워한다. ‘소행주’ 1호, 2호, 3호… 등의 ‘커뮤니티 룸’은 그 성격이 각기 다르다. 어디는 어린이 놀이방 같고, 어디는 카페나 식당 같다. 서로 상의하여 그 성격을 정하기 때문이다. 공동 창고를 만들어 같이 쓰고 옥상 정원에서는 고기 굽는 회합도 자주 열린다.

 

‘소행주’에 사는 사람들은 옛날 시골동네의 정서처럼 외출할 때 어린아이를 옆집에 맡기고 간다. 앞집과 윗집, 아랫집이 현관문을 열고 산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인 것이다.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그 사정은 책 『우리는 다른 집에 살아요(소행주+박종숙, 현암사, 2013)』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이 과정에서 ‘소행주’ 살림꾼들은 단순한 시행사가 아니라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역할을 한다. 건축은 삶의 방식을 구축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드웨어 아닌 소프트웨어 임을 느끼게 한다.

 

‘소행주’ 어느 집의 거실 모습

▲ ‘소행주’ 어느 집의 거실 모습 ⓒ이일훈

 

‘소행주’의 여러 경험은 계속 변화, 발전하고 있다. 입주자들 서로가 ‘같이 산다’는 의식을 나누기에 가능한 일이다. 같은 층에서 현관을 마주보는 경우 서로가 상의하여 복도를 공동 응접실처럼 쓰기도하고, 아래 위층이 상의해서 계단참에 책장을 놓기도 한다. 공동주택에서 서로 닫고 살면 좁아지고 열고 살면 넓어진다는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다. 1층 출입문에 공용 신발장을 설치하고 모든 층에서 실내화를 신기도 하는데 이는 집집마다 어린아이가 있어 건축물 전체를 좀 더 위생적으로 쓰기 위하여 입주민들이 합의한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아이들은 자연스레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어른들은 ‘따로 또 같이’ 더 성숙해지는 것이다.

 

필자는 ‘소행주’의 이러저런 행사에서 그들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당부한다. “이웃과 웃으며 즐겁게 잘사는 방법은 멋있게 다투는 것”이라고. 멋있게 다투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동성의 본령인 것이다.


우리의 건축에 ‘공동성’은 있는가?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소행주

▲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소행주. ⓒ조윤주

 

‘소행주’는 현재 10여 채가 완공 또는 시행 중에 있다. 얼마 전 ‘소행주에서 사는 이를 만났다. (마침 어느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으로 다투다 살인 사건이 보도된 직후였다.)

 

a: ‘소행주’에는 층간 소음이 없나요? b: 왜 없겠어요. 있지요. 아무리 튼튼하게 집을 지어도 아이들이 뛰면 울리지요.
a: 그럼 어떻게 하나요?
b: 아, 그런데 그게 소음이 아니에요.
a: 아이들이 뛰어 쿵쿵거리는데 소음이 아니라구요?
b: 예. 누가 뛰는지 알거든요. 내가 아는 아이가 노는 거니 소음이 아니지요. 우리 아이도 그렇게 놀거든요.

 

그렇다. 누가 뛰는지 알면 소음도 소음이 아닌 것이다. 모르는 사람의 소리는 노래도 소음일 수 있지만 아는 사람이 뛰면 소음도 노래도 들리는 것이다. (필자는 짧은 대화에서 큰 울림을 받았다. 층간 소음은 물리적 방법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방법으로 없애는 것이 묘책이라는 것을.)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지내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벽에 갇힌 것이고, 이웃의 부재를 당연하게 여기며 사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 단절의 벽에 갇힌 집이 무슨 자랑이란 말인가.

 

공동주택에 ‘공동성’은 있는가. 사는 지역과 동네에 ‘공동성’은 있는가. 이 사회에 ‘공동성’은 있는가. “우리의 건축에 ‘공동성’은 있는가?” 등을 누군가 물을 때마다 회의적인 대답이 들리는 시절에 ‘소행주’에서 들리는 웃음 소리는, ‘참을 수 없는’ 같이 사는 즐거움 아니겠는가. 불편한 듯 편하고, 어려운 듯 쉽고, 보고도 잘 믿기지 않는 ‘소행주’는 생각하고 배울 것이 많은 주거 건축, 아니 탁한 세상에 권유할 만한 삶의 한 방식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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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일훈
이일훈

식물성의 사유를 지닌 철학적 건축가로 불리며,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권유하는 ‘채나눔’ 설계방법론을 주창한다. 천주교 ‘자비의 침묵수도원’ ‘안드레아병원 성당’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불교 ‘도피안사 향적당’과 ‘기찻길옆 공부방’ 등의 사회성 짙은 작업을 했다. 『사물과 사람 사이』,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등의 책을 펴냈다. 건축주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묶은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 대만에서 번역·출간되기도 했으며, 건축의 대중화와 인문학으로서의 건축을 보여주는데 한몫한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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