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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인간

AI 연구에서 길을 잃은 즐거움

김재희

2016-05-10

어느 덧 내겐 전생의 일처럼 아득해진 ‘인공지능(AI) 연구’, 그 중심에는 꼭 1년 전, 이번 생의 여행을 마친 슈넬레(†Prof.Dr.Helmut Schnelle, 1932~2015) 선생님이 계셨다. 유럽연합(EU) 산하 ‘언어와 두뇌’ 융합연구단 단장이었던 그는 물리학과 사이버네틱스 연구에서 출발해 형식기호론으로의 여정에서 만난 MIT 촘스키 교수와 함께 이론언어학의 기초를 다졌고, 자동장치(automata)의 형식논리를 자연언어에 적용할 징검다리를 찾아 그물언어학(Net-Linguistics)의 지평을 열기도 했다. 여기서 ‘그물’이란 언어중추에 해당하는 신경망(neuronal net)을 뜻한다.

일명 ‘유럽의 작전’, AI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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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6백만 불의 사나이』와 『소머즈』에 홀려 시작한 나의 AI 연구는 온갖 학문이 한 자리에 모인 박람회의 견학 같았다. 철학, 심리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 전산학, 언어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등 학생들 전공은 물론 함께 하는 교수들 배경도 워낙 다양해 매주 콜로키움 내용은 발제자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그에 비해 학부 학생들 AI 세미나에는 이게 무기 산업이 탐내는 영역이 틀림없다며 강의실 안팎으로 “전쟁 반대!”를 외치며 뛰어다니는 친구도 있고, 좀 더 강렬하게 “전쟁 대신 사랑!”을 표현하려 아예 사랑놀이를 벌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여기서 이러면…. 허 좀 민망하네. 좀 이따, 아님 저 쪽에서. 아, 어떡하나.” 필자가 받았던 문화충격은 청년들의 분방함이 아니라, 작정하고 수업 방해하는 학생들에 대한 슈넬레 교수의 태도였다. 부끄럼을 타는 소년처럼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쩔쩔매다 그는 다시 초롱초롱 천진무구한 선비의 눈빛으로 수업을 이어가곤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킥킥 웃음소리가 나면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수업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관점과 취향에 따라서 AI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그토록 다양하고 모두 허용되었다.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각자의 몫이지만, 미래는 성큼성큼 오고 있었다.

  • 헬무트 슈넬레 선생님의 생전 모습

    헬무트 슈넬레 선생님의 생전 모습
    ⓒ독일 빌레펠트 대학 ‘학문혁신의 공로자’ 수상식 촬영 자료

당시 미국의 몇몇 대학에는 대학원 과정으로 AI 관련 학과들이 개설되었지만, 전통의 무게에 눌린 유럽 대학들은 그런 변신이 어려워 자구책을 마련하는 대안들이 모색되었다. 한국에서도 최근 시작된 “AI는 곧 직업 전반을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유럽적인 대책의 궁구’가 그 화두였다. 거의 ‘문명의 전환’이라 부를 사태를 감당하려니 인간의 사유 및 활동 영역 중 상당 부분을 기계가 대체할 현실을 가정하고 기술 개발에 소요되는 전산 기술력의 제고와 자연과학 분야 프로젝트를 위한 과감한 투자를 비롯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낯선 환경에 대응할 학제적 구상, 문학과 역사와 철학의 새로운 방법론 모색까지 유럽 공동체의 차원에서 변혁을 준비하는 작업은 자연스레 미래에 대한 다각적 성찰을 요구했다.

다양한 관점에서 이 낯선 상황을 조망하려 각각의 TF 팀들이 꾸려지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의학 및 공학 분야마다 유럽 전역의 관련 연구자 목록과 AI 관련 강의 계획서들이 작성되었다. 이 방대한 작업을 특정 대학이 도맡을 수는 없으므로 주제 별로 수십 개의 중점 대학이 선정되고 방학 기간에 학생들 관심에 따라 이웃 나라 대학의 2~4주짜리 집중 강의에 수업 참여를 독려했다. 빈틈없이 ‘유럽의 작전’을 수행하고자 당시 EU 융합학술부 이름으로 진행되는 회의 자료는 모두 ‘대외비’였다.

AI에게 일자리 말고 일거리를 맡기고 - 수많은 둥지niche 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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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아버지가방에들어가는” 상황을 적절히 ‘끊어 듣게’ 하려면 기계의 회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새로운 낱말, 심지어 외국어를 배울 때 우리 뇌의 언어중추에서는 어떤 뉴런이 생성, 혹은 새로 연결되는가? 이 단순한 질문을 AI 식으로 풀어 본다면 인간 귀의 ‘끊어 듣기’와 똑같은 결과를 내놓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된다. 중간과정이야 어떻든 같은 결과를 산출하는 시뮬레이션의 설계, 즉 AI는 인간 행태의 피상적인 결과와 근사한 값을 내는 시뮬레이션 모형이다.

하지만 그 중 어떤 것은 19세기 멘델례프가 어렴풋이 작성한 주기율표가 20세기 전세계 과학 교과서 필수 항목으로 들어가듯, 조만간 전 세계 대입 수능의 단골 문항이 될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항목 별로 데이터 서 말을 함수로 꿰어 보배로 만드는 작업에 묶인 연구자들은 예컨대 자연어의 아날로그 규칙을 디지털로 바꿔 기계에 입력하다 쏟아지는 오차 값들을 주워 담느라 밤낮 추상(抽象)의 미로 속을 헤매야 하니 여기저기서 소음 혹은 신음이 새나오곤 했다.

슈넬레 교수님과 함께 유럽 5개 국어의 자동번역 AI 시스템을 개발했던 제자들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양한 분야로 흩어졌으나 대부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틈새(niche)를 찾아 포스트 AI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AI에게 일거리를 맡기는 대신 AI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인문적 틈새 혹은 고유한 서식지를 하나씩 만들어낸 셈이다.

분초로 시간을 아껴 쓰는 틈틈이 독일 현대사의 참담한 그늘을 외국인 학우에게도 조곤조곤 일러주던 친절한 동학 B는 베를린공대 교수를 사직한 후 독일공산당 임원이 되어 미혼모와 외국인 노동자의 복지 지킴이로 활약한다는 소식을 그 순정하고 열정적인 글로 접한 바 있다. 수학과 물리학의 탁월한 점수 탓에 묵혀뒀던 재능을 8시간짜리 옴니버스 셰익스피어 드라마 집필과 1인극 뮤지컬 배우로 발휘한 영국 친구 D는 시(詩) 쓰는 자동기계를 완성했다는 최근 소식을 들었다.

차가운 미로에서 길을 잃고 깨어난 필자는? 생명을 잉태하고 황홀경의 태몽(胎夢)을 꾸며 깨달은 집단무의식 세계에 AI의 자리가 없다는 한계를 확인한 후 문명의 전환, 진화의 주체는 결국 인간임에 안도하면서 AI 박람회에서는 본 적이 없던 오래된 미래, TK(= Traditional Knowledge, 전통지식)의 세계로 방향을 틀어 정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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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재희
김재희

서울예대 학생들과 ‘예술과 과학’ 탐색을 하며 수업 범주에 전통문화를 포함시키고 싶어, 늦깎이로 시작한 옛 문헌을 살피는 공부가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아 당분간 계속 갈 것 같다. 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을 지향하며 ‘나물 연구’와 ‘태몽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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