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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절에 머물다

제주시민체험인문학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인문쟁이 양혜영

2017-09-25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전면사진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전면사진


시간을 모으다

 

모니카 페트의 책에 나오는 부루퉁 씨는 아침 여섯시 반이면 어스름한 거리로 나간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부루퉁 씨가 하는 일은 단 하나, 생각을 모으는 것이다. 예쁜 생각, 미운 생각, 즐거운 생각, 슬픈 생각, 슬기로운 생각, 어리석은 생각. 부루퉁 씨는 세상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모양과 빛깔을 지닌 생각을 소중히 주워 가방에 담는다. 다음날 아침이면 밤새 꽃으로 변한 생각이 작은 알갱이로 부서져 사람들에게로 돌아간다. 그 동화의 말미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이 세상에 만약 생각을 모으는 사람이 없다면, 생각들은 줄곧 되풀이되다 완전히 사라질지 모른다. 생각하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는 어른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글이었다.


우리의 시간 또한 생각만큼 다양하고 모으기 힘들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부루퉁 씨가 생각을 모으는 것처럼 시간을 모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상한 나라에 사는 토끼마냥 바쁘다는 입에 달고 쫓기듯 시간을 흘릴 게 아니라 주머니에 모았다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 쓸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여유롭고 느긋하게 순간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건물사진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건물사진


제주시 삼성로에 위치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은 제주의 시간이 모인 곳이다. 그곳은 망망대해에 제주도란 섬이 생긴 이래 척박한 황무지를 일궈 오늘을 만들어낸 제주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곳에 가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내가 사는 시대가 아닌 것 같고, 살아보지 못한 먼 시간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곳. 제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민속박물관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다. 아마 그런 이유로 제주시민인문학아카데미에서 체험인문학 장소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택했을 것이다

 

제주시민체험인문학-민속자연사박물관견학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탐방

 ▲ 제주시민체험인문학-민속자연사박물관견학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탐방


시간을 여행하다

 

온 도시를 달군 8월의 무더위도 인문학을 향한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주말의 늦잠을 포기하고 아침 9시부터 모인 50여명의 참가자들은 인문학 강연에 앞서 민속자연사박물관을 견학했다. 1984년에 개관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은 자연사전시실과 제1민속전시실, 제2민속전시실,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사전시실에서는 제도의 지질암석과 동식물을 다룬 자연사자료를, 제1민속전시실에서는 제주 변천사와 제주인의 일생을 볼 수 있다. 외부에 있는 해양종합전시관에는 다양한 고래머리뼈와 제주 바다에 서식하고 어류, 해조류, 패류 등이 실제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 외 야외전시장에는 생활용구와 신앙생활용구 등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수강생들과 전시실을 돌다보니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처음 온 때가 떠올랐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봄이었다. 선생님 뒤를 따라 무심코 안으로 들어섰다가 불쑥 나타난 거대한 고래뼈 모형을 보고 너무 놀라 얼음이 되었다. 이어서 나타나는 동물들의 박제에 잔뜩 겁을 먹고 견학 내내 친구 손을 꼭 잡았다. 나의 첫 박물관 견학이었다. 이제 그때만큼 놀라지 않을 정도로 자주 박물관을 방문했지만 그래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만은 여러 번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곳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시간이 모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연사전시실-용암석자연사전시실- 제주의 탄생

민속전시실- 전통초가 민속전시실-해녀

 ▲ 자연사전시실-용암석 / 자연사전시실-제주의 탄생 / 민속전시실- 전통초가 / 민속전시실-해녀


개관한 지 33년이 흘렀지만 박물관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처음 방문하던 날 오금 저리게 한 동물들의 박제도 그대로고 오래전 우리의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입고 먹고 생활한 초가와 용구들은 물론, 야외전시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연못에서 헤엄치는 주황색 잉어들까지 그대로였다. 주변 다른 곳들이 금세 바뀌고 사라지는 데 이곳만은 33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조금씩 느리게 변하고 있었다. 

 

인문학 강연-원도심과 탐라역사  인문학 강연

 ▲ 인문학 강연-원도심과 탐라역사 / 인문학 강연


제주시민체험인문학의 마지막 일정은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 김일우 소장의 「원도심과 탐라 역사」 강연이었다. 관람객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신축한 사회교육관에서 제주 역사의 발원지에 대한 역사학적 고찰과 함께 ‘원도심’ 활용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에 살면서도 제주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때문에 이 날 들은 제주라는 이름을 갖기도 전 섭라, 탐모라, 탐라라 불리던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는 깊은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제주 전통 의상(특별기증전)

제주 전통 항아리체험관-돗통시 (재래화장실)

 ▲ 제주 전통 의상(특별기증전) / 제주 전통 항아리 / 체험관-돗통시 (재래화장실)

 

시간 안에 머물다

 

흔히 나라와 지역을 알려면 박물관을 가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지역과 진심으로 친해지고 속내를 알려면 천천히 산책을 하라고 한다. 원래 빠르지 않은 산책 앞에 ‘천천히’까지 붙은 이유는 그만큼 느리게 들여다보라는 의미다. 그렇게 느리게 걸어야 보이는 것들을 모은 곳이 박물관이다. 어느 곳보다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곳이지만 결코 낡거나 사라지지 않아 더욱 소중한 곳이기도 하다.

내딛는 걸음이 너무 빨라 숨이 가쁠 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막막한 날엔 박물관을 천천히 걸어보자. 시간이 멈춘 그곳에 가면 스쳐 보낸 날들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양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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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안내

제주시 삼성로 40 (일도2동)

☎ 064)710-7707~8

장소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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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영
인문쟁이 양혜영

2017,2018 [인문쟁이 3,4기]


양혜영은 제주시 용담동에 살고 거리를 기웃거리며 이야기를 수집한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희귀병을 앓고 있어 매일 책을 읽고 뭔가를 쓰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만 집중된 편독에서 벗어나 인문의 세계를 배우려고 인문쟁이에 지원했고, 여러 인문공간을 통해 많은 경험과 추억을 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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