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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Pachinko)〉, 쌀 한 톨에 깃든 우주적 기억과 사랑

-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김동규

2022-05-11

문학이 아닌 모든 것은 문학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있지만, 또한 아무 곳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풍문과 지식들은 문학을 잘 향유하게 만들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가두고 문학을 납작하게 만든다.  문학의 적이 문학을 호명하는 제도와 교육이라는 것은 문학이 처한 불행이다.  이 연재는 문학제도 안에서 문학을 규정하고 나누는 방식으로 벗어나고자 한다. 이를테면 문학의 정의, 장르와 문학성을 둘러싼 익숙한 개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문학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서 문학에 다가가는 방식을 취하려 한다.  그 속에서 문학을 만나는 일이 나날의 삶을 발명하는 일에 가깝다고 느낄 수 있다면.


역사의 거센 파도 앞에서 한 개인은 지극히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선자 같은 한국인들은 우주적 규모의 기억 매체가 발산하는 아우라를 내뿜으며 강인하게 버텨냈다. 쌀을 넉넉하게 확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것에 담긴......



일제 강점기, 한국인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



시간이 모든 걸 바꿔 버렸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까마득한 일제 강점기를 그려낸 한 장면이지만, 그것이 우리(한국인만이 아닌 세계인)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남루한 옷차림의 여인이 쌀가게로 들어온다. 목소리를 낮추며 살며시 주인에게 쌀을 사고 싶다고 말한다. 쌀가게 주인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며, 여인을 잘 아는 듯하다. 정색하며 그는 쌀을 팔 수 없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엔 쌀을 몽땅 일본으로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여인은 다시 간청한다. 딸이 결혼했고 신랑을 따라 외국으로 이민 가는데, 없는 살림이지만 마지막으로 고향 땅에서 나온 쌀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노인은 주위 시선을 살피며 몰래 여인에게 쌀을 건넨다. 집에 돌아온 여인은 정성스레 쌀을 씻는다. 하얀 쌀뜨물에서 조리로 돌과 잡티를 제거한 뒤 정성스레 쌀을 가마솥에 옮겨놓는다. 뜸 들이려고 장작불을 미세하게 조절한다. 드디어 딸과 사위가 둘러앉은 밥상에 김이 솔솔 오르는 밥공기를 두고 여인은 말없이 방을 나간다. 딸은 밥 한술을 떠 입에 물고 눈물을 흘린다.



파친코 PACHINKO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최근까지 이어온 재일 한국인(자이니치)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드라마다. 감히 나는 위의 한 장면에 드라마의 거의 모든 게 응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전체가 숱한 피사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 ‘쌀’로 수렴되고 울컥 울먹이며 쌀밥을 ‘먹는’ 장면으로 집약된다. 밥을 먹으면서 흘리는 눈물 한 방울에 우리네 인생 전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괴테 어록의 한국어 판본에 해당된다.



쌀에 담긴 철학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의 말이다. 개체인 모나드(monad)가 거대한 우주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이어지는 발상이다. 또는 작은 부분 조각이 전체와 비슷하다는, 즉 자기 유사성의 기하학적 형태를 가진다는 프랙털(fractal) 구조와도 관련된 이야기다. 틱낫한의 책 『How To Eat 먹기명상』에 등장하는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쌀 한 톨을 마음 다함과 집중으로 바라볼 때 단 일 초 만에 이 곡식에 온 우주(빗물, 구름, 지구, 시간, 공간, 농부 그리고 만물)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쌀알을 입 안에 넣으면 온 우주를 입 안에 넣은 것입니다. 이는 생각을 멈추면 가능합니다. 쌀알을 씹을 때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이 경이로운 실재를 맛볼 수 없습니다.


- 『How to Eat 먹기명상』, 틱낫한 지음, 제이슨 디앤토니스 그림, 진우기 옮김, 한빛비즈, 2018.



HOW TO EAT 먹기 명상 틱닛한 지음 진우기 옮김 제이슨 디엔토니스 그림 한빛비즈

『HOW TO EAT 먹기명상』 책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아주 미미한 존재라도, 그것이 있으려면, 우주적인 규모의 인연이 선행해야 한다. 지금 내 수저에 달라붙은 밥풀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있어야만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천문학적으로 맨 먼저 빅뱅이 있어야 하고, 태양과 같은 별들이 만들어져야 하고, 물과 산소가 풍부한 지구가 출현해야 한다.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려 138억 년이라는 천문학적 시간이 필요하다. 생물학적으로는 신비한 생명의 탄생이 있어야 하고, 변화무쌍한 진화의 파고 속에서 무수한 생명체들의 생사가 거듭 이어져야 한다. 문명사적으로는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여 오랜 유목 생활을 하다가 비로소 정착하려는 마음을 가진 인류가 출현해야 한다.



쌀에 녹아있는 민중들의 삶



쌀을 먹으면서 여러 문화, 제도들이 생겨났다. 우선 수저를 비롯한 식기구들이 생겼고, 쌀농사를 짓기 위해 풍부한 물을 조달할 수 있는 거대한 저수지나 수로가 만들어졌고, 그것을 축조하기 위해 마을 단위 공동 노동조직이나 국가 수준의 체제가 생겨났다. 밀보다 2~3배 이상의 수확량을 자랑하는 쌀은 거대한 국가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쌀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 간 영토 전쟁에서부터 국가 내 상층 계급의 악랄한 조직적 수탈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렇듯 쌀 한 톨에는 자연적 재난과 권력자들의 착취에 허덕이는 민중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 가족을 짓누른 억압 기제는 조선의 낙후한 사회체제에서 시작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거쳐 이민자들을 이지메(いじめ) 하는 일본 사회와 미국의 글로벌 금융자본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사랑’이다. 쌀 한 톨에 질기게 이어지는 사랑이 담겨 있다. 부모의 자식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소외된 이들끼리의 연대, 연민 등이 쌀을 나누고 먹여주는 행위 속에 알알이 박혀있다. 우리에게 쌀은 먹는 행위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의미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정현종의 다음의 시가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가을 장마에 물에 잠기니 속상해서 하는 소린데

아직 익지도 않은 벼를 두고

풍년, 풍년 하는 게 아닐세 이 사람들아

(못자리를 두고 ‘풍년’을 선전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으나)

쌀 농사란

논에 서 있는 벼커녕은

타작할 때도 풍년 소리를 해서는 안 되며

창고에 넣은 뒤에도 아직 안 되며

쌀독에 부은 뒤에도 안 되고 오직

밥이 되어 입 속에 들어간 뒤라야

할 수 있는 얘기일세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중 〈쌀 – 1985년 가을〉, 정현종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8.



먹기의 의미



먹기가 폭력적인 행위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아닌 것을 분해하여 내 일부로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위 원죄라는 게 있다면, 태어나자마자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만 목숨을 부지하는 존재 일반의 운명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게 굳이 죄라면, 생명을 살리는 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죄도 폭력도 아니라면 먹기의 다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할 텐데, 지금까지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말한다면, 먹는다는 것은 내 몸 안에 세계를 온축하는 일이다. 쌀을 먹는 것은 옹색하기만 했던 나로부터 탈출하여 우주처럼 거대한 존재로 변신하는 일이다. 자연과 인간의 숨은 조화 덕분에 풍년이 드는 것처럼, 내 입까지 겨우 들어온 밥을 통해 생의 충만한 의미가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우리에게 풍년이란 “오직/밥이 되어 입속에 들어간 뒤라야/할 수 있는 얘기”이다.



식사

식사



밥 한술을 떠서 먹으니 쌀에 담긴 우주가 내 속으로 들어온다. 몸 안에서 의미의 풍성한 잔치가 벌어진다. 이런 의미들의 총체를 마음이라고 해 보자. 쌀로 인해 마음이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된 것에 더해서, 한국인들은 다시 이 마음을 먹기까지 한다. 마음마저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어진다. 삼라만상의 마음을 먹었는데 못 할 일이 어디에 있을까?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까닭은 쌀과 마음을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이런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먹기의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기만 먹지 않고 남에게 먹여준다. 드라마에서 선자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불치병에 걸린 딸에게 어미인 에츠코가 미음을 떠먹여준다. 엠페도클레스가 말했던 우주의 원리인 사랑이 쌀을 통해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럼 밥 이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사랑이다. 밥도 먹고 사랑도 먹어야 살 수 있다. 아니 우리는 밥에 담긴 사랑을 먹고, 서로 떠먹여 주며 살아간다. 밥에 사랑이 가득하다면, 밥 한술에도 배부를 수 있는 법이다.



파친코와 같은 쌀농사



추수

추수



이 드라마는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파친코는 도박 기계명이자 일본의 독특한 게임문화이며, 차별당하는 재일한국인이 주로 경영하고 있는 사업이다. 흥미롭게도 쌀농사는 파친코 도박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쌀은 워낙에 다량의 물이 필요한 작물이기에, 보통 홍수와 가뭄이라는 자연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에서 재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에 따르면,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에서는 적극적으로 재난을 대비하는 국가가 일찌감치 만들어졌으며 자생적인 공동노동조직이 발달하여 협력과 경쟁의 시스템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을 아무리 잘 갖췄어도 파괴적인 재난은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생의 밑천 전부를 걸 수밖에 없는 내기 상황에 직면하곤 한다. 벼농사를 선호했던 한국인들은 자연 재난만이 아니라 귀한 쌀을 강탈하려는 인접 강대국으로 인해 모진 수난을 당했다. 한국인의 이런 한(恨) 많고 굴곡진 삶이 파친코 같은 쌀농사에 녹아있다.


원작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의 거센 파도 앞에서 한 개인은 지극히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선자 같은 한국인들은 우주적 규모의 기억 매체가 발산하는 아우라를 내뿜으며 강인하게 버텨냈다. 쌀을 넉넉하게 확보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그것에 담긴 ‘질긴 사랑’을 배불리 먹었기에 온갖 역경을 꿋꿋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늙은 선자 역의 윤여정 배우) 이마의 주름처럼 생의 곳곳에 생채기가 깊게 파였어도, 사랑이 떠먹여 준 밥 한술에 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철학,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파친코(Pachinko)〉, 쌀 한 톨에 깃든 우주적 기억과 사랑

- 지난 글: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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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철학자 사진
김동규

철학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유럽 현대 철학과 미학이 주요 전공 분야이다. 오랫동안 서양 예술과 철학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 연구에 매진했고, 현재는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매체에 정기적으로 철학 칼럼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철학자의 사랑법』『멜랑콜리아: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 미학: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철학의 모비딕: 예술, 존재,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시는 나의 닻이다』(공저)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공저)가 있고, 『미학적 힘: 미학적 인간학의 근본개념』 『모든 것은 빛난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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