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인문360인문360

인문360

인문360˚

예술보다 긴 삶도 흐른다 : 3권의 책을 읽고 쓴 독후감

2024-02-20

예술보다 긴 삶도 흐른다

 

이 동 주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Mary du Pré)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녀는 에드워드 엘가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영국의 첼로 연주자였다. 길게 늘어뜨린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나부끼면서 여러 명의 연주자가 내는 소리보다 더 풍성한 음색으로 첼로를 연주했다. 영국이 사랑한 음악가, 눈부신 재능을 지닌 골든 걸로 불린 그녀는 28살에 다발성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1973년을 끝으로 지난 십여 년의 연주 생활을 접고 매 순간 조금씩 몸 안을 파고드는 병을 견디며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는 생활로 들어간다. 모든 이의 관심을 받던 사람이 모든 이들의 관심에서 사라지는 양극단의 시간을 살게 된다면 무엇을 느끼게 될까?

 

  동네 책방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회사 직원들을 위한 북큐레이션(bookcuration) 활동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던 차에 송은혜 선생님의 일요일의 음악실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며칠을 열심히 도서관을 다니면서 인터넷을 검색한 결과였다. 책 속에는 다양한 음악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작가가 일 년을 넘게 블로그에 격주로 올린 음악에 관한 글을 모아서 출간한 내용이었다. 52곡의 다른 장르의 음악이, 여러 나라의 작곡가가 만들고 세계의 음악가가 연주한 음반으로 소개되었다. 스마트 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링크와 바로 연결되어 소개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글쓴이가 안내하는 음악의 세계였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피아노와 오르간, 하프시코드를 공부한 건반악기 연주자가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가 좋았다. 이웃집 음악 선생님이 얘기하듯 편안하게 들려왔다. 매일 한 편씩 버스를 타면서 출근할 때 글을 읽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러면서 눈에 들어온 연주자가 자클린이다.

 

  그녀의 음악은 내 귀를 통해 흘러 들어와서 온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가득 채워 버린 뒤 소리의 여운을 남긴 채 사라졌다. ‘, 첼로로 이렇게도 연주할 수 있구나!’ 전혀 다른 형태의 연주, 마치 음악을 통한 첼로와 영혼의 교감이었다. 그녀는 첼로와 대화하면서 자신을 두려움 없이 온전히 음악에 담았다. 첼로는 그 모든 울림을 남김없이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녀의 음악으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하였으리라. 여름날에 내리쬐는 태양처럼 빛나는 재능을 마음껏 펼치던 그녀는 자신을 닮은 또 다른 천부적인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한다. 두 사람의 첼로와 피아노의 결합은 수많은 협연과 현악 중주곡의 음반으로 녹음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자클린다니엘의 아름다운 화음은 계속되는 피로감을 호소하던 그녀가 나을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리면서 서서히 달라진다.

 

  다발성경화증(MS: Multiple Sclerosis). 몸의 구석구석이 천천히 마비되는, 원인이 뚜렷하지 않은, 완치를 위한 치료법이 없는 병이다. 첼로를 연주하는 팔과 손가락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그녀는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연주회를 취소한다. 미국에서 진단받은 이 병은 중추신경계의 탈수초성 질환으로 불린다. 신경세포의 축삭을 둘러싸고 있는 절연 물질인 수초가 염증으로 탈락하는, 주로 젊은 연령층에서 발생하는 만성 염증성 질병이다. 처음에는 손과 발이 둔해지고 그 움직임이 팔과 다리로 연결되며 급기야는 두 눈이 따로 돌아가고 입으로 웃음 짓기도 어려워진다. ‘그녀와 첼로라는 섬에 밀려오는 끊임없는 파도들은 점차로 사라져갔다. 첼로를 통해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던 자클린은 이제 잊어버린 언어라는 물결로 사람들의 에 다가가야 했다. 분신이었던 첼로를 방 한 칸에 놓아두고 조금씩 굳어가는 입술로 언어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청춘의 그녀가 인생에서 어떤 바다를 만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순풍의 바람에 흘러가던 꿈같은 항해는 갑자기 만난 커다란 풍랑으로 모두 잃어버리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깨어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스마일리라는 별명답게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혼자 숨어서 지내지 않고 어디서든 부르면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자클린은 다발성경화증 환자의 모임에도 참여해 삶을 위한 강연을 했고, 남편의 지휘로 음악동화 피터와 늑대의 해설을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한다. 또 첼로를 배우고 있거나 배우길 원하는 학생들을 그녀의 어눌한 언어로 찬찬히 가르쳤다. 거동과 식사를 도와주는 보조자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매일 일정을 짜면서 생활했으며 영화 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기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홀로 서 있던 그녀라는 무인도는 조금씩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고독을 친구삼아 자신의 예술보다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던 그녀는 197612월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는다. 영국을 빛낸 음악계의 장미에 국가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파리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남편은 새로운 여인과 두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이혼을 원치 않았다. 198710월에 하늘나라로 올라간 자클린의 묘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사랑했던 아내라고 적혀있었다.

 

   이런 그녀의 인생을 누군가는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는지도 모른다. 천국과 지옥을 작곡한 독일 태생의 프랑스 작곡자인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에게는 미발표곡이 있었다. 그는 백여 년 뒤에 토마스 미퓨네 베르너(Thomas-Mifune, Werner)에 의해 이 곡이 알려질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곡에 자클린의 눈물(Jacqueline’s Tears)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대의 첼리스트인 베르너는 안타까운 나이에 연주를 멈춰야 했던 비운의 자클린을 기억하기 위해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 곡은 의외로 한국에서 많이 알려졌는데, 1995년에 TV 드라마 옥이 이모의 배경 음악으로 나왔다. 그 후 2008MBC 수목 미니시리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는 한국인 비올라 연주자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기도 했다.

 

  여기에 예술보다도 긴 삶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술이 긴 삶을 넘어서 온다. 첼리스트였던 자클린은 자신의 연주 시절보다 길었던 병마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런던의 유대인 묘지에 잠든다. 이제는 그녀의 음악이 자신의 삶을 넘어서 음반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저 먼 억만년의 시간을 넘어서 지구 위에 펼쳐진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자클린이 힘겹게 버틴 세월이 시간이라는 바다를 흘러서 후세대인 우리에게 음악의 파도로서 다시 밀려온다. 가끔 생각한다. 그녀라는 별이 없었다면 에드워드 엘가첼로 협주곡은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을까? 그뿐 아니라 여자가 남자들보다도 힘차게 첼로를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다. 덤으로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곡이 발견되어 한국까지 알려져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의 음악으로 재탄생하지 못했겠지. 삶은 그런 것이다. 정점에서 바닥으로 내려갈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한 순간 바닥에서 하늘 위로 떠올라 빛나는 별로 기억된다. 마음 깊이 울리는 그녀의 음악이 오늘도 감동의 파도가 되어 조용히 나를 찾아온다. 가만히 손에 든 책표지를 읽어본다. 모든 삶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