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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탈북 청소년의 스피커’가 된 이유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박경희

2022-05-02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은? 세월을 견디고 오래 사랑받는 문학 작품들은 대개 성공보다 실패를, 대답보다는 질문을, 상식보다는 상식 밖을, 중심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다.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 쓰라린 실패담, 난처한 질문, 보잘것없는 주변의 이야기가 우리의 인식과 지각을 깊이 파고들어 종내는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코너에서는 국내외 문학작품 속 인물들의 서툴고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 알고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작가들의 소개로 만나본다.


〈류명성 통일 빵집〉은, 각기 다른 탈북 청소년의 삶을 그린 단편 소설집이다. 이 책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전국의 많은 남한 청소년 독자를 만났다. ... “작가님은 어쩌면 내 마음을 그리 잘 표현하셨어요? 제가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앞으로도 우리 이야기 많이 써 주세요. 남한 친구들에게 우리가 못하는 이야기 전부를요.”
‘탈북 청소년의 스피커’가 되어도 좋다는 허가증을 받는 기분이었다...



꽤 오랫동안 방송 글을 써 왔다. ‘재미와 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원고를 매일 썼다. 방송이 끝남과 동시에 폐휴지가 되는 원고를 볼 때마다, 가슴에 바람이 일렁였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스멀거렸다.


“내 글을 쓰자.”


소설 공부를 다시 시작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드라마 대본을 써 돈도 벌고 유명해지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 소설을 택했다. 등단하고 곧 장편 소설을 냈다. 질풍노도의 길을 걷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탈북 학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절 인연의 고리는 찰나였다.


“우리 학교에는 70여 명의 탈북 청소년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탈북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이뤄 온 기적 같은 이야기를 글로 써 줄 작가를 찾던 중…작가님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도 잘 써 주실 분 같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에 절절함이 묻어났다. 거절할 수 없는 힘이랄까.


“다음 주에 학교로 찾아뵙겠습니다.”


​탈북 학교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방송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탈북자는 문외한이었다. 나는 탈북 아이들을 만나기 전까지, 찔레 넝쿨 속에 숨어 있던 ‘붉은 삐라’를 떠올렸다. 꽃제비로 전전하던 아이들이 넘쳐 날 것이란 편견과 함께.


두리번거리며 교장실을 찾았다. 머루알처럼 검은 눈동자에 스키니 진 바지, 뾰족구두까지 신은 여학생이 나를 교장실로 안내했다. 나에게 상큼한 미소를 남기고 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청보리처럼 풋풋했다. 잠시 후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교실을 살펴보기 위해 만난 아이들 모습이 좀 전에 본 여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고정 관념이 깨진 순간이었다.



완공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하늘꿈학교' 교사(校舍)(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완공된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하늘꿈학교' 교사(校舍)(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르포를 쓰기로 했다. 방송을 마치면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인터뷰를 시도했다. 선생님들은 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응해 주셨지만, 아이들은 쉽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벽 앞에 선 것처럼 답답했다.


직설적인 질문에 아이들은 슬금슬금 나를 피했다. 교장 선생님과 상의 끝에 직접 〈박경희 작가와 함께 하는 인문학 수업〉을 하기로 했다. 글쓰기와 책 읽기를 병행해 볼 생각이었다. 아이들은 ‘작가’와 얼굴 맞대고 공부하는 게 신기하다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제가 다른 곳에서 살아온 친구들의 독서력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다. 북한에서도 명작이나 동화를 읽긴 했다. 그러나 ‘김일성 삼대의 영웅심’을 고취 시키기 위해 개작한 작품 위주였다. 탈북 학생들의 문해력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난감했다. 어떤 책을 선정해야 좋을까. 고민하다 쉽고 주제가 뚜렷한 그림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그림책을 좋아했다. 한나 요한젠의 〈난 황금 알을 낳을 거야〉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케티 벤트의 그림 또한 생동감을 더했다. 어느 시골 공장의 3천 3백 33마리의 닭이 살아가고 있다. 닭똥과 사료 냄새가 진동하는 비좁은 곳이라 꼼짝하기도 힘든 환경이다. 닭장 속의 닭들은 아무런 기대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 꼬마 닭은 남달랐다. “나는 이다음에 크면 황금알을 낳을 거야.”라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무모한 꿈을 꾼다며 비웃고 조롱했다. 꼬마 닭은 아랑곳없이 ‘도전’한다. 매일 철장을 부리로 쪼아 날아갈 구멍을 만든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일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난 황금 알을 낳을 거야! 한나 요한센 지음 문학동네 이진영 옮김 행복한 청소부 모니카 페트 지음/안토니 보라턴스키 그림/김경연 옮김 풀빛

〈난 황금알을 낳을거야〉(좌)와 〈행복한 청소부〉(우)의 책 표지(이미지 출처: YES24, 교보문고)



나는 탈북 친구들이 꼬마 닭이길 바랐다. 탈북을 꿈꾼 건 대단한 도전이다. 이제 보다 더 구체적인 꿈을 원했다. 꿈이 상상에 그칠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택한 책이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였다. 죽음의 강을 건너온 온 친구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남북의 전혀 다른 교과 과정이다. 북한 영재학교에 다니다 온 학생도 이 고민은 마찬가지다. 영어 한마디 모른 채, 미국 유학 간 학생이나 다를 바 없다. 남북의 언어가 다른 것은 물론, 외래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선생님의 강의를 이해 못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국경 수비대 눈을 피해 압록강을 건널 때보다 더 힘든 남한 수업’이란 탄식이 나올까. 청소부가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을 통해 ‘무지 탈출의 기쁨’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간판을 닦던 청소부는 엄마와 딸의 대화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저기요, 글뤼크 거리라고 해야 하잖아요. 엄마.”

독일어로 글루크는 아무 뜻이 없지만 글뤼크는 ‘행복’이란 뜻이 있다.

“그렇지 않아. 글루크가 맞는단다. 글루크는 작곡가 이름이야. 그 이름을 따서 거리 이름을 붙인 거란다.”


- 행복한 청소부, 문학 동네, 2015



청소부 아저씨는 자기만의 공부를 시작했다. 거리의 주인공 예술가의 삶을 알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고, 공연장 티켓을 샀다. 신문도 꼼꼼히 읽었다. 어느덧, 예술가 이름만 대면 삶을 줄줄 욀 정도가 된다. 청소부는 자신이 아는 지식과 지혜를 간판을 닦으며 노래하듯 읊었다. 일부러 청소부의 길거리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늘었다. 그 모습에 감탄한 한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제의했으나 거절한다. 청소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공부하고 강연하는 것일 뿐, 청소하는 일이 즐겁노라고. 탈북 아이들은 〈행복한 청소부〉를 통해 ‘앎의 즐거움’을 터득해 나갔다.


그림책만 아니라, 명작 속 인물 비평 등 다양한 책을 찾아 읽고 글쓰기를 했다. 탈북 친구들은 ‘사유가 깃든 글쓰기’에 취약하다. 무조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글쓰기를 시도했다. 사연이 없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뼈를 깎는 아픔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런 만큼 남한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거대한 건물과 화려한 조명 불빛을 보며, 초라한 자신을 만나게 된다. 또한 보이지 않는 편견과 따가운 시선에 주눅이 든 상태였다.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존감 수업 윤동균 지음 10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심플라이프 하루에 하나,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존감 회복 훈련

〈자존감 수업〉 책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존재 자체를 부정할 만큼 아픈 아이들과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심플라이프, 2016)을 읽었다. 자존심과 자존감의 구별마저도 모르던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를 사랑하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내가 못난 것 같아 자책하면서도 남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세웠습니다. 방어벽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이제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겠어요. 책에 나온 대로 나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해 볼 생각입니다.”


이 말을 건넨 여학생은 놀랍도록 변해갔다. 당당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희망을 읽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나는 그들의 속살을 만났다. 꽃제비 수용소에서 탈출을 꿈꾸다 죽을 뻔한 아이, 소를 잡아 팔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해 처참하게 죽어가던 아빠의 모습을 그린 아이. 사선을 넘어 이 땅에 같이 온 할머니가 남한살이에 적응하기 힘들어 자살했다는 아이의 신음 등. 아프고 아팠다.


르포 집을 내려 시작한 인문학 수업은, 책이 나온 뒤에도 계속되었다. 내 안에 작은 부채감이 있었다.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조금 특별한 삶을 살아온 탈북 아이들’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나는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절절한 가슴으로 썼다. 사선을 넘는 과정에서부터 진로 고민 등, 통일 후의 삶 등을 그렸다. 어느 작품도 중복되거나 겹치는 내용은 없다. 그만큼 내 안에는 써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Vivavivo 19 류명성 통일빵집 박경희 지음 뜨인돌

〈류명성 통일빵집〉 책 표지(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내 탈북 문학의 첫 작품인 〈류명성 통일 빵집〉은, 각기 다른 탈북 청소년의 삶을 그린 단편 소설집이다. 이 책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전국의 많은 남한 청소년 독자를 만났다.


“우리 곁에 북에서 살다 온 또래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만약 탈북 친구들을 만난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연이 끝난 뒤, 검은 눈망울을 깜박이며 진지하게 말하던 남학생의 모습에 용기가 생겼다. 또한 이 책을 읽은 탈북 제자의 말이 내 문학의 전환점이 되었다.


“작가님은 어쩌면 내 마음을 그리 잘 표현하셨어요? 제가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앞으로도 우리 이야기 많이 써 주세요. 남한 친구들에게 우리가 못하는 이야기 전부를요.”


‘탈북 청소년의 스피커’가 되어도 좋다는 허가증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동화, 르포, 장편 소설 등 경계선 너머의 탈북 이야기를 발표했고, 전했다. 나의 미미한 목소리가 통일의 징검다리가 되길 빌며.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내가 ‘탈북 청소년의 스피커’가 된 이유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잘난 이들의 몰락, 혹은 예측 가능한 실패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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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소설가
196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했다. 20년간 방송 구성 작가로 활동하며, 2006년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의 ‘한국방송라디오 부문 작가상’을 수상 했다. 2004년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사루비아’로 등단하여 소설, 르포, 동화, 에세이 등 경계선을 넘나드는 글을 쓰고 있다. 탈북 학교인 <하늘꿈중고등학교>에서 <박경희 작가와 함께하는 인문학 수업>을 10년간 진행했다. 저서로는 <류명성통일빵집>, <난민소녀 리도희>, <리정혁의 백두산 하이킹>, <리루다네 통일밥상>, <리무산의 서울입성기>, <리수려, 평양에서 온 패션 디자이너>, <고래 날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버진 신드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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