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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배우와 관객의 교감은 몸성으로 이루어진다
예술

배우와 관객의 교감은 몸성으로 이루어진다

공연의 라이브성

by 박병성 / 2019.02.18


영국의 내셔널 시어터에서 선정하는 전 세계 우수한 연극들은 NT Live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라이브의 형태는 아니지만, NT Live 녹화 영상을 국립극장에서 유료 상영하고 있다. 영국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영화 티켓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연극 티켓보다는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출연하는 영국 내셔널 시어터의 〈햄릿〉이나 〈프랑켄슈타인〉,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실제로 살아 있는 듯한 말 인형으로 화제가 된 〈워 호스〉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베네딕트 컴버매치 주연의 연극 <햄릿>

▲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연극 <햄릿>은 극장에 공연실황이 상영되기도 했다. ⓒ메가박스중앙(주) MEGABOX



몸과 몸이 바로 여기서


200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시작으로 공연을 영상화하는 움직임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NT Live는 그중 가장 성공한 예다. 양질의 공연을 저렴한 비용으로 다수에게 공급하는 공연의 영상화 작업은 예술의 민주화나 효용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높지만, 우호적인 반응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연을 영상화하는 것 자체가 공연의 핵심 원리를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연이 디지털화되며 한편으로 더 부각되고 존중되는 것이 배우의 몸이다.


연출가 피터 브룩은 그의 저서 〈빈 공간〉에서 연극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의한다.


“빈 공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동안 배우가 그 빈 공간을 가로질러간다. 이것이 연극에 필요한 전부다.”


연극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연극이 벌어질 공간과 그곳을 지나가는 배우, 그리고 그것을 관찰하는 관객이면 족하다. 이 단순한 요소들이 만나 연극이 이루어진다. 기본이 되는 단순한 요소들 외에도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필요한데, 이 요소들이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한다는 점이다. NT Live는 공간, 배우, 관객이 있어 연극 형성 조건을 충족한 듯 보이지만, 바로 이곳에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연극이 아니다. 연극은 현재에서만 유일하게 존재한다. 연극은 관객과 만나면서 소멸되고 소멸을 통해 완성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배우, 더 정확하게는 배우의 몸이다. 공연과 관객이 만나는 데 매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배우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배우의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 연극의 출발을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찾는다. 연극은 기원부터 배우와 관객의 교감으로 이루어졌고 제사장이자 제의자로서 배우의 존재가 중요했다. 수천 년 연극의 역사 동안 배우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은 건 단 한순간도 없었다. 다만 근대 연극에서 연출가의 출현과 동시에 그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디오니소스 극장

▲ 6세기 때 지어진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 유적지. 이 극장을 중심으로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가 펼쳐졌다.


19세기, 현실을 재현하는 사실주의 연극이 주류를 이루면서 연출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흔히 독일 작센의 마이닝겐 게오르그 2세를 최초의 연출가로 본다. 그는 배우를 고용하여 충분히 연습시켰으며, 사실적인 무대를 재현하려고 했다. 배우를 무대의 일부로 여겨 움직임이나 시선 처리까지 깊이 관여했다. 사실주의 연극에서 배우는 제4의 벽 안쪽에서 극적 상황에 몰입하여 작가 또는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희곡 속 인물을 재현하는 도구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주의 연극에서 연출가와 작가의 중요성이 커지긴 했지만 배우 역시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다. 사실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던 연극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다. 특히, 반사실주의 연극에서 배우의 몸에 대한 관심과 고민이 짙어졌다. 이는 모든 인식의 완성이 몸의 자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프랑스 철학자)의 사상과도 연관된다. 몸을 자각의 주체로 여겼던 퐁티의 생각처럼 연극에서도 배우를 단순히 전달자가 아닌 그 자체의 몸짓이나 몸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나 퍼포먼스 연극에서는 종종 몸성(Corporeality)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개념적인 용어지만 연극에서는 기호학적인 몸과 대비되는 현상학적인 몸을 의미하며, 현상적 존재로서 몸의 육체성을 가리킨다. ‘배우 몸 자체의 물질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배우의 억양, 몸짓, 행동, 카리스마 등에서 뿜어 나오는 매력이 대체할 수 없는 연극의 핵심임을 강조한 것이다.



몸성을 강조한 연극


연출가 고든 크레이그(Edward Gordon Craig)는 배우를 연출가의 의지로 움직이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게 연극이란 우연한 사건과 결과가 제거되고 완벽하게 디자인된 세계를 의미했다. 고든 크레이그에게 좋은 배우란 이성으로 감성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배우였다. 그런 의미에서 ‘초인형’이라는 말로 배우를 표현하기도 했다. 고든 크레이그를 비롯해 연극성을 강조한 연출가들은 인물 재현을 넘어 배우의 몸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러시아의 연출가 메이어홀드(Meyerhold)는 나아가 배우를 작품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예술가이자 작품의 핵심 질료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살아있는 유기체적인 요소(bio-)와 기계적인 요소(-mechanics)를 결합한 생체역학(biomechanics)을 연기 훈련법으로 제시했다. 배우는 자신의 몸을 작품의 핵심 재료로 인식하고 생채역학 훈련을 통해 기계적, 반사적으로 작용하여 무대를 구성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고든 크레이그와 다른 점이라면 배우의 몸을 조종하는 주체가 배우 자신이라는 점이다. 메이어홀드에게 배우는, 삶의 재현이 아닌 연극 그 자체이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유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메이어홀드는 연극에서 관객을 중요하게 보았다. 배우들의 잘 훈련된 몸의 기술을 통해 자극을 받고 최종 연극을 완성하는 자리를 관객에게 내어준다.


잔혹극을 추구했던 프랑스 연출가 아르토(Antonan Artaud)의 연극은 메이어홀드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다. 아르토는 잔혹한 연극을 통해 관객들을 구토를 일으키고 현기증 날 정도의 상태까지 몰아붙이려고 했다. 불쾌한 경험이지만 이런 경험이 최종적으로는 카타르시스를 일으켜 관객들을 정화시킨다고 보았다. 가난한 연극을 추구했던 그로트프스키 역시 무대에서 다른 요소를 제거하고 잘 훈련된 배우의 몸을 통해 작품에 다가가려고 했다. 몸성을 강조한 연출가들의 작업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독히 그로테스크하고 혐오감을 유발했던 아르토의 작업은 종종 거부감을 일으켰다.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적인 이성보다 몸의 감각성을 강조한 방식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관념적으로 다가가기도 했다. 그러나 몸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연극이 지닌 원초적인 힘을 복원시키면서 연극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연극


이처럼 현대 연극에서 배우 몸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를 연극적 이론으로 발전시킨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뿐만 아니라, 사실주의 연극에서도 배우의 몸에 대한 중요성은 떨어지지 않는다. 점점 디지털화되어 예술도 복제가 가능한 세상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연극을 디지털화한 영상과 연극 자체가 주는 감흥은 차이가 크다. NT Live는 영상화 과정에서 연출가의 인터뷰를 넣거나 작품을 충분히 이해한 카메라 워크로 배우의 표정을 세세히 잡아내는 등 영상만의 매력을 준다. 영상화된 연극에서도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관객이 관람하는 상태로 촬영하거나 녹화 영상에서도 공연의 인터미션 장면을 상영하여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마치 실제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영상화된 연극은 현장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배우와 관객의 몸의 교감이나 그것에서 오는 짜릿함을 복제하지는 못한다. 공연은 관람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 경험하는 것이고, 그 경험의 최종 종착점은 관객이기 때문이다.


인문360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연극 교감 배우 공연 햄릿 연출자 live 관객 몸성 영상
필자 박병성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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