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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나아가는, 용감한 마음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주민현

2022-07-14

나는 늘 이처럼 홀로, 조금은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에 끌린다.

여성들이 갈등과 위기에 봉착하고 마침내 이를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단 스스로 힘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기고 끝내 고무시킨다는 점이다. 

 

 

 

모나고 서툰 사람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정이 가는 면이 있다. 서툴다는 건 뭘까.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 같은 면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관계에 서툴고 생활에 서툴고 감정에 서툴러서 허술한 구석을 쉽게 들키는 사람들. 그 덕분에 어물쩍 친구가 되기에 좋은 사람들. 나를 비롯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인생의 어딘가에서 꽉 막힌 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그렇게 막다른 길에서 친구가 된 사람들.

 

서툰 사람들에겐 자책과 슬픔이 많고 변명이 많다. 나도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멋지고 아름답고 고상한 작가라기보다는 책을 무겁게 이고 지고 다니며 읽고 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에 가깝다. 시를 쓴다는 것도 어떤 면에선 삶이 어렵기 때문에 끼적이는 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서로의 약하고 허술한 면을 나누며 함께 인생의 어두운 면을 알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무력하여도, 마침내 강인하게

최은영 작가의 장편소설 <밝은 밤>은 그래서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혹은 가까운 친구의 이야기처럼 술술 읽혔다. 이야기는 남편과 이혼하고 서울을 떠나 작은 지방도시인 희령으로 내려간 ‘나’로부터 시작된다. 전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으나 자신이 아닌 사위 편을 드는 엄마와 아빠를 떠나온 곳에서 어릴 적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할머니를 만난다. 전 남편과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이혼을 말리는 부모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그렇게 서울을 멀리 떠나와 희령에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 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는 말처럼 전 남편과 부모님,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미움, 슬픔, 분노가 뒤섞인 나의 실패한 사랑의 역사는, 할머니로부터 전해듣는 증조모와 증조부의 이야기, 그 선조의 삶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조의 역사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나란히 흘러간다. 백정의 딸이었던 증조모와 목수의 아들이었던 증조부의 이야기로부터. 무시와 천대, 멸시, 전쟁으로 불안정한 가득한 삶. 자신의 어머니, 새비 아주머니, 그의 딸 희자에 대한 할머니의 회상. 단란했으나 고단한 삶. 이야기하며 할머니와 나는 점차 가까워진다. 서툰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또 다른 서툰 사람이다.

 

 

밝은 밤, 최은영, 문학동네, 2021 (출처: 알라딘)

<밝은 밤>, 최은영, 문학동네, 2021 (출처: 알라딘)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는 ‘나’의 말처럼 할머니와 나는 자주 오가면서도 얼마간 서로를 위해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가까워진다. 뜻밖에도 할머니도 같은 고향 출신인 사람과 결혼하여 아기를 낳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유부남임을 속이고 중혼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렇게 홀로 딸을 키워온 할머니의 역사가 다시 나의 역사와 중첩된다. 끝까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는 미움과 분노는 마음을 날카롭게 만들고, 자신을 쉽게 미워하게 만든다. 같은 마음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서서히 치유와 회복을 향해 나아간다. 갈등은 결코 쉽게 봉합되지 않지만 마음에는 탄력성이 있어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이야기는 마침내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바라보게 만든다. 

 

나는 늘 이처럼 홀로, 조금은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에 끌린다.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아이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다양한 여성들이 갈등과 위기에 봉착하고 마침내 이를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서사의 매력적인 지점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단 스스로 힘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기고 끝내 고무시킨다는 점이다. 갈등과 고난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때로 무력하고 슬퍼하고 좌절하지만, 마침내 강인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서툴지만 씩씩하게

넷플릭스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코로나가 절정이던 어느 날, 사적 인원이 2명 이상 모일 수 없던 때 혼자 침대에 누워 있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공항에 커다란 진공청소기와 함께 앉아 한 손에는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의 이미지가 아주 상징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드라마는 남편의 학대에서 벗어나 어린 딸을 데리고 헤쳐나가는 알렉스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기름이 없는 자동차에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주유하고 나니 텅 빈 지갑으로 겨우겨우 도착한 곳에서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 하자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탈출한 알렉스에게 공무원은 묻는다. “학대도 안 당했고 집도 있는데 왜 여기에 왔죠?”

 

 

 조용한 희망, 넷플릭스, 2021 (출처: 넷플릭스 미디어 센터)

<조용한 희망>, 넷플릭스, 2021 (출처: 넷플릭스 미디어 센터)

 

 

마약에 찌들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남편과 컨테이너 집에 살면서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직장도 구할 수 없는 알렉스는 믿을 만한 친구도, 가족도 없이 완전히 혼자이다. 내 인생에서 내가 소외되는 기분일 때, 하지만 맹목적으로 나만을 의지하며 꼭 매달린 자그마한 아이를 두고 혼자 슬프고 외로워하는 감상에 빠질 여유조차 없이 알렉스는 씩씩하게 발로 뛰며 일한다. 그 씩씩함이 마음에 남는다. 

 

알렉스는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도 새로운 남자에게 기대지도 않는다. 가난하지만 고통스럽지 않고 힘들지만 비참하지 않고 가족도, 남편도 없지만 외롭지 않다. 길에서 새로이 만나는 여성들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일을 하면서 만난 이와 아이를 매개로 슬픔을 나누기도 한다.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일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에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세상과 도움을 주고받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서툴더라도 우리가 계속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비슷한 맥락에서 역시 넷플릭스의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속 주인공도 떠오른다. 하시디즘(정통 유대교) 남편과 결혼하면서 에스티는 생전 처음 보는 규율에 부딪힌다. 결혼과 동시에 한 사람이자 여성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압당하면서 에스티는 자유를 찾아 베를린으로 도망친다. 오로지 공동체를 위해, 남편을 위해, 가정과 아기를 위해 복무하기를 요청받는 결혼생활 이후에 베를린 음악원에서 친구들을 만나며 어울리는 에스티의 모습은 아주 아름답다. 후반부에 아주 서툴고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섬세하고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느껴져 마음이 찌르르해진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넷플릭스, 2020 (출처: 넷플릭스 미디어 센터)

<그리고 베를린에서>, 넷플릭스, 2020 (출처: 넷플릭스 미디어 센터)

 

 

나아가는, 용감한, 조용히 반짝이는

나는 서툰 사람들이 좋다.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고 유연하지 못한 사람들. 관계에 미숙하고 생활에 자신이 없고 감정에 서툴러서 자주 실수하는 사람들. 잘 찾아보면 분명히 잘난 구석이 있음에도 자신 있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우물쭈물하고 엉거주춤한 사람들. 그 구석을 잘 들여다보면 용기 있게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여성과 광기>에는 결혼한 이후 몇 번이나 스스로 죽기를 시도했던 실비아 플라스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자주 위기에 처하는가? ‘불행은 온다.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요즘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늘 무너지기 쉬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조차 그러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수 있는 용기와 아름다움을 누구나 갖고 있다. 

 

여성과 광기, 필리스 체슬러, 위고, 2021 (출처: 알라딘)

<여성과 광기>, 필리스 체슬러, 위고, 2021 (출처: 알라딘)

 

 

친구든 가족이든 처음 보는 타인이든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구원해줄 수 없으나 그 삶과 함께 가줄 수 있다.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고 서로에게 필요한 걸 나누어 줄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 비극 속에서도 조용히 반짝이는 이야기를.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은? 세월을 견디고 오래 사랑받는 문학 작품들은 대개 성공보다 실패를, 대답보다는 질문을, 상식보다는 상식 밖을, 중심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다.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 쓰라린 실패담, 난처한 질문, 보잘것없는 주변의 이야기가 우리의 인식과 지각을 깊이 파고들어 종내는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코너에서는 국내외 문학작품 속 인물들의 서툴고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 알고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작가들의 소개로 만나본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서툰, 나아가는, 용감한 마음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내가 ‘탈북 청소년의 스피커’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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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작가 사진
주민현

작가
2017년 한국경제신문으로 등단, 작품집 <킬트, 그리고 퀼트>가 있다. 2020년 신동엽 문학상 수상. 켬 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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