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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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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에서 만난 '백마 탄 장군'의 전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출셋길 버리고 독립운동, 하지만 '간첩' 누명 쓰고 옥사한 김경천 장군'

by 주진오 / 2021.01.15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은? 영화, 드라마 등 일반 시민들에게 익숙한 대중문화콘텐츠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 역사 속 특정 장면들은 그 앞뒤로 어떤 시대적 상황과 맥락, 역사적 진실과 논란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걸까. 역사 전문가들의 친절한 소개와 설명을 통해 그동안 피상적으로 접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가깝게 다가가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화 <암살>을 보며 제작진이 김경천의 일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역사학자로서 감탄했습니다. 그만큼 충실한 자료조사가 있었기에 이 작품이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속사포와 김경천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김경천은 독립군에 가담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꿈꾸었으나 현실은 그럴 만한 조건이 되지 못했기에......

 

 

 

생계형 독립군, 속사포의 진실



1933년 친일파 암살작전 그들의 선택은 달랐다. 암살

영화 <암살>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천만이 넘는 관객이 사랑한 영화 <암살>, 보신 분들이 많으시지요? 안옥윤(전지현), 염석진(이정재),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등 개성 강한 등장인물이 가득했습니다. 속사포라는 별명으로 불린 추상옥(조진웅)이라는 인물도 기억하시나요? 영화에서 김원봉(조승우)은 그를 ‘뺀질이긴 해도 나름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멤버’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속사포는 거사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처음에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항일운동이라는 거 처음에는 욱하는 마음에 삼사 년 갑디다. 근데 그것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돈 한 푼 없이 이러는 것 좀’이라는, 지극히 속물적인 이유였지요.


그런데 그를 돌려세운 염석진의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과거 신흥무관학교 학생 시절, 나뭇잎이 떨어지기 전에 어서 무기를 준비하여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 소원이라는 글을 쓰지 않았느냐’는 말이었지요. 지금은 비록 생계형 속물 총잡이가 됐지만, 독립을 위해 맹세했던 그 시절의 다짐을 다시 듣자 마음이 돌아선 것입니다.


 

생계형 독립군 속사포 독립 운동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지. 암살

영화 <암살> 속 속사포의 모습(이미지 출처 : 사람 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사실 그 대사는 1919년 7월경에 쓰인 김경천(金擎天)의 일기 <경천아일록> 에서 가져온 것인데요.


"여름이 장차 끝나가고 초가을이 오려고 한다. 여러 유지들은 나뭇잎이 떨어지면 군사행동을 하기가 불리하니, 어서 무기를 준비하여서 압록강을 한번 건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압록강은 고사하고 개천도 못 건너가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김경천이 아닌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희망 사항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군사전문가였던 김경천이 볼 때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했던 꿈이었지요.


영화 <암살>을 보며 비록 사실관계를 조금 다르게 표현했지만, 제작진이 김경천의 일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역사학자로서 감탄했습니다. 그만큼 충실한 자료조사가 있었기에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김경천이라는 인물이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이었고, 1998년이 되어서야 서훈(敍勳)을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연구논문이 나오고 언론에서 소개된 것도 거의 최근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오랫동안 철저하게 잊혔던 ‘백마 탄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다시 소환되어 기쁜 마음이 들었어요.



출세와 조국 사이...




김경천 장군의 경천아일록

홍범도기념사업회가 공개한 김경천 장군의 <경천아일록>



1888년생인 김경천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입니다. 대한제국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사를 23기로 졸업했습니다. 불행히도 일본 육사를 다니던 중 대한제국이 사라져 버렸는데요.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다며 자퇴하려던 그를 설득한 것은 지인들이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군사 지식을 배워, 독립운동에 활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결국 그는 일본군 기병 장교로 임관하여 대위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학생 시절의 결심과 달리, 사회에 나와 기득권에 편입이 되면 거기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지요. 일본 육사 출신의 조선인 장교들 역시 대부분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김경천은 달랐습니다. 그가 일본 육군 기병 1연대 장교로 근무하고 있을 때, 도쿄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꿈속같이 기쁜 중에도 불이 날 것 같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라고 회고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나라를 팔아먹은 원수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보고만 있는 것도 제2의 매국자이다...2천만 전 민족을 통틀어도 나만큼 국가를 위한 학문을 배운 자가 없다...아무리 마음에서 잊자 하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처자의 문제다... 없는 셈으로 치자’라고 일기에 썼습니다. 조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깊은 사명감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사이에 둔 고뇌가 담겨 있습니다. 결국 그는 1919년 6월 비밀리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합류하였고 군사교관이 되었습니다.



김경천 장군 모습

김경천 장군(1888~1942)(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한편 김경천의 망명에 대해 윤치호(1866-1945)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습니다. “김광서 군이 가족 생계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북부지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이 몹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선동가들이 몇 달 안에 조선의 독립이 실현되리라 상상하거나 믿는 것처럼, 김광서 대위도 그렇게 상상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세계사에 상당히 무지한 사람이다.”라고 말이지요. 계몽운동가였던 윤치호가 볼 때, 김경천의 망명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백마 탄 군신(軍神), 김장군’



일본육사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았던 그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원했던 그는 1919년 말에 러시아 지역으로 무기를 구입하러 갔다가 그대로 자리를 잡고 만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투쟁 지도자로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러시아 혁명군과 함께 반혁명 세력과 그들을 지원하던 일본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아울러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들을 괴롭히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늘 백마를 타고 전투를 지휘했기 때문에 그는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렸지요.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그를 인터뷰한 기사에서, 그를 ‘군신(軍神)’이라고까지 치켜세웠습니다. 이때 그의 백마 탄 장군의 이미지를 김성주가 차용하여,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한데 아직 더 검증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1924년 1월, 김경천이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에 대하여 쓴 시를 같이 보실까요?


 

경천아일록 원문 중 '불쌍한 독립군'

<경천아일록> 원문 중 '불쌍한 독립군'(이미지 출처 : 학고방)


 


 

 

불쌍한 독립군! 총을 벗은 후?!


1. 영하 사십도 시베리아 추위에 여름 모자 쓰고서 홑저고리로

밑 빠진 메커리(짚신)에 간발하고서 벌벌 떨고 다니는 우리 독립군.

2. 한반도를 결박한 철사를 벗겨 화려강산 옛 빛을 보려 하였더니

경박한 사람들은 코웃음하며 부모나 찾아가서 보려므나.

3. 서산에 지는 해는 쓸쓸도 하다. 너의 고향 이곳에서 몇천 리더냐.

널 기르신 너의 부모 이곳 있으면 너의 모양 보고서 어떠하리오.


 


 

 

이보다 더 사실적이면서도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시가 또 있을까요? 저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눈물이 살짝 맺히더니 나중엔 그만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1922년경 러시아 반혁명군이 사라지고 일본군이 철수하자, 소련 정부는 조선인들의 독자적 군사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무장투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토지를 개척하고 농장을 운영하는 지도자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자 1925년에는 국내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이 합류하여 단란한 가정생활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193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 초청되어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됩니다.



무덤도 없는 억울한 죽음



독립운동 내의 어떤 분파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그는 소련 공산당에도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에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조선인 지도자들을 소련 당국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1936년 반혁명죄로 체포되어 3년 형을 받았습니다.

 

옥중에서 김경천 장군의 모습

1936년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에서 김경천 장군 모습 / 1939년 카자흐스탄 수용소에서 김경천 장군 모습(이미지 출처 : 김경천 평전) 



그가 옥중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은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1937년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로 이동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머나먼 카자흐스탄까지 찾아가서 가족과 합류했지만, 반년도 못되어 또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간첩죄라는 오명을 쓰고 8년 형을 받아 시베리아의 코틀라스에 있던 노동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소련 작가 솔제니친이 썼던 <수용소군도>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1942년 영양 고갈로 인한 병에 걸려 사망했고, 무덤도 없이 집단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최근까지도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잊으면 안 돼!

 


영화 암살 스틸이미지

영화 <암살>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일본군 장교로서 보장된 출세를 버리고 고난에 찬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했던 김경천이 일본의 간첩이었을 리가 없지요. 스탈린 독재체제에 의해 뒤집어쓴 누명에 불과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1959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어 복권되었습니다. 그의 일기 <경천아일록>도 소련 정부가 압수했다가, 2005년 무렵 가족들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정보국이 되돌려 주었다고 하지요.


만약에 김경천이 그냥 일본군 장교로 머물러 있었다면, 다른 일본 육사 출신들처럼 고위 장교로 출세했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최고의 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해방 이후에는 슬그머니 국군 창설에 참여해 군 수뇌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까지 유랑하다가, 일본의 간첩이라는 모욕적인 죄를 뒤집어쓰고 비참하게 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겠다는 그의 결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이 아닐까요?


분명히 영화에 나오는 속사포의 모델이 김경천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 속의 김경천은 독립군에 가담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꿈꾸었으나, 그는 다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제작진이 오히려 속사포라는 캐릭터를 통해, 김경천의 간절했던 소망을 영화로나마 실현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저 혼자만의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하와이 피스톨을 수행하는 영감(오달수)은, 죽으러 떠나면서 안옥윤에게 "우리 잊으면 안 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분들을 기억하고 잘 기록해서 후세에 전해 주는 것이겠지요.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암살>에서 만난 '백마 탄 장군'의 전설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역린>이 그려낸 정조 암살 음모의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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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주로 19세기 말의 근대개혁과 민족주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콘텐츠를 결합한 역사콘텐츠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를 대표집필하였으며, 아프리카 DR콩고에 국립박물관을 건립하는 코이카 사업의 PM을 맡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으로 부임하여 박물관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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