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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신의 모노드라마

인문쟁이 이경아

2018-07-24

모성으로 이어지는 “제주 여신의 꿈”


딸아이가 그린 제주 여신 설문대 할망

▲ 딸아이가 그린 제주 여신_설문대 할망 ⓒ이경아 

 

 1만8천 신들의 섬 제주의 설화는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 구전과 지역의 유래를 담은 당, 무속의 전래를 바탕으로 살아 숨 쉰다. ‘살아 숨 쉰다’는 곧 ‘현존한다’는 의미다. 나의 어머니가 내 딸에게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휘영청 고목 앞에 놓인 굵은 양초 몇 개와 제물에서, 늙은 아들을 먼저 보낸 내 할머니의 굿 풀이에서 제주의 신은 우리의 삶을 위로하고 쓰다듬으며 일으켜 세우는 심리적·정신적 디딤돌로 존재한다. 제주의 척박한 삶을 지탱하는 설화에 담긴 내용과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다.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풀어내며 제주인의 자립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주인공을 통해 삶과 죽음의 연관성을 되새기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웅만 존재하는 신화를 동경하는 대신 현실적 안목을 갖추고 내 발로 지금 여기에 설 수 있도록 가르침을 베풀기도 한다. 제주의 설화에는 유독 여신이 많다. 이들은 여신이 되어서도 인격을 잃지 않고 오히려 복잡다단한 인간 세상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여정을 보여준다. 여신의 애정과 자비는 에로틱한 이성 간의 사랑을 넘어 자손과 공동체에 대한 모성의 원형을 드러내며 어머니의 삶에서 딸의 삶으로 이어지고 남겨진다. 이처럼 설화와 그 안에 존재하는 신의 의미를 되새기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숨을 옭죄어 오는 물질과 거친 밭갈이는 인간의 삶에 있어 풍파라기보다는 신이 되는 모험의 여정과 동일시된다. 어린 시절 동화를 들으며 이름 모를 나라의 공주를 꿈꾸었던 것처럼, 내 할머니는 제주의 설화를 들으며 여신이 되는 꿈을 꾸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는 노인네의 응석 어린 투정에 사흘 밤낮으로 물질을 만류해도, 바다로 향하는 사뿐한 걸음을 멈추지 못하셨으니 말이다. 역경과 타협을 아우르는 삶을 마치고 여신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시던 날, 이승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손들의 번창과 풍요로움을 기원하시며 눈을 감으셨던 할머니의 애정과 온기가 아직도 전해지는 듯하다.

 

여신이 마련한 소박한 잔치

 

북스페이스곰곰 실내공연(2018.6.2.)

▲ 북스페이스곰곰 실내공연(2018.6.2.) ⓒSimon Davis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희미해질 무렵 마주하게 된 자청비의 모노드라마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드라마의 시작에 앞서 농경 여신의 정성이 가득한 보리 쉰다리와 맛깔나는 무수가 들어간 빙떡이 한 대접 차려지고, 관객을 위한 잔치판이 벌어졌다. 별 기대 없이 덥썩 베어 문 입으로 한동안 잊고 지낸 할머니의 손맛이 뭉클뭉클 흘러넘쳤다.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정직한 맛과 그리움이 버무려져 마음 한편에 알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여신의 길을 신명나게 걸었던 할머니의 기억을 떠올리니 현실 속 제주 여신 자청비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차올랐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쉬엄쉬엄 들어보기 위해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자리 하나를 차지해 냉큼 앉았다. 배도 부르고, 쉰다리도 한 잔 걸치니 마음이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이 나른해진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가운데서, 슬슬 잠이 몰려들 무렵, 극장 안이 어두워지더니 어여쁘기도 하고 잘생겨 보이는 듯도 한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며 무대로 등장했다.‘아! 저 여인이 자청비이구나!’ 작달막한 키에 또렷또렷한 인상과 말투에서 제주 여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허물없이 건네는 숭(‘흉’의 제주어)에 오히려 웃음이 나고, 당당한 기운이 사람을 끌어들인다. 극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나는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청비는 농사를 관장하는 제주의 여신이다. 신들의 섬 제주를 배경으로 한 자청비의 이야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과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하는 당당함에 있다. 탄생과 성장, 사랑과 모험, 선택과 방황, 노력과 성취, 인간에서 여신이 되는 과정까지 어느 것 하나도 순탄치 않다. 하지만 사랑의 상대를 선택하고, 다양한 인물과 관계 맺으며, 지금 여기에 충실한 자청비의 모습은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을 느끼도록 여운을 남긴다. 그녀는 당당한 여성답게 타인을 탓하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동화 속 마법에 빠진 공주처럼 왕자가 위험에서 구해주는 수동적 인물상과는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자청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오로지 한 사람의 몸짓과 말로써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대담하다. 자청비라는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신의 모습이 주목받으며 여러 극을 통해 재현되었지만, 그동안 연인의 사랑에만 집중하는 줄거리와 화려한 의상에 가려져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번민하는 모습은 정작 퇴색되어 아쉬웠던 터였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과 연기를 해나가는 1인 3역의 배우 한은주는 자청비를 새로운 맥락에서 해석해 표현한다. 사랑하되 순종적이지 않으며 자비롭되 맹목적이지 않은 인간적 고뇌와 면모를 독백으로 읊어낸다. 모노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진행되는 극은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을 전달하며 관객의 몰입을 높인다. 이를 통해 장면 속으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날것 그대로의 감성을 전한다. 배우의 손짓 하나, 걸음 마디마디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거친 호흡과 숨소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전이를 이루어낸다. 적절한 장면에서 흐르는 가야금 가락이 없었다면, 흘려놓은 나의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나처럼 촌스런 관객에게 모노드라마의 경험은 생경할 수 있으나 듣고 또 들어도 재미난 옛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었던 마음으로 극장을 다시 찾게 될 것을 예감한다.

 

잔치의 여흥, 현실 속 제주 여신들이 주는 풍요

 

서귀포관광극장 야외공연(2018.5.19.)

▲ 서귀포관광극장 야외공연(2018.5.19.) ⓒ김현아 

 

극이 끝났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걸어 나오는 발걸음은 터덜터덜하다. 마치 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채 식지 않은 여흥이 섭섭함을 더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관객의 여흥도 이리 가볍지 않은데 배우의 여흥은 얼마나 털어내기 버거울지 짐작해본다. 그러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난 후, 몸에 밴 열망이 여신을 땅으로 불러 내렸듯 배우를 다시 무대로 불러올릴 것이다. 스치듯 생각한다.‘한은주라는 배우는 현실의 자청비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청비가 제주 사람을 살리고자 오곡의 귀한 씨앗을 얻어와 생명의 가치를 일궈낸 것처럼, 배우는 제주의 문화를 살리고자 생소한 극을 선보이며 예술의 가치를 알려내려던 게 아닐까?’ 삼다 제주에 하나를 더한다면 무궁무진한 신의 이야기를 다룬 설화를 꼽을 수 있다. 흥미롭게도 여신을 둘러싼 설화는 초고속 IT시대를 사는 우리가 놓친 따뜻한 온기를 일상 속에 불어넣는다. 여신을 꿈꾸던 할머니의 삶, 이를 지켜보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던 나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소비와 공동체의 가치를 전하고자 한다. 오늘의 경험에서 누린 예술적 감흥은 내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선한 인간으로 자라날 자양분이 될 것이다. 당당한 여신들의 품 안에서 제주가 지닌 치유와 풍요의 힘이 제대로 나누어지고 쓰이길 간절히 바란다.

 

간드락극장 공연(2018.6.3.)1간드락극장 공연(2018.6.3.)2간드락극장 공연(2018.6.3.)3

▲ 간드락극장 공연(2018.6.3.) ⓒSimon Davis

 

용기와 선택, 자청비를 생각한다. 철없는 도전과 무모한 시도만 떠올릴 게 아니라, 당당한 용기, 스스로 선택한 길을 열심히 가고 부딪히고 성취하는 자청비의 노력을 생각한다. 힘이 들고 부치고 너덜너덜해질 때마다 겁나고 좌절하고 포기라는 단어를 굴욕적으로 떠올려야 할 때, 자청비를 생각한다. 지금이 그렇다. 아니, 이제 지금은 아니다. 엄청난 용기가 솟구쳐서가 아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풀어낸 자청비에 대한 배움과 책임이고, 그 작업을 통해 나도 성장하고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연을 너머 운명이라는 기사와 귓것(제주말로“한심한 사람”을 이르는 말)의 훈장을 얻었기에 받아들여야 한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람들이, 격려와 우정이 내 등을 떠밀어 주었다. 우리의 작업이 컴퓨터 앞에서가 아님을, 서류와 절차, 각종 사본과 영수증이 아님을, 그 기본을 증명한다. 작년 처음으로 공연을 창작하면서 창작의 고통을 뒤늦게 깨달았다면, 그 후 소중한 한 회 한 회 공연을 하면서, 당당과 오가며 낭독하면서 관객의 고마움을 지극히 깨달았다. 더 이상 강조할 것도 없는 기본과 본질에 겸손하게,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나중에 크게 웃기 위해, 길게 숨 고르며 나를 일으킨다. 내게는 시간을 뭉치로 보내는 방법, 예술이 아니라면 어떻게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그 사이 계절이 바뀐다. 

- 한은주의 제작일기:「모노드라마 자청비」리플릿 중에서

 

 


※ 제주의 설화 자청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링크: 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local=jeju&dataType=01&contents_id=GC00701713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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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아
인문쟁이 이경아

2018 [인문쟁이 4기]


‘열등감은 우월을 향한 욕구이다’라는 아들러의 인생처방전을 좋아합니다. 못나고 실패 투성이인 제 삶을 타인과 비교하며 좌절에 빠졌던 것도 열등감 때문이었고, 그런 삶을 인생이라는 궤도에 끌어올린 것도 열등감이란 섬세하고 열정적 감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열등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니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강점이 빛나 보이고 사물에 부여된 의미가 마음 깊숙이 와 닿더군요. 어설픈 글에 내가 부러워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보자는 의지로 인문쟁이의 여정을 걸어가려 합니다. 평생 그림자처럼 나를 등지고 있을 열등감의 무게와 속도를 고려해 너무 빨리 달리지는 않으렵니다. 조금 더 천천히, 주의 깊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계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피려 합니다. 가끔 자신이 너무 못나 보인다면 제 글을 읽어주세요. 인문학을 통해 제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당신이 우월하고 소중한 존재임을 수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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