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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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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문학 자연

6. “만물을 품은 씨앗을 이성이 움직이다.”

-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 - 아낙사고라스의 이성(nous)론

by 김헌 / 2021.02.23

철학의 뿌리를 찾아서는? 세상엔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철학은 시작됩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직접 찾아가 보고, 생각한 것을 실행하기도 합니다. 치열한 노력 끝에 앎에 이르러 느끼는 희열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요.  이 모든 과정을 다듬어 낸 그리스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철학의 뿌리를 찾고자 합니다.



나물 시루에 콩알을 넣고 물만 부어 주는데도 콩나물이 됩니다. 물방울 속에 콩나물이 들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콩알이 물만 먹고 콩나물로 자라날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생겨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물방울 속에는 애초에 콩나물이 될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왜 같은 물을 먹는데 다른 것들이 피어날까



코스모스 사진

코스모스 사진



땅에 코스모스 씨를 뿌려봅니다. 얼마 후, 코스모스가 피어나겠지요? 당연한 일이지만, 신비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렸을 적에 본 동화에는 꽃씨를 먹은 아이의 머리에서 꽃이 피어났습니다. 그땐 정말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런 상상의 세계 속에서는 코스모스 씨를 한 움큼 집어삼키면, 가을쯤에 제 머리에서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매일 코스모스 씨만 먹는다고 해도, 제 머리에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머리카락이 자라날 겁니다. 왜 그럴까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코스모스 씨를 먹는데도 코스모스는 자라지 않고, 머리카락을 먹은 것도 아닌데 머리카락이 자라나니까요. 밥과 국과 김치를 먹었을 뿐인데, 왜 먹지도 않는 머리카락이, 손톱과 발톱이 자라는 걸까요?


코스모스도 그래요. 땅에 뿌린 씨앗에서 왜 싹이 트고 뿌리가 자라고, 줄기가 뻗어 나와 꽃이 피어나는 걸까요? 아, 씨앗에서 뻗어 나온 뿌리가 땅속에 배어 있는 물을 빨아들이고, 그 물에 들어 있는 미네랄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거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씨앗이 물을 빨아들이고서 꽃을 피워 내는 거지요? 왜 같은 물을 먹는데도 민들레 꽃씨는 민들레를 피워 내고, 저는 머리카락과 손톱과 발톱을 피워 내는 걸까요?


혹시 이런 건가요? 물속에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작게 코스모스와 민들레가 들어있고,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도 모두 다 들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가 물을 마시면 물방울 속에서 들어 있던 작디작은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이 빠져나와 손톱과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옮겨지는 것이고, 그 물을 코스모스가 마시면 물방울 속에 있던 코스모스의 미세한 꽃이 분리되어 코스모스 꽃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작은 물방물 속에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 들어 있겠군요.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콩나물이 자라는 모습

콩나물이 자라는 모습



아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고요? 그럼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볼까 요? 콩나물 시루에 콩알을 넣고 물만 부어 주는데도 콩나물이 됩니다. 물방울 속에 콩나물이 들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콩알이 물만 먹고 콩나물로 자라날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생겨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물방울 속에는 애초에 콩나물이 될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기원전 4세기, 소아시아의 클라조메나이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기원전 499-428년)의 생각입니다. 그는 ‘만물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했지요. 탈레스는 만물이 모두 물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아낙사고라스는 어떻게 물에서 물이 아닌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머리카락과 콩나물이 자라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탈레스의 주장을 거부했겠지요? 물뿐만 아니라, 불과 흙, 공기가 사랑과 미움의 원리에 따라 섞이고 갈라서면서 코스모스도, 머리카락도, 콩나물도 생겨나는 것이라는 엠페도클레스의 설명도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새로운 것을 생각했지요.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씨앗(sperma)이 있다고 말입니다.



최초로 정신적인 근원을 떠올린 철학자



씨앗

자라나는 씨앗



그에 따르면, 그 씨앗 속에는 코스모스, 머리카락, 콩나물 같은 것들이 아주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크기로 들어있다가, 그중 하나가 떨어져 나와 다른 씨앗 속에 있던 것 같은 부분들과 합해지면 코스모스도 되고, 머리카락도 되고, 콩나물도 되는 거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합되는 모든 것 속에는 온갖 종류의 많은 것이 들어있다. 그것들은 만물의 씨앗들인데, 온갖 종류의 형태뿐만 아니라, 색깔도 맛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을 품은 이 씨앗들이 왜 가만히 있지 않고, 특정한 모양을 갖도록 흩어지고 새로 결합해서 이 세상을 만든 걸까요? 씨앗들이 움직이는 원인이 무엇일지 여전히 궁금합니다. 물론 씨앗이 그냥 그 자체로 움직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낙사고라스는 그렇게 생각하긴 싫었던 모양입니다. 씨앗이 그냥 움직인다면, 세계는 기계처럼 돌아가는 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세상이 그 어떤 고귀한 목적이나 가치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게 되니까, 그것이 불만이었던 같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게 질서 잡혀 있음에 대한 경탄이, 그리고 세상이 지금 당장은 불합리한 것 같지만 언젠가는 ‘사필귀정’, 올바른 형세로 바로 잡혀야 마땅하다는 도덕적인 열망 때문이었는지, 아낙사고라스는 만물의 씨앗들을 움직이는 다른 요소를 생각했지요. 바로 ‘이성(nous)’ 또는 ‘지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사고라스가 “지성이 ‘코스모스(kosmos)’와 모든 짜임새의 원인”이라고 말했음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스 말에서 ‘코스모스’는 ‘질서’를 뜻합니다. “무한한 시간 동안 모든 것들이 함께 있었으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이성(nous)이 운동을 만들어 넣어 주자 분리되었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요소인 씨앗들과는 별도로 정신적인 존재, 이성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플라톤의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 다스리며, 어떤 것과도 섞여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관통하여 모든 사물들에 코스모스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아낙사고라스는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최초로 물질이 아닌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를 생각했고,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입니다.



이성이 멋진 세상을 만들 거라는 희망



유토피아

유토피아



언뜻 보면, 아낙사고라스가 그려준 세계는 꿈같은 동화 같습니다. 모든 우주를 품은 작은 씨앗들이 무수히 가득한데, 어느 날 고결한 이성이 그것들을 휘저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자 서로 다른 씨앗들 속에 있던 것 같은 것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그 정신은 단정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서 모두 똑같은 모양의 씨앗들이 병렬되어 있는 단조로운 세상에 다채롭고 아름답고 가지런한 질서를 부여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도 깃들어 있는 이성에 따라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멋진 세상이 되겠지요? 아낙사고라스는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이런 정치적 희망을 심어 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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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김헌
고전학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졸업 및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Universite de Strasbourg) 서양고전학 박사. 펴낸 책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이 있음. 서양고전을 널리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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