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는 스키니 팬츠 일색이었다. 젊은 남녀들은 마치 교복이라도 된 듯 너도나도 허벅지부터 종아리를 타이트하게 감싸는 실루엣의 팬츠를 입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품이 남는 헐렁한 팬츠를 입고 다니는 건, 이 ‘거대한 유행의 파도’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움츠리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와이드 벨보텀진과 스타디움 점퍼의 조합을 독특하고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Sartorialist (thesartorialist.com)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나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 타이트한 라인의 팬츠, 특히 일명 스키니 진에 대한 젊은 대중들의 사랑은 꽤나 충성도 있고 견고한 것이어서, 근 20년 가까이 어떤 팬츠도 그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록 스피릿으로 충만한 젊은이들이나 입을 듯한 쫄바지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쫄바지를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소위 ‘니뽄 스타일’로 대변되며 대중에게 그것이 알려졌던 2000년대 초반에도 사실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다리가 짧고 굵은 한국인의 체형적 단점을 극대화해 부각시키는 이 몹쓸 실루엣의 진의 유행에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곧 사그라들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고, 그래서 스키니 팬츠의 유행이 이토록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스키니 팬츠의 유행은 그런 패션 종사자들의 비관적 예측을 비웃 듯 해를 더해 갈수록 대중화되었고 급진적으로 레깅스화 되었으며, 급기야는 패션의 베이직 아이템이 되었다.
혹시, 웹툰 <패션왕>을 기억하실는지? 이 웹툰의 등장인물들은 허벅지와 종아리 품이 넉넉한 팬츠를 촌스러움의 극치이자 세련되지 못한 애티튜드의 반증 혹은, 패션에 대한 불경으로 여기는 멋에 죽고사는 젊은 청춘들이다. 이들의 영웅이 바로 ‘패션왕’이다. 교복 하의의 품을 줄이다 못해 하체에 피가 통하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패션에로의 ‘자기희생’을 마다 않는 주인공. 그리고 일명 ‘패션왕’이라는 극존칭을 부여하며 우러러보는 아이들. 이들의 좌충우돌을 그린 웹툰은 엄청나게 히트하며, 2012년에 급기야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스키니 팬츠의 유행은 단순히 희화화된 에피소드를 넘어 젊은 대중을 대변하는 하나의 중요한 경향이 되었다.
나팔바지에 담긴 미국 청년들의 저항 정신
그런데, 드디어 사이즈 압박에 혈류가 막혀 고생하던 청춘들의 발목을 해방시켜줄 아이템이 등장, 스키니 팬츠의 유행을 주춤하게 할 전망이다. 2016년의 국내 패션 계에는, ‘메가 트렌드 복고’ 경향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게 될 전망이다. 이에 힘입어, 옛 것으로의 향수를 물씬 풍기는, 부츠컷, 벨보텀, 와이드 팬츠 등 6~70년대와 90년대 무드를 보여주는 강력한 아이템들이 등장했다. 어려울 것 없다. 부츠컷, 벨보텀, 와이드 팬츠란 쉽게 말하자면 나팔바지(밑단이 넓은 바지는 ‘플레어드 보텀(Flared bottom)’이라 통칭한다. 이중 밑단 형태에 따라, 종(bell) 모양인 팬츠를 ‘벨 보텀(Bell bottom)’, 그 중에서 부츠가 들어갈 정도의 밑단 폭인 실루엣을 부츠 컷(boots cut)이라 한다)와 통바지다.
1960년대 말 냉전시대의 힘겨루기와 이념이란 허울을 쓴 강대국 간의 권력다툼으로 젊은 미국의 청년들과 베트남의 평범한 양민들의 피로 얼룩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를 종말로 몰아가는 어른들에게 상처 입은 젊은이들이 택했던 것은 바로 반전운동과 자유였다. 6,70년대 반전과 평화를 모토로 근본으로 돌아가자던 청년들은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듯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입었고 속옷을 거부했으며, 데님 소재로 된 나팔바지를 선호했다. ‘히피 스타일(Hippie style)’이라 불렸던 이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을 상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팔파지와 청바지는 7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이는, 젊은이들이 갑갑한 현실을 피해 기성세대의 인습을 비꼬며 희화화할 수 있는 반항의 장치였다. 당시 패션은 일종의 반항 기제였던 것이다. 누가 멋지거나 멋지지 않은지,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도 물론 중요했지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유행하던 벨보텀과 와이드 팬츠는 1990년대에 이르러, 좀더 정갈한 라인으로 변화한 부츠컷과 통바지가 되었다. 사실 그 시대를 회상해 보자면 당시 패션계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던 국내 진 브랜드의 청바지의 경우, ‘패션 좀 한다’는 아이들이 한 벌씩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성배와도 같은 것이었다. 80년대 말 국내에 갓 들어온 미국 브랜드의 홍수 속에서 리바이스 진(Levis jean)의 로고 속, 마차를 끄는 말이 몇 마리인지 연연했던 아이들은, 백화점에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Marithe Francois Girbaud)’를 사는 대신 남대문에서 산 청바지를 ‘저버’ 입는 것으로 소유에의 욕망을 대리하며 서글피 웃어야 했다.
유행의 반복, 유행의 진화
▲ 자유로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70년대 젊은이들의 모습
ⓒEvening Standard/ Hulton Archive (gettyimages.fr)
6,70년대의 청바지와 나팔바지가 저항을 상징하는 ‘운동(movement)으로서의 패션’이었다면, 90년대의 패션은 넘쳐나는 자유와 자본의 풍요 속에서, 입는 이들의 욕망을 노출시키는 중요한 장치였다. 무릎부터 아래로 밑단이 퍼지는 자연스런 ‘다잉’의 진과 쇄골과 가슴선이 다 드러나는 하얀 티셔츠를 매칭한 고소영을 내세운 브랜드의 광고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한 마디로 가수 변진섭이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그녀”라 노래하던 「희망사항」 속 그녀의 현신, 바로 그것이었다. 바닥에 닿을 듯한 긴 기장의 밑단 사이로 하이힐의 앞 코만 살짝 보여주며 도도하게 모델이 서 있는 광고는 당시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당시 압구정동에서는 바지로 바닥을 쓸고 다니지 않으면 잘나가는 언니 축에 끼지도 못했을 정도여서 멋 좀 부린다는 언니들의 바지 밑단은 걸을 때마다 뒷굽에 찢겨져 남아날 수 없었고, 그 찢겨긴 청바지 밑단은 유행을 아는 멋쟁이들의 훈장이었다. 그렇다. 그 바지다. 지금 마흔이 훌쩍 넘어 장동건과 아이 낳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고소영 언니가 20대에 입어 주셨던 그 바지가 다시 오는 것이다. 그 파도는 젊은이들의 스키니 팬츠에 대한 15년간의 충성을 아슬하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이다.
이럴 때 마다 나는 가슴을 친다. 유행은 이렇듯 매몰차게 돌고 돌아 패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얼마전까지 잘 모셔 놓았다 버린 나팔바지 하나가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아, 그 때 그 그 바지를 버리면 안 됐는데, 그 코트를 그냥 둘 걸, 그때 내가 왜 그 재킷을 아는 언니에게 줘 버렸을까.’ (고작 해봐야 20년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가끔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똑같은 스타일이 유행할 때가 있다.
하지만 다행이다. 이번 시즌, 유행하는 팬츠들은 기장이 짧아져서, 발목을 보여주는 짧은 기장감이 강세이니 말이다. 20년 동안 고이 가지고 있었던 나팔바지나 통바지가 있었다면 아랫단을 뭉텅 잘라야 할 거고, 그게 아니라면 또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옷을 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시라도 버리지 않고 놔 두었을 벨보텀을 찾는 것일까? 새로운 나팔바지를 구매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때 왜 그 옷을 버렸을까 더는 가슴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지금 유행하는 이 옷들을, 최소 20년 간 고이 모셔놓을 장소를 확 보하는 것이다. 어디에 넣어놓아야 20년을 견딜지, 당장이라도 이 좁은 장롱을 원망하며 넓은 집으로 이사가서 20년 용 장롱을 따로 제작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나팔바지의 귀환
▲ 락 시크(ROCK CHICKS)와 70년대식 스타일
ⓒDavid Redfern/Redferns (gettyimages.fr)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20년 동안 옷을 보관할 장소를 확보한 뒤, 옷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미래가 아니라, 그 시절의 일도 오늘처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기억의 장소를 확보하는 것일 테다. 패션이 계속 바뀌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러하다. 40여 년 전의 소극적 일탈의 표상이었던 나팔바지가, 90년대 젊은이들의 욕망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던 나팔바지를 지나, 이제 다시금 우리에게 돌아온다. 나팔바지는 또 어떤 우리의 갈망을 표출하게 될까.
제일모직 셀렉샵에서 머천다이저로, GSSHOP 해외 브랜드 바이어로 일했다. , , <네이버 TV 캐스트> 등의 매체를 통해 패션 분야 전문 컨설팅을 하거나 방송 패널로 참여한 바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세상의 모든 옷] 나팔바지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세상의 모든 옷] 나팔바지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
이수정
2016-03-03
나팔바지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는 스키니 팬츠 일색이었다. 젊은 남녀들은 마치 교복이라도 된 듯 너도나도 허벅지부터 종아리를 타이트하게 감싸는 실루엣의 팬츠를 입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품이 남는 헐렁한 팬츠를 입고 다니는 건, 이 ‘거대한 유행의 파도’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움츠리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와이드 벨보텀진과 스타디움 점퍼의 조합을 독특하고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Sartorialist (thesartorialist.com)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나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유행한 타이트한 라인의 팬츠, 특히 일명 스키니 진에 대한 젊은 대중들의 사랑은 꽤나 충성도 있고 견고한 것이어서, 근 20년 가까이 어떤 팬츠도 그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록 스피릿으로 충만한 젊은이들이나 입을 듯한 쫄바지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쫄바지를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소위 ‘니뽄 스타일’로 대변되며 대중에게 그것이 알려졌던 2000년대 초반에도 사실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다리가 짧고 굵은 한국인의 체형적 단점을 극대화해 부각시키는 이 몹쓸 실루엣의 진의 유행에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곧 사그라들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고, 그래서 스키니 팬츠의 유행이 이토록 오래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스키니 팬츠의 유행은 그런 패션 종사자들의 비관적 예측을 비웃 듯 해를 더해 갈수록 대중화되었고 급진적으로 레깅스화 되었으며, 급기야는 패션의 베이직 아이템이 되었다.
혹시, 웹툰 <패션왕>을 기억하실는지? 이 웹툰의 등장인물들은 허벅지와 종아리 품이 넉넉한 팬츠를 촌스러움의 극치이자 세련되지 못한 애티튜드의 반증 혹은, 패션에 대한 불경으로 여기는 멋에 죽고사는 젊은 청춘들이다. 이들의 영웅이 바로 ‘패션왕’이다. 교복 하의의 품을 줄이다 못해 하체에 피가 통하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패션에로의 ‘자기희생’을 마다 않는 주인공. 그리고 일명 ‘패션왕’이라는 극존칭을 부여하며 우러러보는 아이들. 이들의 좌충우돌을 그린 웹툰은 엄청나게 히트하며, 2012년에 급기야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스키니 팬츠의 유행은 단순히 희화화된 에피소드를 넘어 젊은 대중을 대변하는 하나의 중요한 경향이 되었다.
나팔바지에 담긴 미국 청년들의 저항 정신
그런데, 드디어 사이즈 압박에 혈류가 막혀 고생하던 청춘들의 발목을 해방시켜줄 아이템이 등장, 스키니 팬츠의 유행을 주춤하게 할 전망이다. 2016년의 국내 패션 계에는, ‘메가 트렌드 복고’ 경향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게 될 전망이다. 이에 힘입어, 옛 것으로의 향수를 물씬 풍기는, 부츠컷, 벨보텀, 와이드 팬츠 등 6~70년대와 90년대 무드를 보여주는 강력한 아이템들이 등장했다. 어려울 것 없다. 부츠컷, 벨보텀, 와이드 팬츠란 쉽게 말하자면 나팔바지(밑단이 넓은 바지는 ‘플레어드 보텀(Flared bottom)’이라 통칭한다. 이중 밑단 형태에 따라, 종(bell) 모양인 팬츠를 ‘벨 보텀(Bell bottom)’, 그 중에서 부츠가 들어갈 정도의 밑단 폭인 실루엣을 부츠 컷(boots cut)이라 한다)와 통바지다.
▲ 70년대 벨 보텀 진은 저항의 상징이었다.
ⓒRoger Jackson/ Hulton Archive (gettyimages.fr)
1960년대 말 냉전시대의 힘겨루기와 이념이란 허울을 쓴 강대국 간의 권력다툼으로 젊은 미국의 청년들과 베트남의 평범한 양민들의 피로 얼룩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를 종말로 몰아가는 어른들에게 상처 입은 젊은이들이 택했던 것은 바로 반전운동과 자유였다. 6,70년대 반전과 평화를 모토로 근본으로 돌아가자던 청년들은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듯 화려한 패턴의 옷을 입었고 속옷을 거부했으며, 데님 소재로 된 나팔바지를 선호했다. ‘히피 스타일(Hippie style)’이라 불렸던 이들의 옷차림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을 상징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팔파지와 청바지는 7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이는, 젊은이들이 갑갑한 현실을 피해 기성세대의 인습을 비꼬며 희화화할 수 있는 반항의 장치였다. 당시 패션은 일종의 반항 기제였던 것이다. 누가 멋지거나 멋지지 않은지,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도 물론 중요했지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유행하던 벨보텀과 와이드 팬츠는 1990년대에 이르러, 좀더 정갈한 라인으로 변화한 부츠컷과 통바지가 되었다. 사실 그 시대를 회상해 보자면 당시 패션계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던 국내 진 브랜드의 청바지의 경우, ‘패션 좀 한다’는 아이들이 한 벌씩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성배와도 같은 것이었다. 80년대 말 국내에 갓 들어온 미국 브랜드의 홍수 속에서 리바이스 진(Levis jean)의 로고 속, 마차를 끄는 말이 몇 마리인지 연연했던 아이들은, 백화점에서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Marithe Francois Girbaud)’를 사는 대신 남대문에서 산 청바지를 ‘저버’ 입는 것으로 소유에의 욕망을 대리하며 서글피 웃어야 했다.
유행의 반복, 유행의 진화
▲ 자유로움을 한껏 뽐내고 있는 70년대 젊은이들의 모습
ⓒEvening Standard/ Hulton Archive (gettyimages.fr)
6,70년대의 청바지와 나팔바지가 저항을 상징하는 ‘운동(movement)으로서의 패션’이었다면, 90년대의 패션은 넘쳐나는 자유와 자본의 풍요 속에서, 입는 이들의 욕망을 노출시키는 중요한 장치였다. 무릎부터 아래로 밑단이 퍼지는 자연스런 ‘다잉’의 진과 쇄골과 가슴선이 다 드러나는 하얀 티셔츠를 매칭한 고소영을 내세운 브랜드의 광고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한 마디로 가수 변진섭이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그녀”라 노래하던 「희망사항」 속 그녀의 현신, 바로 그것이었다. 바닥에 닿을 듯한 긴 기장의 밑단 사이로 하이힐의 앞 코만 살짝 보여주며 도도하게 모델이 서 있는 광고는 당시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당시 압구정동에서는 바지로 바닥을 쓸고 다니지 않으면 잘나가는 언니 축에 끼지도 못했을 정도여서 멋 좀 부린다는 언니들의 바지 밑단은 걸을 때마다 뒷굽에 찢겨져 남아날 수 없었고, 그 찢겨긴 청바지 밑단은 유행을 아는 멋쟁이들의 훈장이었다. 그렇다. 그 바지다. 지금 마흔이 훌쩍 넘어 장동건과 아이 낳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고소영 언니가 20대에 입어 주셨던 그 바지가 다시 오는 것이다. 그 파도는 젊은이들의 스키니 팬츠에 대한 15년간의 충성을 아슬하게 만들 정도로 위협적이다.
이럴 때 마다 나는 가슴을 친다. 유행은 이렇듯 매몰차게 돌고 돌아 패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얼마전까지 잘 모셔 놓았다 버린 나팔바지 하나가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 ‘아, 그 때 그 그 바지를 버리면 안 됐는데, 그 코트를 그냥 둘 걸, 그때 내가 왜 그 재킷을 아는 언니에게 줘 버렸을까.’ (고작 해봐야 20년만 기다리면 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가끔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똑같은 스타일이 유행할 때가 있다.
하지만 다행이다. 이번 시즌, 유행하는 팬츠들은 기장이 짧아져서, 발목을 보여주는 짧은 기장감이 강세이니 말이다. 20년 동안 고이 가지고 있었던 나팔바지나 통바지가 있었다면 아랫단을 뭉텅 잘라야 할 거고, 그게 아니라면 또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옷을 사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시라도 버리지 않고 놔 두었을 벨보텀을 찾는 것일까? 새로운 나팔바지를 구매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때 왜 그 옷을 버렸을까 더는 가슴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지금 유행하는 이 옷들을, 최소 20년 간 고이 모셔놓을 장소를 확 보하는 것이다. 어디에 넣어놓아야 20년을 견딜지, 당장이라도 이 좁은 장롱을 원망하며 넓은 집으로 이사가서 20년 용 장롱을 따로 제작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나팔바지의 귀환
▲ 락 시크(ROCK CHICKS)와 70년대식 스타일
ⓒDavid Redfern/Redferns (gettyimages.fr)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20년 동안 옷을 보관할 장소를 확보한 뒤, 옷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미래가 아니라, 그 시절의 일도 오늘처럼 기억하고 잊지 않는 기억의 장소를 확보하는 것일 테다. 패션이 계속 바뀌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러하다. 40여 년 전의 소극적 일탈의 표상이었던 나팔바지가, 90년대 젊은이들의 욕망을 표출하는 수단이었던 나팔바지를 지나, 이제 다시금 우리에게 돌아온다. 나팔바지는 또 어떤 우리의 갈망을 표출하게 될까.
제일모직 셀렉샵에서 머천다이저로, GSSHOP 해외 브랜드 바이어로 일했다., , <네이버 TV 캐스트> 등의 매체를 통해 패션 분야 전문 컨설팅을 하거나 방송 패널로 참여한 바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세상의 모든 옷] 나팔바지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드론 인문학]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미래
김학진
[우리 엄마밥] 엄마의 맛
박찬일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