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세계 과학기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은 주제 중 하나는 CRISPR, 크리스퍼라고 읽고 ‘유전자 가위’로 번역되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다. 과학잡지 『Nature』와 『Science』에서는 크리스퍼를 파리 기후 협약, 명왕성 탐사 등과 함께 2015년 세계 과학계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했다. 특히 『Science』에서는 크리스퍼를 2015년의 ‘돌파구’로 선정했다.
▲ 고도로 발전된 디스토피아의 등장을 예고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Warner Bros., 1982.
생물학자들은 크리스퍼가 PCR에 버금간다고 평가한다. 유전자 분석 기술인 PCR은 유전병의 진단이나 범죄수사에 사용되는 유전자 감식과 같은 유전자의 분리 확인이 필요한 분야들에서, 다시 말하면 실질적으로 현대 생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생물학사는 PCR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할 정도이다. PCR, 트랜지스터, 레이저 등 ‘돌파구’가 된 기술들이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퍼 역시 관련 논문과 특허의 수, 연구비, 관련 시장 규모 면에서 매우 빠르게, 지수함수보다도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다른 ‘돌파구’ 기술의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퍼의 개발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연구자들도 멀지 않은 장래에 노벨과학상을 수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유전 물질인 DNA 분자에는 구성 요소가 서로 다른 4가지 종류가 있다.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염색체는 DNA 분자들이 결합된 긴 사슬이 꼬여있는 거대분자다. 인간 세포의 세포핵에는 23쌍의 염색체가 있으며, 이 염색체들에는 모두 30억 개의 DNA 분자가 있다. 30억 개 분자의 결합 순서 자체가 유전 정보인데, 이는 2003년 일단락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 밝혀졌다. 30억 개 분자 중 2% 미만이 인체 구조와 기능에 필수적인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주 긴 DNA 사슬의 중간 중간에 단백질을 만드는 비교적 짧은 DNA 사슬들이 존재하는데, 이 짧은 DNA 사슬들이 유전자이다. 유전적 결함은 염색체의 수나 구조 혹은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 사슬의 결합 순서가 정상과 다를 때 생겨난다.
크리스퍼 vs GMO
크리스퍼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라는 점에서 유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 GMO와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GMO는 특정 형질을 가진 유전자를 다른 생물종의 염색체에 끼워 넣어 만들어진다. GMO는 진화라는 자연의 실험 과정을 통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 단백질을 만드는 인간의 유전자는 2~2만5,000개로 규명되었지만, 인체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10만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단백질들이 존재한다. 유전자 하나가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이런 결과는 유전자에 관한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GMO의 잠재적 위험성을 시사한다. GMO의 경우 유전자는 염색체에 무작위로 삽입되기 때문에 유전자가 삽입되는 염색체 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GMO가 그 형질을 나타낼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염색체에 있는 모든 유전자가 발현하여 형질을 나타내지는 않으며, 유전자가 발현하는 메커니즘들은 아직 정확하게 이해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크리스퍼는 유전자를 외부에서 끼워 넣는 GMO와 달리,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를 원하는 순서로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 가위’라고 부른다. 모기가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되는 크리스퍼는 3세대 유전자 편집 기술이다. 크리스퍼는 1, 2세대 편집 기술에 비해 간단하며, 그 비용이 매우 저렴하며, 효율(정확도) 역시 혁신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유전자 편집에 소요되는 시간도 매우 짧아졌다. 크리스퍼가 적용된 생명체는 외부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GMO로 분류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도 크리스퍼에 의한 유전자 변형을 구분, 추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크리스퍼를 통해 만들어진 생명체는 기존의 GMO보다 훨씬 빠르게 생태계에 퍼져나갈 수 있는 유전적인 특징을 갖는다.
크리스퍼가 가져올 미래사회의 변화
2015년에 크리스퍼가 특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세계 최초로 중국 과학자들이 크리스퍼를 인간 배아에 적용한 사례를 보고했기 때문이다. 인간 배아에 관한 연구에 대한 규제는 나라마다 다른데, 영국에서 인간 배아에 대해 크리스퍼를 적용하는 연구가 2016년에는 허가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2015년 보고된 중국의 인간 배아에 관한 연구는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는 배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2015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크리스퍼에 관한 국제 학술회의에서는 크리스퍼를 인간에 적용하는 연구는 그 결과가 유전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로만 제한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아직은 기술적으로나 윤리적인 면에서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는 인간 배아에 대한 크리스퍼의 적용은 제쳐놓더라도, 크리스퍼는 머지않은 장래에 인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현대 문명과 고립되어 수렵을 삶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부족을 만나보면 지배층은 장신구 뿐만 아니라 신체 조건 면에서도 피지배층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둘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 지배층의 용모는 실질적인 유용성을 가진 신체 조건, 예컨대 수렵에 유리한 신체 조건은 아니다. 물론 한국 사회 일부에는 ‘미스코리아’처럼 우월한(?) 용모가 사회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있어, 그것이 우월한 조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소위 ‘수저론’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사회의 지배층은 신체 자체가 아닌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도구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데, 도구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 중 하나이다. 물론 운동 선수들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 능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지만, 대부분의 지배층은 ‘금수저’로 상징되는 자본처럼, 고도로 발달된 도구의 소유에 따라 정해진다. 생물의 생존 방식들을 비교해볼 때, 인간은 체외기관, 즉 소유권이 달라질 수도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생존하며, 다른 생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소유인 팔, 다리, 날개 같은 체내기관을 사용하여 생존한다는 표현은 꽤나 적절하다. 여러 가지 사회적 도구들에 대한 소유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분 유통되는지는 매우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슈퍼 인간의 등장-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크리스퍼는 삶의 방식이 도구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개인의 유전 정보가 사회적 관계, 예컨대 취업, 결혼, 보험 등에서 차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크리스퍼는 유전 정보 자체를 수정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런 연구가 잘 진행된다면, 유방암 유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가슴 절제 수술 대신 크리스퍼 시술을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퍼 덕분에 유전 정보의 가치는 훨씬 더 높아지고, 그와 관련되어 고부가의 의료산업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 이런 신산업은 더 큰 사회적 차별, 더 심각한 양극화의 원인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임신을 통해 태어난
열성의 인류와, 우성
형질로만 배합된 새로운 인류 사이의
갈등을 그렸던 영화 『가타카』
ⓒcolombia picture, 1997
크리스퍼는 한편, 인간 수명의 연장을 위한 기술이 될 수 있다. 근년에 ‘알파 인간’이라고 부르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신인류가 개선된 영양, 꾸준한 운동, 생활습관의 변화 등을 통해 탄생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크리스퍼는 이들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신인류를 위한 처방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기본적으로 유전자, 예컨대 염색체의 끝에 붙어있는 텔로미어(telomere)라는 DNA 사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의 욕망에 비추어 볼 때 수명과 관련된 유전자들은 머지않아 정확하게 규명될 것이다.
여기에 크리스퍼가 적용되면, 알파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건강과 수명을 가진 ‘슈퍼 인간’의 등장이 가능하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슈퍼 인간은 단지 수명만 긴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지배력도 매우 클 것이다. 슈퍼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SF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고도화된 동시에 극도로 경직된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로봇과 같은 인간들이 필요하며 그런 인간들이 크리스퍼를 통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의 지배층은 크리스퍼를 인간 배아에 적용하여 원하는 형의 인간을 생산(?)하려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는 획일성에 대한 저항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로 분류되지만,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인간의 감춰진 욕망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욕망에 대한 절제인데, 이는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김학진은 화학 중에서 그 학문적인 특성, 물질과 현상의 정성적인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은 분야인 물리화학을 전공하였으며, 1992년부터 충남대학교 화학과에 재직 중이다. 화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화학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중고등학생들의 교육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과학에 관한 글을 쓰는 데도 관심이 있지만 아직은 쓰기보다 읽기를 많이 주로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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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 인문학]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미래
김학진
2016-02-25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미래
2015년 세계 과학기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은 주제 중 하나는 CRISPR, 크리스퍼라고 읽고 ‘유전자 가위’로 번역되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다. 과학잡지 『Nature』와 『Science』에서는 크리스퍼를 파리 기후 협약, 명왕성 탐사 등과 함께 2015년 세계 과학계 10대 뉴스의 하나로 선정했다. 특히 『Science』에서는 크리스퍼를 2015년의 ‘돌파구’로 선정했다.
▲ 고도로 발전된 디스토피아의 등장을 예고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 ⓒWarner Bros., 1982.
생물학자들은 크리스퍼가 PCR에 버금간다고 평가한다. 유전자 분석 기술인 PCR은 유전병의 진단이나 범죄수사에 사용되는 유전자 감식과 같은 유전자의 분리 확인이 필요한 분야들에서, 다시 말하면 실질적으로 현대 생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생물학사는 PCR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할 정도이다. PCR, 트랜지스터, 레이저 등 ‘돌파구’가 된 기술들이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퍼 역시 관련 논문과 특허의 수, 연구비, 관련 시장 규모 면에서 매우 빠르게, 지수함수보다도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다른 ‘돌파구’ 기술의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퍼의 개발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연구자들도 멀지 않은 장래에 노벨과학상을 수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유전 물질인 DNA 분자에는 구성 요소가 서로 다른 4가지 종류가 있다.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염색체는 DNA 분자들이 결합된 긴 사슬이 꼬여있는 거대분자다. 인간 세포의 세포핵에는 23쌍의 염색체가 있으며, 이 염색체들에는 모두 30억 개의 DNA 분자가 있다. 30억 개 분자의 결합 순서 자체가 유전 정보인데, 이는 2003년 일단락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서 밝혀졌다. 30억 개 분자 중 2% 미만이 인체 구조와 기능에 필수적인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주 긴 DNA 사슬의 중간 중간에 단백질을 만드는 비교적 짧은 DNA 사슬들이 존재하는데, 이 짧은 DNA 사슬들이 유전자이다. 유전적 결함은 염색체의 수나 구조 혹은 유전자를 구성하는 DNA 사슬의 결합 순서가 정상과 다를 때 생겨난다.
크리스퍼 vs GMO
크리스퍼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라는 점에서 유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 GMO와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많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GMO는 특정 형질을 가진 유전자를 다른 생물종의 염색체에 끼워 넣어 만들어진다. GMO는 진화라는 자연의 실험 과정을 통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 단백질을 만드는 인간의 유전자는 2~2만5,000개로 규명되었지만, 인체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10만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단백질들이 존재한다. 유전자 하나가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만드는 데 관여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이런 결과는 유전자에 관한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GMO의 잠재적 위험성을 시사한다. GMO의 경우 유전자는 염색체에 무작위로 삽입되기 때문에 유전자가 삽입되는 염색체 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GMO가 그 형질을 나타낼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염색체에 있는 모든 유전자가 발현하여 형질을 나타내지는 않으며, 유전자가 발현하는 메커니즘들은 아직 정확하게 이해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크리스퍼는 유전자를 외부에서 끼워 넣는 GMO와 달리,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를 원하는 순서로 ‘편집’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 가위’라고 부른다. 모기가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되는 크리스퍼는 3세대 유전자 편집 기술이다. 크리스퍼는 1, 2세대 편집 기술에 비해 간단하며, 그 비용이 매우 저렴하며, 효율(정확도) 역시 혁신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유전자 편집에 소요되는 시간도 매우 짧아졌다. 크리스퍼가 적용된 생명체는 외부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GMO로 분류되지 않는다. 기술적으로도 크리스퍼에 의한 유전자 변형을 구분, 추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크리스퍼를 통해 만들어진 생명체는 기존의 GMO보다 훨씬 빠르게 생태계에 퍼져나갈 수 있는 유전적인 특징을 갖는다.
크리스퍼가 가져올 미래사회의 변화
2015년에 크리스퍼가 특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세계 최초로 중국 과학자들이 크리스퍼를 인간 배아에 적용한 사례를 보고했기 때문이다. 인간 배아에 관한 연구에 대한 규제는 나라마다 다른데, 영국에서 인간 배아에 대해 크리스퍼를 적용하는 연구가 2016년에는 허가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2015년 보고된 중국의 인간 배아에 관한 연구는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는 배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2015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크리스퍼에 관한 국제 학술회의에서는 크리스퍼를 인간에 적용하는 연구는 그 결과가 유전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경우로만 제한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아직은 기술적으로나 윤리적인 면에서 넘기 어려운 장벽이 있는 인간 배아에 대한 크리스퍼의 적용은 제쳐놓더라도, 크리스퍼는 머지않은 장래에 인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현대 문명과 고립되어 수렵을 삶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부족을 만나보면 지배층은 장신구 뿐만 아니라 신체 조건 면에서도 피지배층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둘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 지배층의 용모는 실질적인 유용성을 가진 신체 조건, 예컨대 수렵에 유리한 신체 조건은 아니다. 물론 한국 사회 일부에는 ‘미스코리아’처럼 우월한(?) 용모가 사회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있어, 그것이 우월한 조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소위 ‘수저론’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사회의 지배층은 신체 자체가 아닌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는 도구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을 갖는데, 도구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해 주는 중요한 차이 중 하나이다. 물론 운동 선수들처럼 현대 사회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신체적 능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지만, 대부분의 지배층은 ‘금수저’로 상징되는 자본처럼, 고도로 발달된 도구의 소유에 따라 정해진다. 생물의 생존 방식들을 비교해볼 때, 인간은 체외기관, 즉 소유권이 달라질 수도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생존하며, 다른 생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만의 소유인 팔, 다리, 날개 같은 체내기관을 사용하여 생존한다는 표현은 꽤나 적절하다. 여러 가지 사회적 도구들에 대한 소유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분 유통되는지는 매우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슈퍼 인간의 등장-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크리스퍼는 삶의 방식이 도구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개인의 유전 정보가 사회적 관계, 예컨대 취업, 결혼, 보험 등에서 차별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크리스퍼는 유전 정보 자체를 수정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런 연구가 잘 진행된다면, 유방암 유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가슴 절제 수술 대신 크리스퍼 시술을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퍼 덕분에 유전 정보의 가치는 훨씬 더 높아지고, 그와 관련되어 고부가의 의료산업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 이런 신산업은 더 큰 사회적 차별, 더 심각한 양극화의 원인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임신을 통해 태어난 열성의 인류와, 우성
형질로만 배합된 새로운 인류 사이의
갈등을 그렸던 영화 『가타카』
ⓒcolombia picture, 1997
크리스퍼는 한편, 인간 수명의 연장을 위한 기술이 될 수 있다. 근년에 ‘알파 인간’이라고 부르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신인류가 개선된 영양, 꾸준한 운동, 생활습관의 변화 등을 통해 탄생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크리스퍼는 이들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신인류를 위한 처방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기본적으로 유전자, 예컨대 염색체의 끝에 붙어있는 텔로미어(telomere)라는 DNA 사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의 욕망에 비추어 볼 때 수명과 관련된 유전자들은 머지않아 정확하게 규명될 것이다.
여기에 크리스퍼가 적용되면, 알파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건강과 수명을 가진 ‘슈퍼 인간’의 등장이 가능하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슈퍼 인간은 단지 수명만 긴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지배력도 매우 클 것이다. 슈퍼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SF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우 고도화된 동시에 극도로 경직된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로봇과 같은 인간들이 필요하며 그런 인간들이 크리스퍼를 통해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의 지배층은 크리스퍼를 인간 배아에 적용하여 원하는 형의 인간을 생산(?)하려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사회는 획일성에 대한 저항성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로 분류되지만,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인간의 감춰진 욕망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욕망에 대한 절제인데, 이는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김학진은 화학 중에서 그 학문적인 특성, 물질과 현상의 정성적인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은 분야인 물리화학을 전공하였으며, 1992년부터 충남대학교 화학과에 재직 중이다. 화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화학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중고등학생들의 교육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과학에 관한 글을 쓰는 데도 관심이 있지만 아직은 쓰기보다 읽기를 많이 주로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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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드론 인문학]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미래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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