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여, 자신을 탓하지 말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순응하지 말고 거부해라, 청년세대의 반역이 부재하는 시대는 어둠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 드리워진 어둠을 거두고 희망을 다시 세울 자는 젊은이들이다.”
▲ 장하성의 『한국자본주의』, 위의 인용문은 같은 시리즈의 2권. ⓒ헤이북스
설핏 보면, 7~80년대 대학가에 나돌았던 불온 문서의 한 구절인 듯하다. 이 글은 작금에, 그것도 경제학자인 장하성이 쓴 책에 나온 한 구절이다. 오늘의 청년문제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는 데 두루 동의한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치고 대학에 들어가나, 그곳에서는 이른바 스펙쌓기에 몰두한다. 그러나 취업의 문은 매우 좁은데다 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는 난망한 상황에 몰려있다. 이러다 보니 최근 쏟아져 나오는 청년담론은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담았다. ‘3포세대’라는 말이 이미 철 지난 말이 될 정도다. 몇개를 포기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청년세대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했다면, 그 나라의 미래가 어떨지는 뻔하다. 그럼에도 좀처럼 상황이 개선될 기미기 보이지 않는다.
청년담론의 공통점은 오늘의 문제가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라 분석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청년세대가 이 구조적 모순을 개선하기 보다는, 개인 능력의 극대화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소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이 현상은 청년세대가 현실을 지배하는 담론에 포획당했다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의 청년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은, 최대 피해자인 청년세대가 스스로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제기하고, 여론의 힘을 빌여 사회적으로 해소할 능력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아마 우리 역사에서 청년이라는 낱말에 이토록 절망적인 기운이 깃든 적은 없어 보인다.
청년은 차별에 찬성하는가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일그러진 청년세대의 초상화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이십대는 늘 시대의 열외적 존재였고, 약간은 당돌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저항했기에 나름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었다.” 당연하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바로 이런 청년 이미지가 일구어냈다. 그런데 지은이는 그 구절에 이어 바로 다음처럼 말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이 한마디로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터다. 지은이는 먼저 오늘의 청년세대의 특징은 무엇인지 소상히 밝힌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통제적 자기계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경영학은 조직적응의 차원에서, 심리학은 개인의 자아치료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교육학은 평생학습”이라는 의미에서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며, 이들의 공통점은 성과에 주목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현실의 청년들은 자기계발의 목표가 오로지 취업준비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계발은 “당연히 외국어 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참가, 체력관리, 외모가꾸기(심하면 성형도 불사), 자기소개서 작성연습, 프리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을 가리킬 뿐이다.
▲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청년세대의 자기계발이 드러낸 문제점은 “그 결과가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데도 다른 대안이 없어 그저 ‘계속’ 해나가고만 있다는 데 있다.” 이 점이 바로 사회구조적인 면을 문제삼아 해결하지 않는다는 비판과 맞닿아 있다. 객관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주체의 성실성을 문제삼고 있다는 말이다. 지은이는, 이런 특징이 종국에는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자기만족’에 이른다고 분석한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충격적인 책의 부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엄격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청년세대와 심층면접을 통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분석한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청년들은 충격적인 답변을 한다. 만연된 불평등 현상을 대체로 긍정한다.
“즉, 남들보다 시간관리를 더 잘해온 사람이 사회적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더 가치있게 효율적으로 잘 사용한 능력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직급의 차별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별의 근거가 정당하므로, 해고당하거나 비정규직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차별도 정당한 것이다. 이걸 뛰어넘는 요구가 나오면 이십대들은 의아해 한다. 게다가 자기들 생각에는 당연히 정규직이 되어야 할 사람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어떻게 ‘감히 부족한 사람’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지 개탄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자기계발의 논리로 무장한 청년세대의 고유한 특징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이다. 두번째는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패자에 대한 편견의 이면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무의식이 자리잡은지라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석은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 청년세대의 대학 서열주의 실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그 원인에 대한 해명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지은이는 누구나 예상하듯이 다른 무엇보다 IMF의 추억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 충격은 청년세대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얻는 것’ 이외의 꿈들을 당연히 거세”하게 했다. 다음으로는 대학의 기업화이다. 마지막으로는 before/after의 덫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것은 “불안한 현대사회를 사는 ‘같은 이십대’가 성공하는 ‘다른 사례’를 분명히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아직 변신 프로그램의 ‘Before’ 상태일 뿐이기에, 열심히 하다보면 분명 ‘After’ 상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청년은 정말 괴물이 되었나
지은이가 ‘괴물’이라 명명한 청년세대의 의식세계를 엿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청년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은이가 말하듯, 이 책에 소개된 청년들의 이야기가 전체 청년의 모습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역시 지은이가 말했듯 청년세대를 사로잡은 압도적인 시대정신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학 박사논문을 다시 쓴 책이라는 한계는 드러난다. 오늘 청년들이 놓여있는 삶의 맥락이 가능한 경제적 요인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소한, 한 칼럼에서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한국자본주의Ⅱ』를 인용해 청년문제를 쓴, 다음과 같은 김병익 정도의 문제의식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 론가 김병익이 문제를 제기한 장하성의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 한국자본주의Ⅱ』
“이렇게 소득 불평등을 촉진한 계기가 외환위기였고 이때부터 가계저축이 줄어들고 기업저축이 크게 늘어난다. 기업은 소득을 노동비용으로 공정분배하기보다 기업유보금으로 축적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 재하청기업 간의 불공정한 거래구조는 임금 격차를 심화시켰다. 노동자는 소속 기업의 대, 중, 소 규모에 따라 심하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그나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로 잘못된 임금구조는 더욱 왜곡되었다. ‘한국 자본주의 형성 경로와 자본축적 과정이 남다를 뿐 아니라’ 단기간의 급성장을 이룬 압축성장의 성급한 발전이 재벌 중심의 경제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은 ‘한국의 자본들이 아직 자본 외적 권력이나 질서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성은 따진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 커진다면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불평등은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은 추상적인 철학논쟁이 아니라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절실하게 제기되어야 할 질문들이다.” 김병익, 「분노의 봄」, 『한겨레』, 2016.03.24.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오늘의 청년문제를 낳은 주범이고, 이를 개선하려는 권력구조의 개편을 꾀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터다. 답답한 일은, 지은이의 분석에 따르면,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청년세대는 객관적 현실을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청년세대가 빠진 깊은 늪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책의 말미에 청년세대가 우리 사회에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길 권한다. 기회는 균등한가? 과정은 공정한가? 결과는 정의로운가? 이 질문만큼 불온한 것이 무에 있으랴! 그럼에도 청년세대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답만 찾으라 강요한 기성세대의 탓이 크다. 오늘의 청년문제는, 그러므로 우리 사회 전반을 혁신하려는 전세대의 노력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대 착취나 세대 논쟁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장정’을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다.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성남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책만 죽어라 읽어 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가 뛰어난 선배들 덕에 읽고 쓰는 법을 터득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 주어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방송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등을 펴냈다.
서평 : 청년, 괴물이 되다
이권우
2016-04-21
청년, 괴물이 되다
“청년세대여, 자신을 탓하지 말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틀에 순응하지 말고 거부해라, 청년세대의 반역이 부재하는 시대는 어둠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에 드리워진 어둠을 거두고 희망을 다시 세울 자는 젊은이들이다.”
▲ 장하성의 『한국자본주의』, 위의 인용문은 같은 시리즈의 2권. ⓒ헤이북스
설핏 보면, 7~80년대 대학가에 나돌았던 불온 문서의 한 구절인 듯하다. 이 글은 작금에, 그것도 경제학자인 장하성이 쓴 책에 나온 한 구절이다. 오늘의 청년문제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는 데 두루 동의한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치고 대학에 들어가나, 그곳에서는 이른바 스펙쌓기에 몰두한다. 그러나 취업의 문은 매우 좁은데다 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하기는 난망한 상황에 몰려있다. 이러다 보니 최근 쏟아져 나오는 청년담론은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담았다. ‘3포세대’라는 말이 이미 철 지난 말이 될 정도다. 몇개를 포기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청년세대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했다면, 그 나라의 미래가 어떨지는 뻔하다. 그럼에도 좀처럼 상황이 개선될 기미기 보이지 않는다.
청년담론의 공통점은 오늘의 문제가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라 분석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청년세대가 이 구조적 모순을 개선하기 보다는, 개인 능력의 극대화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소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이 현상은 청년세대가 현실을 지배하는 담론에 포획당했다는 뜻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오늘의 청년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은, 최대 피해자인 청년세대가 스스로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제기하고, 여론의 힘을 빌여 사회적으로 해소할 능력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아마 우리 역사에서 청년이라는 낱말에 이토록 절망적인 기운이 깃든 적은 없어 보인다.
청년은 차별에 찬성하는가
오찬호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일그러진 청년세대의 초상화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이십대는 늘 시대의 열외적 존재였고, 약간은 당돌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저항했기에 나름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었다.” 당연하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바로 이런 청년 이미지가 일구어냈다. 그런데 지은이는 그 구절에 이어 바로 다음처럼 말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이 한마디로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터다. 지은이는 먼저 오늘의 청년세대의 특징은 무엇인지 소상히 밝힌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통제적 자기계발”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경영학은 조직적응의 차원에서, 심리학은 개인의 자아치료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교육학은 평생학습”이라는 의미에서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며, 이들의 공통점은 성과에 주목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현실의 청년들은 자기계발의 목표가 오로지 취업준비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계발은 “당연히 외국어 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참가, 체력관리, 외모가꾸기(심하면 성형도 불사), 자기소개서 작성연습, 프리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을 가리킬 뿐이다.
▲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청년세대의 자기계발이 드러낸 문제점은 “그 결과가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데도 다른 대안이 없어 그저 ‘계속’ 해나가고만 있다는 데 있다.” 이 점이 바로 사회구조적인 면을 문제삼아 해결하지 않는다는 비판과 맞닿아 있다. 객관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주체의 성실성을 문제삼고 있다는 말이다. 지은이는, 이런 특징이 종국에는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자기만족’에 이른다고 분석한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충격적인 책의 부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다.“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엄격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빈번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청년세대와 심층면접을 통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분석한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청년들은 충격적인 답변을 한다. 만연된 불평등 현상을 대체로 긍정한다.
“즉, 남들보다 시간관리를 더 잘해온 사람이 사회적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더 가치있게 효율적으로 잘 사용한 능력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직급의 차별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별의 근거가 정당하므로, 해고당하거나 비정규직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차별도 정당한 것이다. 이걸 뛰어넘는 요구가 나오면 이십대들은 의아해 한다. 게다가 자기들 생각에는 당연히 정규직이 되어야 할 사람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어떻게 ‘감히 부족한 사람’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지 개탄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자기계발의 논리로 무장한 청년세대의 고유한 특징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이다. 두번째는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패자에 대한 편견의 이면에 실패를 두려워하는 무의식이 자리잡은지라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을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석은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 청년세대의 대학 서열주의 실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그 원인에 대한 해명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지은이는 누구나 예상하듯이 다른 무엇보다 IMF의 추억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 충격은 청년세대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좋은 직장을 얻는 것’ 이외의 꿈들을 당연히 거세”하게 했다. 다음으로는 대학의 기업화이다. 마지막으로는 before/after의 덫이다. 지은이가 보기에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것은 “불안한 현대사회를 사는 ‘같은 이십대’가 성공하는 ‘다른 사례’를 분명히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아직 변신 프로그램의 ‘Before’ 상태일 뿐이기에, 열심히 하다보면 분명 ‘After’ 상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청년은 정말 괴물이 되었나
지은이가 ‘괴물’이라 명명한 청년세대의 의식세계를 엿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청년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은이가 말하듯, 이 책에 소개된 청년들의 이야기가 전체 청년의 모습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역시 지은이가 말했듯 청년세대를 사로잡은 압도적인 시대정신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학 박사논문을 다시 쓴 책이라는 한계는 드러난다. 오늘 청년들이 놓여있는 삶의 맥락이 가능한 경제적 요인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소한, 한 칼럼에서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한국자본주의Ⅱ』를 인용해 청년문제를 쓴, 다음과 같은 김병익 정도의 문제의식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 론가 김병익이 문제를 제기한 장하성의 책
『왜 분노해야 하는가- 한국자본주의Ⅱ』
“이렇게 소득 불평등을 촉진한 계기가 외환위기였고 이때부터 가계저축이 줄어들고 기업저축이 크게 늘어난다. 기업은 소득을 노동비용으로 공정분배하기보다 기업유보금으로 축적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 재하청기업 간의 불공정한 거래구조는 임금 격차를 심화시켰다. 노동자는 소속 기업의 대, 중, 소 규모에 따라 심하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했고 그나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로 잘못된 임금구조는 더욱 왜곡되었다. ‘한국 자본주의 형성 경로와 자본축적 과정이 남다를 뿐 아니라’ 단기간의 급성장을 이룬 압축성장의 성급한 발전이 재벌 중심의 경제적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은 ‘한국의 자본들이 아직 자본 외적 권력이나 질서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성은 따진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불평등이 더 커진다면 성장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불평등은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은 추상적인 철학논쟁이 아니라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절실하게 제기되어야 할 질문들이다.” 김병익, 「분노의 봄」, 『한겨레』, 2016.03.24.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오늘의 청년문제를 낳은 주범이고, 이를 개선하려는 권력구조의 개편을 꾀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터다. 답답한 일은, 지은이의 분석에 따르면,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청년세대는 객관적 현실을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청년세대가 빠진 깊은 늪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책의 말미에 청년세대가 우리 사회에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길 권한다. 기회는 균등한가? 과정은 공정한가? 결과는 정의로운가? 이 질문만큼 불온한 것이 무에 있으랴! 그럼에도 청년세대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답만 찾으라 강요한 기성세대의 탓이 크다. 오늘의 청년문제는, 그러므로 우리 사회 전반을 혁신하려는 전세대의 노력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대 착취나 세대 논쟁을 넘어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장정’을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다.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성남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책만 죽어라 읽어 보려고 경희대 국문과에 들어가 뛰어난 선배들 덕에 읽고 쓰는 법을 터득했다.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다 서평전문잡지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정리했다. 본디 직함은 남이 붙여 주어야 하거늘,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글 쓰고 방송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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